천재동의 다섯 가지

천재동의 다섯가지

무극인 2007. 11. 15. 11:49

 

▣천재동의 다섯가지

 방어진은 일찍이 일인(日人)들에 의해 신 개항지로 개척되면서 일본수산업계는 물론 자연스럽게

서구 문화에 개화된 일본의 문화예술, 의료, 금융, 세관, 극장, 운동경기, 청루, 당구장 등 오락시설이 유입되게 되었다.

경기(景氣)가 활기를 띄게 되면서 조선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모여드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 전통문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 재능을 가진 과객(過客)들도 방어진을 거치면서 훌륭한 족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신라문화권에서 삶을 영위해 오면서 전통문화를 부단히 지켜온 우리네는 언어, 문화, 생활양식이 다른 그들과는

 차별화 될 수밖에 없었다.

 유아기를 거쳐 청소년기에 들면서 그들 일본청소년들과 부닥치게 되고, 직접 맞서는 일은 운동시합이었다.

그들에 비해서 시설환경이나 장비는 턱없이 열악하였지만 육상, 정구, 축구, 야구 시합에서

혼신의 노력으로 이기는 길만이 그들의 우월성과 오만함을 꺾는 유일한 수단(手段)이었다.

 나는 청년기에 들어서 미래에 대하여 계획을 구체화하고 동경(東京)과 서울을 오가며

어릴 때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조형미술과 연극의 기초를 다지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내가 추구한 전공 다섯 가지 모두는 전통민속예술의 범주에 있는 것이다.

가와바다화학교(川端畵學校) 조교시절(1939년)

 

 ◆ 토우(土偶)

 허(許)도령은 오갈 때 없어 우리 집 서사(書士) 김생원을 보좌하면서 우리 집에 묵게 되었는데

 인형 등 장난감을 만드는 솜씨는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보통학교 입학 전후로 경주(慶州) 외가(外家) 일대에서 흩어져 있던 신라토우들을

또래아이들과 같이 즐겨 만든 일들도 허도령의 만들기 솜씨에서 영향을 받은 덕분이라 할 수 있다.

 토우는 민중의 삶이 그대로 녹아들어가 표현된 하나의 역사 덩어리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자라던 시절을 흙을 빚어 역사의 생명을 불어 넣어 후세들에게 보여주고 조상의 얼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좀더 인체해부학적으로 구조화하기 위해서 인체화(人體畵)를 전공하였다.

찰흙을 빚으면서 그 시대의 몸짓을 만드는 데는 소재(素材)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가 자라던 시절의 소재를 찾던 중에 동요를 수집하였고, 그 동요를 테마로

토우를 빚는 작업을 하여 비로소 1968년 4월에 부산시공보관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서울, 수원, 울산 등지에서 전시회를 가져온 것이다.

                                                    추위노래                                                        사랑노래

 

◆ 동요민속화(童謠民俗畵)

 우리 집에는 떠돌이 과객(過客)들이 많이 다녀갔는데 보통 3~4일간 묵는 다양한 재주꾼들 중에는 화가들도 많았다.

산수화, 산중 승려 그림,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 게가 벼 잎을 물고 있는 그림등을 그리는 장면들을 보았고,

묵는 동안에 고맙다는 인사로 그림 여러 장을 선물로 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말없이 묵은 방 벽에

그림을 붙여놓고 훌쩍 떠나버린 과객도 있었다.

보통학교 4학년 때에 담임이던 강돈옥(姜敦沃) 선생님의 지도로 전일본아동화미술대회에「장미」를 출품하여

 특선으로 입상하게 되어 장래 화가의 꿈을 더욱 다지기도 하였다.

1939년에 동경(東京) 가와바다화학교(川端畵學校)를 거쳐 어렵게 목표로 삼았던「특설인체과」에 들어가 서양화를 공부하였다. 1945년 광복된 해 10월에 광복축하유화전이 방어진 최초 전시회가 되었다.

 서양화를 전공하였지만 어릴 때 보았던 과객 화가와 그림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 뜻을 세우고, 소재는 어린 날 우리네 삶의 모습을 동요와 함께 화면을 구성한 『동요민속화』란 새로운 장르를

창안(?)하였는데 토우가 입체표현(立體表現)이라면 동요민속화는 평면적표현(平面的表現)이라 볼 수 있다.

                                                                                  

어깨동무                                                  비노래

 

 

                                                                                  ◆ 연극(演劇)

 신(新) 개항지(開港地)로 건설의 열풍으로 북적거리던 방어진에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생긴

극장 다이쇼깡(大正館)에서는 일본 전통극 문악(文樂), 가부기(歌舞技)가 공연되었고

 밤낮 없이 깃발이 펄럭이고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또한 도끼와깡(常盤?)은 서당에 다닐 즈음에 만들어 졌는데 영화 상연과 연극 공연을 할 수 있게 장치된 극장이었다.

우리 집 서사(書士)의 보좌(補佐)였던 허(許)도령의 등에 업혀 도끼와깡에 드나들며

일본의 유명배우 무대인사도 보았고, 미국 서부영화도 보면서 배우(俳優)가 동경(憧憬)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극단(劇團)인 취성좌(聚星座), 오대양(五大洋) 등 유랑극단(流浪劇團)이 들어오면 온 동네가 들끓었다.

 서울, 부산에 유학하면서 방학이 되면 귀향하여 대청마루에서 벌리는 형님들의 신파극을 보고,

그 영향으로 16세 되던 해에 또래 동무들을 모아 나의 자작(自作) 극(劇) 『부대장(部隊長)』을 도끼와깡에서

주연, 연출 한 일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사건이 되었고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극단을 창단하여 방어진 철공소 창고를 공연장으로 쓰면서 소극장 운동을 벌였다.

 비로소 1941년에 「국민극연구소」에 입소하여 정식으로 연극 공부하기에 이르렀는데

 언어장애(경상도사투리)로 소원이던 배우를 접고 연출과 무대미술 분야에 중점을 두고 일정과정을 수료하고

 이어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東京) 동보계(東寶系)유락좌(有樂座)에서 연출과 무대미술을 재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해방을 맞이하여 아동 및 성인극단을 조직하여 「방일(防日) 반공(反共)」을 소재(素材)로 하여

부락순회계몽연극 공연 활동을 하였다.

1956년 부산에 정착하면서 아동극을 시작으로 「드라마센타부산극회」를 창단하여 연극가족운동을 펼쳐

1971년에「제1회 향토문화상」을, 1985년에는「부산시문화상(무대분야)」을 수상하였다.

 지금껏 연극을 하면서 거의 자작 창작본으로 연출하였고, 무대, 장비 등도 손수 제작하였다.

 한번도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무료공연을 하였다.

전국아동극경연대회(1967. 6)-문화공보부장관상 수상-앵콜 공연 3회 실시함

(연제: 두 마리의 당나귀)

 

 아동극단『바다』(1964년 3월 3일)결단식

 

아동극단『한나란』창단 공연(1972년 10월 25일)

 

◆ 탈(假面)

 해방이 되자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이념적 갈등이 불거지고 여러 분야에서 화합과 협동이 되지 않고 불안한 상태였다.

어디부터 손을 대어야 할 것인지 고심 끝에 뜻을 같이할 수 있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계몽에 나서기로 하였다.

방법은 연극이었다.

해방된 기쁨의 열기를 이용하여「방일(防日) 반공(反共)」을 소재로「순회계몽연극」을 하기로 하였다.

소재에 걸맞게 계몽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기존방식에서 보다 나은 개선책을 찾기 위해 고심한 결과

안면(顔面) 분장을 가면(假面)으로 대처하기로 하였다.

 가면을 사용하기로 한 또 하나의 이유는 다소 이념적 갈등이 있는 관계로

 적극적인 장치는 못되나 연기자를 보호하는 차원에서이다.

가면 만들기는 내가 맡게 되었는데 기껏 만드는 방법이란 1단계적인 수법이었다.

1단계적 수법이란 재료를 종이 등을 이용하여 자르고, 구멍을 뚫고, 붙이는 것 같이 1차적인 수법인 것이다.

가면이 얼굴에 덮어 쓰는 데에만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고 가면 그 자체로 독립된 예술적 가치를 가지게 되기도 한다.

제작방법이 1단계 수법에 거치지 않고 그 동안 5단계 수법으로 까지 발전하였고

비로소 1965년 12월 부산시공보관에서 한국최초로 창작가면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전시회 중에 동래야류가면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고,

 문공부문화재관리국이 가면 전문가 천재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인정한다는 뜻에서 1971년 4월에 문공부문화재관리국 주최로 『천재동창작가면특별전』을

서울 코스모스백화점 전시관에서 성대히 개최하게 되었고

 동년(同年) 9월에 한국 유일의 가면제작 기능보유자 인정서를 받았다.

                                                        가(嘉)                                                     인(忍)

 

한국최초 천재동 탈전시회 (1965년.12월 15~21일, 부산공보관)-국제신문(1965. 12. 17)

 

 

◆ 민속(民俗)놀이

 민속놀이는 우리악기에 우리장단에 우리몸짓과 우리소리로 우리일상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표출하는

 민중의 아우성 이라고 말하고 싶다.

 1965년에 동래야류(東萊野遊)를 처음 접하면서 나는 우리나라 민속을 하나 발견한 것이었다.

동래야류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길놀이의 배치순열을 알게 되었고

앞놀이, 뒷놀이도 발굴하여「동래야류길놀이 도해화(圖解畵)」를 완성 재연,

독일 대통령 환영 길놀이축제 행사 창안 연출,「동래부사송상현군사행렬」단독 채록 및 도해화 완성 재연,

동래충렬제 길놀이 연출, 부산시민위안민속놀이대잔치 길놀이 연출,

목포개항80주년기념 가장행렬 창안 연출, 한국해양대학교 가면놀이 창안 지도 등 다수가 있다.

 어린 날 우리 집 부근에는 일본인(日本人)과 일생인(日生人: 히나세진) 두 집단이 살고 있었는데

 연간 그들의 축제가 한 두 번씩 같은 날 전개되는데

양 단체 구별 없이 모든 집집마다의 처마 밑에는 조화를 줄줄이 엮어 달아 놓은 데서부터

고조된 축제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두 집단 각각 다른 형식으로 벌리는 길놀이 축제행사는 어린 나에게 깊은 인상으로 각인되어 있는데,

 특히 일생인(日生人) 측의 길놀이 축제행사는 볼만하였다.

훗날 일본에서 북륙청삼현(北陸靑森縣)으로 사생여행 갔을 때 대악(大鰐)온천장(溫泉場) 일대에서 본「산제(山祭)」또한

나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이런 일본의 민속놀이에서 나는 크게 영향을 받아 우리의 놀이에 신념을 다하기로 한 것이다.

동래야류 길놀이 발굴 1972년 7월 12일 도해화(圖解畵) 완성

(국제신문, 1973년 12월 5일)

 

 제2회 천재동단독시민위안민속잔치, 제1부  광복동 거리굿 길놀이(1973년 12월 30일)-국제신문(1974년 1월 5일)

 

제3회 천재동단독시민위안민속잔치, 제1부  광복동 거리굿 길놀이(198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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