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곡 천재동(1915~2007)은 현대 울산 문화의 선구자이다.
고향 방어진초등학교를 거쳐 울산초등학교(당시 울산태화국민학교) 근무 중에 본의 아니게 주변으로부터 교육자로 실력을 인정 받아 1956년 부산 교육계에서도 가장 열악한 신설교인 부산전포초등학교에 부임한 후로 부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증곡이 2007년 돌아가시기 까지 41년 동안 부산에서
부산동래민속예술인 동래야류,동래지신밟기,동래학무 등에 관련하여 부족한 부분을 조사,발굴,재현 등으로 정립하였고
개인적으로는 창작탈,창작토우,동요민속화 등의 장르를 개척하였으며 교육 분야에서도 교수법을 연극적(능동적)으로 또는 시각적인 괘도 등 부교재 창안 활용, 연극등 학예활동을 통하여 재미있는 학교,애교심을 갖게하여 하나부터 열까지 최고로 열악한 학교를 귀족학교로 승화시켜 당시 학부모 교육감을 비롯하여 교육계를 감동시켰지만 오늘 날 신화로 전해 오고 있다.
다섯 번에 걸쳐 행사한 천재동 단독 '부산시민위안잔치'는 창작탈 창작토우 창작동요민속화 등 전시회와 자작 시나리오와 자작소품 등으로 연출한 연극과 그리고 민속길놀이는 부산시장의 승인하에 남포동 차없는 거리에서 행하였고, 증곡은 자비로 북치고 장구치고 수 백명 인물동원은 감히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해냈다.
부산시정 문화행사에도 자문, 기획, 연출하는 등 그리고 아동극단,성인극단을 창단 공연......그칠 줄도 모르던 증곡의 예술에 대한 열정은 돌아가시기 40일 전 회고록 출판기념 날에 내 논 회고록 "아흔 고개를 넘으니 할 일이 더욱 많구나!" 이 회고록 표지 주제 글에서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증곡이 생전에 각고의 노력으로 고증을 받아 발굴하여 도해圖解한 '동래야류 길놀이 행렬순도'는 유족의 허락없이 저작권 침해되어 부산지하철 4호선 동래역사내에 타일 벽화로 제작되어있는 상태이다.
오늘 울산 대왕암공원 증곡이 호연지기를 기르던 이 곳 증곡의 유해터에 서서 부산이나 고향인 울산 어디에도 증곡의 기념비나 표시 한 점 없는 서운함에 "부산은 문화의 불모지"라 하소연 하는 부산 문화인들 뇌리에서도 사라져 가는 것 같아서 가슴이 더 아려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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