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곡에 대한 글,기타

교육계를 놀라게 한 증곡

무극인 2024. 6. 28. 05:46

내가본 천재동 선생

                              부산광역시문인협회장 정 진 채(아동문학가)

 

증곡 천재동 선생 거실에는 사면 벽에 자작의 탈, 토우, 동요화가 빽빽이 걸려있다. 그 가운데 시인 김춘수의절대로 절대로인물시가 서예가 김목운의 글씨에 청초 이석우 화백의 그림으로 이채로운 액자가 서쪽 벽에 걸려있다.

(前略)

千在東의 탈바가지가 그렇듯이

밝은 날도 흐린 날도

절대로 절대로

울지 않는다.

 

한편 북쪽 벽에는 쪽박으로 만들어진 ?희노애락?넉점의 탈이 제자 김남국의 작품인 현목판에 나란히 걸려있다. 색다르게 생긴 손바닥만한 쪽박 하나를 발견하여 착안한 나머지 비슷비슷한 쪽박은 八方을 뛰며 구하고 만든 것이 2년이 걸렸다는 넉 점의 희노애락 탈이지만 증곡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고유의 문틀에 희노애락의 인생사 문구지만 나에게는??자를 빼버린 인생으로 살아왔다.?이렇고 보니 김춘수가 노래한?절대로 절대로?가 어쩌면 증곡의 성품을 잘 나타낸 인간 증곡 천재동의 일생을 이야기한 것이라 하겠다.

한편 증곡이란 아호가 또한 인간 천재동을 잘 나타낸 걸작이라 하겠다. 문인 석도륜 화백이 작명한 것인데 석 화백에 의할 것 같으면?천재동은 어떤 사람인지 겉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精神 빠진 사람같고 어떻게 보면 天才童(千在東)은 모든 방면에 천성적으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僧俗의 두 글자를 사람인을 빼버리면曾谷이 되는데, 소위 전해 내려오는 우리 속담에?중도 소()도 아니다.?란 것인데 바로 천재동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김춘수 시에서 표현한 천재동.

천재동 본인이 말하는?나에게는??자가 없다.?와 석도륜의 命名?曾谷?이상 삼자(三字)가 일치된 천재동 선생의 교직생활 중에 기억나는 몇 가지 발자취를 살펴보기로 한다.

 

 첫인상에 남은 사나이

1956년경 교육자치제가 실시되면서부터 교육청에서는 연례적으로 축하행사로 초등교에서는 축구, 야구, 육상대회가 열렸고 학술 면에는 음악, 무용, 아동극 등 다채로운 행사가 베풀어졌다. 주최 측인 교육청에서 베풀어진 행렬을 보았다. 가장한 자동차 위에 초등교생 차림의 육척 인형이 오른손에 태극기를 잡고 양손을 높이 들어 올리면서 만세를 외치는 광경을 보았다. 당시 해방과 6.25사변을 맞이하여 인심이 메말라 무엇을 갈망한 목마른 시기라 눈요기로 베풀어진 이 행렬을 본 사람은 감탄했다. 나도 그 중의 한사람이요 문인의 의식에서 움직이는 인형의 까닭을 살펴보니 인형 뒤에는 숨은 40대의 한 사나이가 양손에 줄을 잡고 박자에 맞춰 줄을 당겼다가 놓고 하는 것을 발견했다. 잊을 수 없는 그 사나이의 인상은 그 이후 오늘까지 내 가슴에 새겨진 것이 아닐까.

 

 두 번째 인상에 남은 사나이

교육자치제 축하행사의 하나인 아동극 경영장인 대청동 남일학교 강당으로 갔다. 수준이 상당한 작품들 중에 또 하나의 색다른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도회지에 온 시골 쥐?란 아동극이었는데 지도교사의 연출 모습이 가설무대 미 완비 관계로 훤히 노출되어 관중들이 쉽게 볼 수 있었다. 지도교사는 무대아래 말단에서 한 개의 북과 나무 토막하나, 왼손에는 하모니카를 쥐고 극작의 진행에 따라 오른 손으로 북을 치며 박자를 잡고 왼손으로 하모니카를 불며 때로는 비비쥐소리와 나무토막으로 무대바닥을 치곤하는데 여기에 응해 출연아동들의 연기가 말 그대로 너무 극적인 극이었다. 그 지도교사가 누군가하고 살펴보니, 가장행렬때 만세 부르는 인형을 조정하던 40대 사나이 초등교사가 아니었던가. 나는 너무 큰 인상을 두 번째 맞이한 것이다. 당시 심사였던 먼구름(한형석, 부산대교수)선생은 내가 찾고자하는 친구를 오늘 발견했다. 또 조유로(아동문학가)는 오늘 연극 귀신을 보았다. 입에서 비비 소리를 내니 구멍에 쥐새끼가 들락날락하고 하모니카를 불면서 북을 치니 춤을 추고 나무토막으로 나무 바닥을 치니 후닥닥 쥐들이 금방 없어지고, 이거 바로 신출귀몰 아니고 뭔고? 했다.

 

 부산 아동극을 이룬 장본인

이보다 앞서 1956 7개월만 고생하면 부산사대 부속국교로 가게 되었으니 부산으로 오라고 강제적으로 부산교육청에서 데리고 와 금년 부산성지국교에서 갈라져서 독립교가 된 전포국교로 보내졌다. 전포2동 산 아래 밭둑을 닦아 미군용 대천막 둘을 교실로 하고 통조림 딱지로 지붕을 이운 판잣집 본교 소사와 천재동 교사의 숙직실 겸 숙소였다. 당시 월급으로 정미 한 가마씩이였고 증곡 천재동 평교사는 소사와 함께 빗물이 줄줄 새는 판잣집에서 숙식을 같이 했다. <中略>

이해 자치제 축하행사로 각종 학예경연대회가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웅변, 합창, 유희 등등의 종목이 열거되어 있었지만 아동극은 제외되어 있는 것을 알고 증곡은 교육청(당시 동광동, 현 부산호텔자리)에 가서 문의한즉 연극지도력을 갖춘 교사는 한 분도 없는 상태이므로 제외하고 있다는 답변이었다. 전포교에서 연극 한마당에 나가겠다고 애원하니 특별출연 명목으로 간신히 허락했다.?병아리와 바둑이?란 제목으로 대본을 쓰고 손수 세트를 만들고 약 20명의 출연자로 당시 경연 장소인 범일동 소재, 삼일극장에서 해방후 부산에서는 최초의 아동극이 연출된 셈이다.

 

당시 사범계출신 교사는 극소수였고 대부분 교원양성소 출신자와 기타 비사계로 교육계를 충당하고 있었다. 여름, 겨울 방학기마다 재교육 강습회로 교원들은 엉덩이가 헐어 상처까지 얻을 정도로 혹사당했다. 덕택으로 증곡은 초중등 3급정교사와 교감자격증을 딴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나이는 50을 바라보는 햇영감 교사란 말이다.

 

 학교극으로 학교 권위를 세웠다

과거 고향 방어진국교와 울산국교에서 학예회 등으로 학교의 이미지를 높였던 실력을 재 발휘하여?모든 윤희?라는 극 제목으로 대본을 써서 직원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 당시 통일극장(서면 동보극장 전신)에서 막을 올려 대화제를 일으켰다. 결과는 다른 학교로 흘러간 아동들이 다투어 돌아온 것이다. 훗날 웅장한 교사가 재건축되고 서면의 귀족학교란 별명까지 붙었다. 오늘도 전포교에 가면 천재동 냄새가 난다는 말이 있다.

 

 연구수업은 천재동이 항상 맡다

외국교육사절단이 교육시찰차 빈번하게 부산을 찾았다. 때마다 교육위원회에서는 증곡에게 연구수업을 지명한 것이다. 허다한 학교를 제쳐놓고 증곡에게 지명한 것은 학교 전체의 면목을 세우기 위해 첫번째로 환경정리다. 이것도 670%를 증곡의 손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주로 그림이다.?꼭두각시 인형으로 수업?, 증곡 자신이 고안한 산술과?움직이는 입체궤도 수업??극화한 수업??혼합채색으로 그리기 수업?등등 생각도 못해 본 엉뚱한 수업방법으로 참관자들을 매료시켜서 절찬을 받았다. 이 시기 증곡을?애하가끼(일어, 그림엽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55. 12. 28 자격 국민학교 교감(교육부)

우는 교육공무원 소정의 자격기준에 의거하여 두서의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 증서를 수여함(제 아3624, 10 2급봉을 급함).

교감 승격설은 몇 년 전부터 대두된 이야기지만 증곡은 이를 피하고 있었다. 고향은 울산이요 외가는 경주 교동이었다. 교동 최부자가 있는 유명한 곳일 뿐만 아니라 계림이 있고 반월성이 있고 물은 북으로 흐르고 모래는 남으로 흐르는 강이 있는 전설의 고장이다. 어릴 때부터 외가를 드나들며 신라유산을 많이 보고 접한 어린 증곡은 가슴이 여러 가지의 암시성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 흙으로 토우를 빚어 겨울 방학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 난로 불에 구워가면서 硏究에 몰두했다. 만일 교감이 된다면 교육행정관으로서 가면도, 토우도, 아동극도, 그림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진급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교육청에서 몇 차례나 권유를 받았지만 대답을 피했다.

모 학무과장의 말이?이 사람아 어느 누구는 우리 집에 찾아와서 현금 700만환이 든 보따리를 내놓으며 부산시내 15년간 평교사로 종신했지만 교감자리 하나 주지 않더라 면서 울고불고하는 사람도 있는데 자네 공(?)을 줄라 해도 거절하니 그 심정을 모르겠구나?한 사실이 있었다.

 

 남천국교에서 야구단 조직은 50대 노후교사가 지도했다는 점에 있어서 칭찬으로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증곡은 여기서부터 인간 천재동으로 만족하다.

교육자치제 축하행사에 아동극을 참가시켜 최우수교육감상을 수상한 것을 필두로 아동극단갈매기』『바다한국예총 부산지부 미술분과 가입, 7회나 개인전 개최, 사단법인 부산민속보존협회 가입, 전국아동극경연대회 서울출전 문공부장관상 수상, 동래야류소고 소책 발간, 연극가족운동드라마센타 부산극회창단 등, 참으로 가리지 않고 눈부신 활약을 한 것이다. 참말로 중도 소도 아니고 천재동은 무어란 말이야? 항상 벙글벙글 웃고 성낼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

 

 1955 10월 한국최초의 가면전시회 개최

증곡은 1955년도 부산으로 이주해 왔지만 해방직후부터 가면에 매력을 느껴 제작에 몰두해 왔다. 증곡의 말에 의하면 그림은 켄버스를 세워놓고 화필을 통해 채색해 나가는 단순한 작업이지만 탈의 경우 직접 손으로 매만지는 작업으로 손가락을 통해 온 몸과 정신을 전율케하는 감각, 참으로 제작과정의 쾌락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내 장식으로 또한 뒤집어쓰고 연극, 무용, 기타 여러 가지 놀이의 도구도 되는 때문이란 것이다. 듣고 보면 동감이 가는 말씀이다. 그동안 모아둔 작품들을 천재동 탈작품전이란 이름하에 한국 최초의 희귀한 전시가 부산시 공보실에 개최되어 화제가 된 것이다.

 1967 3월 독일 뤼브퀴 내부 환영

길놀이 구상, 계획, 제작, 600명 동원, 지도, 연출, 총지휘하여 대성공함.

 

 

 1968 4월 또 하나 한국최초의 전시회

증곡은 오래 전부터?내가 누구냐??로 자기 자신을 찾는데 오랫동안 헤매다 겨우 찾아낸 것이?나는 한국사람이다?라는 결말을 보았다. 소년시절부터 경주 교동 외가 집으로 다니면서 가슴깊이 새겨둔 신라토우의 현재화의 재현이었다. 천년 전의 이야기를 담은 신라토우라면 현세는 현세대로의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현대화로 재현시킬 의무가 우리 한국인의 자체에 있지 않을까하여 틈틈이 제작해 둔 토우 48점과 탈만들기에 앞서 바가지의 질감을 탐지하기 위하여 만든 바가지에 조각하여 채색한 작품 27점을 ?바가지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토우와 함께 한국 최초로 부산공보실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것이었다.

 

 1969 11월 교직을 그만 두다

증곡은 교직 25년간 절대로 절대로 울지 않았고 희노애락에 ??자를 몰랐고 교육행정 당면자들이나 동료 직원들에게 존대를 받으며 별명으로 화엽서, 로맨스 파파, 천재동(天才童). 학교장도, 교육위원회에서도 사표를 받아주지 않아 결국 달리는 교육감 이윤근(李潤根) 승용차 안에 사표를 던져 넣고 만 것인데 이것이 25년간 교직생활의 마지막 장식이었다.

 

 위촉장

성명 천 재 동귀하를 1976학년도 부산시 교육위원회 민간 장학위원회 위원으로 위촉합니다.

                                    1976 7 1

                               부산시교육위원회 교육감 구용현

 

교육위원회에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 뒤 위와 같이 위촉장이 날아온 것이다. 교육계에서 증곡을 얼마나 아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잖은가?

                                200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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