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곡에 대한 신문기사

부산상록수합창단 탄생

무극인 2020. 3. 29. 20:52

입력 : 2004-06-23 01:01:56수정 : 2009-01-13 12:57:33게재 : 1970-01-01 00:00:00 (25면)

소나무는 눈이 내려 더 푸르다

부산 할아버지 합창단 '상록수'

깊은 연륜으로 주름진 세월 펴다 - 부산일보

       

 지난 14일 먼구름 한형석 선생 한중 추모사업회 창립식이 열리던 날.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 20여명이 나비넥타이를 메고 무대에 섰다. 올해 89세인 동래들놀음 인간문화재 천재동 선생도 즉석에서 합류했다. 이들은 광복군들이 중국 대륙에서 불렀던 '압록강행진곡'을 노래하며 감회에 젖었다. 그래 벌써 30여년 전의 일이다.

 지난 197610월 부산 중구 동광동의 허름한 선술집. 교사 예술인 등 50~60대 몇몇이 거나하게 한 잔씩 걸친 뒤 소위 '18'을 부르기 시작했다. 천재동 선생은 옛 동요들을 불렀고.한형석 선생은 '코스모스'를 노래했다. 노래부르기가 끝나고 누군가 말을 꺼냈다. '이럴 게 아니라 정식으로 합창단이라도 만들어서 활동하면 어떻겠노?'

 이렇게 해서 1976118일 부산상록수합창단이 탄생했다. 한형석 천재동 선생을 비롯해서 작고한 장지완 선생 등 16명이 창단 단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비록 뒤에 45세로 완화시키긴 했지만 한동안 50세 이상만 가입할 수 있도록 연령제한을 했었다.

 70~80년대가 이들에겐 봄날이었다. 자식들 혼사 때 풍경 하나. 딸 셋을 출가시킨 방부원(77) 단장의 이야기다. '주례는 항상 먼구름 선생이 섰지. 그런데 주례사가 끝나고 결혼식 마지막 순서로 앞 줄에 앉아있던 단원들이 '즐거운 나의 집'이란 축가를 불렀어. 축가를 부를 때면 주례를 본 먼구름 선생이나 혼주인 나도 단원의 입장에서 함께 무대에 섰지. 아버지들이 불러주는 축가는 하객들에게 뿐만 아니라 장안에 화제가 됐지.'


 1981년 제31회를 시작으로,1982년 제32회,1984년 제34회 진주개천예술제에서 연거푸 합창일반부 최우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뿐 아니다. 1979년 부산대 상대 축제,1982년 부산대 5월 축제를 비롯해 대학축제에 공식 초청을 받아 대학생들 앞에서 열띤 환호를 받기도 했다. 1988년에는 손자뻘 되는 부산시립소년소녀합창단 단원들과 함께 송년음악회를 꾸미기도 했다. 그때가 전성기였다.

 그렇게 할아버지 합창단은 28년을 이어 왔다. 황혼의 해는 더욱 짧게 느껴지는 법인데 28년이라니. 하지만 해가 갈수록 단원들의 흰머리는 늘어났고,한둘씩 '불귀의 객'이 되면서 빈자리도 생겨났다. 할아버지 합창단의 특성상 고운 음색의 테너 파트는 늘 부족했다. 이런 세월의 난관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한번은 빼놓지 않고 모여 은빛 화음을 다듬고 있다.

 무엇이 이들을 30년 가까이 모이게 했을까. 끈끈한 정이다. 하지만 부산상록수합창단에는 다른 합창단이 갖지 못한 정체성이 있다. 창단 때부터 줄곧 지휘를 맡아온 박형태(73) 선생은 주저없이 한형석 선생의 존재를 맨 앞자리에 둔다. 조그만 다툼이라도 벌어질라 치면 창단 때부터 맏형으로 합창단의 중심을 잡아왔던 한형석 선생의 한마디에 이내 단원들간의 이견은 봄눈 녹듯 사라졌다.

 그가 작곡한 '압록강행진곡'은 단가나 마찬가지였다. 이 곡과 관련된 후일담 하나. 부산서 열리는 광복군 연례 모임에서 부산상록수합창단은 '압록강행진곡'을 부를 요량으로 맹 연습을 했다. 아름다운 2부 합창으로 노래를 부르자 한형석 선생이 제동을 걸었다. '이 노래는 그렇게 불러서는 안돼요. 굶주리고 헐벗고 잠 못자는 광복군이 그리 씩씩하게 잘 부를 수 있겠어요. 숨이 가빠 틀리기도 해야 노래의 참 맛이 나는 거지.' 선생의 이런 모습이 합창단의 버팀목이 됐음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압록강행진곡'은 그 의미 외에도 발성연습에 안성맞춤인 곡이었다. 그래서 창단 때부터 지금까지 연습의 시작과 끝은 이 노래로 했다. 새 단원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배우는 곡도 이 곡이었다.

 부산상록수합창단은 2006년 창단 30주년 기념음악회 때 한형석 선생의 곡들을 모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마침 그해는 한형석 선생이 작고한지 1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부산상록수합창단과 한형석 선생은 이렇게 끈끈한 정을 이어가고 있다. 이상헌기자 ttong@busa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