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159

인성교육으로

노래 「인사」「손뼉을 칩시다」 해방이 되고 울산에서는 중심 학교인 태화국민학교(太和國民學校, 현: 울산초등학교)를 비롯해서 교사 수가 부족하여 각 면에서 선발된 무자격 임시 교사들이 충원 되곤 하였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정식으로 교장, 교감, 교사들이 부임하여 그동안 어수선하던 학교에 학무가 수립되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게 되었지만 식민지 생활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미풍양속은 퇴색되고 이러한 사회 여건 속의 민심은 각박해질 대로 각박해져 어른 아이 모두가 먹고 살기에 급급하여 허덕이는 혼란기에 노래라고는 고작 「봉선화」「별 삼형제」「일편단심」「학도가」「근학가」같은 옛 노래 뿐이어서 좀더 아동들에게 정서적으로 안정을 줄 수 있고 믿음과 사랑이 담긴 현실에 맞는 인성 교육 차원의 새로운 노래가 있어야 되겠다..

천상(天上)의 시인 천상병(千祥炳)

* 천상(天上)의 시인 천상병(千祥炳) 앨범을 한 장 두 장 넘기다 보니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시인(詩人) 이인영(李寅寧)과 천상(天上)의 시인 천상병(千祥炳) 차를 마시는 사람은 전 부경대 총장 강남주, 사진을 찍은 이는 사백(寫伯) 독보(獨步) 허종배(許宗培) 선생이다. 1965년 10월 부산시 공보관에서 한국 최초로 「천재동창작가면전시회」가 개최되기 바로 전날 주변의 친구들이 준비 상태가 염려된 나머지 나의 근무지인 토성초등학교(土城初等學校)나의 학급 교실을 방문한 것이다. “전시 날이 바로 내일인데 이럴 수가 있냐?” 걱정하면서 이 네 친구들이 80여 점의 작품을 용두산(龍頭山) 공원 기슭에 있는 한 여관으로 옮겨 밤을 새워가면서 마무리 작업을 도와 준 덕분으로 전시회가 시종(始終) 성..

국민극연구소 강사들

* 국민극연구소 강사들 류자후(柳子厚) 선생은 고고학자이시다. 선생님께서 일과를 끝마칠 무렵에 연구생 중에서 몇몇을 지적하시면서 저녁 7시까지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 나와 달라고 당부하셨는데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들은 선생님을 따라서 야시장에 들러서 어느 골동품상점 안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허리춤에 큼직한 주머니 두 개를 차고 계셨는데 그 주머니 끈을 풀고는 속에 든 엽전들을 탁자위에 와락 쏟아 부었다. 그 많은 엽전 중에서 몇 닢을 골라내시더니 이와 꼭 같은 것을 진열장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엽전들 중에서 찾아내라고 하셨다. 나는 엽전을 애써 찾으면서, 선생님께서는 엽전 수집이 취미라는 차원을 넘어서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선생님께서는 말이 없었다. 강의하실..

추탕(鰍湯)과 곰탕

* 추탕(鰍湯)과 곰탕 1941년도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에 입성하여 국민극연구소 연구생으로 활동할 때였다. 학습과정에 「인간스케치」란 학습이 있었다. 이는 공연할 작품이 결정돠면 각자 배역도 정해지면서 맡은 역할에 도움이 될만한 성격. 행위, 어투, 표정, 의상 등 보탬이 될 만한 인물과 분위기를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관찰하고 연구하는 학습과정이다. 어느 날 인간스케치 핑계로 동대문 밖 청량리 강변에 있다는 소문난 추탕 집을 몇몇 동료와 함께 찾아갔다. 형제상회라는 상호를 가진 이 식당은 모래밭 위에 세워져 있었고 주변 일대가 모두 모래밭이었는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갈대를 엮어서 칸칸이 만든 온통 갈대 촌이었다. 우리 일행은 한 갈대 칸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여주인이 내어 온..

남남북녀

* 남남북녀 옮긴 하숙집은 다동(茶洞) 또는 다옥동(茶屋洞, 현 청계천)이라 불리는 곳에 있었는데 큰 개천가에 위치하여 네모로 지어진 전통적인 조선 한옥이었다. 주인은 동아일보사 광고부장으로 재직 중인 신(申)씨였다. 식구는 부인, 아들내외. 초등교 4학년 딸 그리고 20대 조카 처녀, 모두가 여섯 식구였다. 신 부장은 넓은 집에 말동무될 젊은 청년을 식구 삶아 방을 내주고 싶다는 말을 부하 직원에게 입버릇처럼 하면서 경상도 청년을 소원하였다는 것인데 결국 내가 영광스럽게도 선정된 것이다. 광고부장 자리는 광고주들이 광고 잘 내 달라는 뜻으로 선물을 많이 한단다, 그래서 선물이 들어 올 때는 사랑채 청마루에 상을 차려 놓고 같이 먹자는 것이다. 어느 날 굴비를 뜯고 맥주를 마셔가면서 남남북녀 설을 늘어놓..

평양여인

* 평양여인 『국민극 연구소』지원자의 한 사람으로 경성에 도착하여 관철동 조그마한 여관에서 묵기로 하였다. 2층 구석방을 내방으로 택했는데 이 여관의 식구는 여주인, 식모 할매, 뽀이 박군 그리고 심부름꾼 소년 현군 모두 네 사람이었다. 무대인이 되고 싶어서 일본 동경에서 조국 서울에 돌아와서 400명의 지원자 가운데서 선발된 38명중의 한 사람이 된 나는 열심히 수강하고 실습에 임하였으며 토․일요일은 물론 공휴일 없이 아침에 나가면 저녁에 숙소에 돌아오는데 극단『현대극장』에서 공연이 있을 때는 밤 11시가 넘어서야 돌아올 수가 있었다. 어느 날 9시경에 돌아와 하루의 피로로 다리를 뻗고 편히 쉬고 있는데 아래쪽 본채에서 남녀간에 싸우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박군아! 2층에 가서 아저씨 오시라 해!” ..

고향 방어진 열풍1

건축·도로공사 매축 등 각종 공사와 활기찬 어업으로 경기가 활발한 방어진에 남·북도 전국 각지에서 일꾼들이 모여들었고, 방어진에 가면 개도 10원짜리 돈을 물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거지와 팔도 각설이 패(대개가 나병환자들이었음)들도 모여들었다. 농악걸립패, 유랑극단, 마술단, 곡마단, 동물시바이(芝居: 극장), 유명 영화배우들의 무대인사, 극장 다이쇼깡(大正舘)에 이어 생긴 도끼와깡(常盤舘)은 영화와 연극을 겸한 극장으로 당시에는 그 대단함을 널리 과시할 만 하였다. 일본 스모 요꼬쯔나(천하장사)대회 등 문화행사가 열릴 때마다 울산, 부산 등지에서 떼를 지어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교통수단으로서는 육상으로 울산을 경유하여 부산에 오가는 경남자동차회사의 노리아이지도샤(乘合自動車)와 산양자동차부(山陽自動車..

동래말뚝이 진품을 찾아내다

* 말뚝이와의 첫 만남 1981년 10월 전국민속놀이 경연대회가 계기가 되어 말로만 들어왔던 서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인천(仁川)에 처음 온 것이다. 인천에 가면 중국인이 경영하는 중화요리를 꼭 먹어 보라는 친구의 말이 생각나서 집사람을 올라오라고 연락을 하였더니 작은 며느리의 보호를 받으며 도착하여 함께 인천에서 중국인의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인천 행사를 모두 마치고 하부(下釜)할 즈음에 서울 국립 중앙 전시관에서 한국의 탈, 국보, 문화재급 전반에 걸쳐 특별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일행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서울 국립 중앙 전시관으로 향했다. 전시관에는 하회탈(원형)을 비롯해서 귀중한 고유 탈들 모두 전시되어 있는데 내가 꼭 보고 싶어 그렇게 원했던 동래..

몰상식

헌 신짝처럼 버려지다 10년이면 산천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다. 나는 30년 간 『동래야류』『동래지신밟기』『동래학춤』이 세 종목을 하루도 결근 없이 연출에 임해왔다. 전수생 3세대를 그치면서 나이나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을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고 바쁘게 지나온 시간들이 나에게 따뜻하게 안겨 오는 것은 내가 정립한 『동래야류』, 내가 무보를 작성하고 안무한 『동래학춤』 과 『동래학춤5인조군무』 그리고 역시 내가 정립한 『동래지신밟기』 이 네 가지 놀이 등이다. 연 100명의 연희자들을 일사불란하게 지도 연출해 오면서 오직 신뢰로서 존대를 받아온 만족감은 내 삶의 총채적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사단법인체라면 엄연히 이사회가 있기 마련이다. 재정(財政)과 인사 등 모든 사안을 이사회를 거쳐 결정하고 집행한다는 것..

조택원과 최승희

'농약 먹은 학'이 안 되길 과거 일본(日本) 석정막(石井莫)의 문하에 들어가서 발레를 공부한 조택원(措澤元)과 최승희(崔承姬)가 있었고 국내에서는 배구자(裵龜子) 이 세분은 우리 춤을 계승하고 보급하는데 크게 공헌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특히 매혹적인 춤은 물론 팔등신에다 미모까지 갖춘 최승희에게 당할 재간이 없던 조택원은 국제 창녀라는 욕설을 퍼붓고 물러서서 결국 이시이 바의 양녀 이시이 미도리와 짝이 되어 밀레(Mllet 프 1814~1875)의 그림 『만종』과 로댕(Rodin 프 1840~1917)의 조각을 주제로 한 두 창작무용으로 일약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었고, 한편 최승희는 타고난 매혹적인 미모로 한국무용의 우아한 우수성을 세계일주 공연을 통해서 그 명성을 널리 날렸으며, 배구자는 국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