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진문(徐鎭文)과 『모』 사건
서진문에 대한 신문보도를 요약하면
◆총독부 제4회 안부조사 도착…
본부사서 관내 현주자… , 서진문(21) 동면 일산리… (동아일보, 1923. 9. 28. 금)
◆본사 특파원 제6회 안부조사
… 서진문 울산 동면 … (동아일보, 1923. 10. 8. 월)
◆일산녀자야학
경남 울산군 동면 일산리에는 본래 여자의 교육기관이 전무하든 바 차를 유감으로 생각하야 동리 서진문씨 외 제씨는 당지 보성강습소 내에 여자야학회를 개설하고 조선어, 산술, 수공 등을 교수하는바 방금 40여 명의 강습생을 수용 중인대 여자교육계에 공헌이 다대하다하야 일반의 칭송이 적적하다더라.(울산) (동아일보, 2. 6. 수)
◆울산 8단체 연합간담회
… 울산 사회단체 간담회는 … 경남 울산군 방어진에서 개최하얏는데 … 재일노총 서진문 제씨의 감상담을 더욱 이채를 발하고 ….(방어진)…(중외일보, 1927. 11. 7. 월)
◆지난 이십칠일에 미명에 재일본조선 로동조합을 습격하야 지도 간부를 검거하엿다함은 긔보도한바어니와 그중에 신내천 조선로동조합 서무부장 서진문 씨는 십륙일에 인력거로 석방되엿는데 그는 신음하다가 십칠일 오후 닐곱시경에 필경 가티 검속되엿든 리성백군을 속히 구원하라 나는 아모리해도 못살겟다는 등 유언을 남기고 고만 세상을 떠낫더라.(조선일보, 1928. 11. 27)
◆심장각기 중 피검, 유치장에서 필경 절명
- 울산군 출생 서진문, 석방운동도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횡빈시 수서에서 필경 절명되엇다. 지난 10월 25일 미명에 횡빈시 수서 형사 수십명이 돌연 활동을 개시하야 신내천현 조선로동조합 횡빈지부를 습격하야 서진문, 김천해, 이성백 등 다수한 조선사람을 검속하얏섯는데 그 중 서진문군은 잡혀가기 전부터 심장각기로 맥박이 일백오에 올라 거의 죽게 되엇섯슴으로 동기들은 그의 석방운동도 하얏스나 수서에서는 들어주지도 아니할 뿐만 아니라 경찰의를 불러 보이지도 아니하는 동안에 지난 십일월십륙일에 니르러 마츰내 절명하고 말은 사건이 잇다는바 원인은 경찰서 류치장에서 죽엇슴으로 자세히 알 수 업스나 풍문으로 떠돌아 다니는 말을 종합하면 가혹한 취됴와 천식과 한기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라는데 그가 죽을 찰라에 무산계급 ○○만세! 얼른 리군을 구원하라! 나는 벌서 살아나지 못하겟다라 하며 거리검속을 당하얏든 리성백, 리승렬 두 사람의 장래를 무한 걱정하얏다는데 서진문군은 본적을 경남 울산군 동면 일산리에 두고 횡빈시 중구 본목기륜 일천사백구십구번디에서 오래전부터 로동운동을 하야왓다는바 그의 고향에는 미망인으로 윤상필 녀사가 친덩 어머니와 어린 딸 하나를 봉손하고 슬픔에 잠기어엿다한다(동아일보, 1928. 12. 7)
◆고 서진문군 유족 전송식
_ 3일 횡빈에서
귀보한 바와 가티『모』사건에 관련되야 일즉이 횡빈시 가하서에 구금되엇다가 거긔서 죽은 고 서진문군의 유골과 부인 윤씨와 딸 정자의 전송식을 지난 1월 3일 오후 3시에 신내천현 조선로동조합회관 안에서 60여 명의 남녀동지가 회합하얏는데 사회자 권일선군의 개회사가 시작되매 일동은 10분간의 묵도가 잇슨 후 각처에서 온 남녀동지들의 눈물석긴 전송사로써 맛치고 덩거장으로 떠날 때 최후의 고별로 부인 윤씨는 딸 정자를 안고 통곡하며 동지들은 유골을 둘러싸고 군이 평소에 부르는 xx가를 고창하야 울음과 노래가온데 회관을 떠나 동지들의 유족만세 삼창으로 동 오후 8시 17분 급행렬차로 횡빈역을 떠나 군의 고향인 울산으로 향하얏다더라. (조선일보, 1929. 1. 12)
◆고 서진문군 장례식을 거행
노동운동의 선구자로 제1선에 서서 만흔 활동을 하다가 『모』 사건에관련되어 일측 횡빈가하서에 구금되엇다가 객사한 고 서진문의 유족 전별식을 횡빈에서 하엿다는 것은 기보된 바이니 군의 고향인 울산에서는 거 11일 오전 3시 방어진 부두에서 기다리든 5월청년동맹원의 출영으로 무사히 운구하야 12일에 각 단체원의 연합으로 여러 동지가 서로 상여를 메고 운구하야 비통하고 정숙한 가온데서 장식을 맛치고 묘전에 비석까지 세웠다더라. (조선일보, 1929, 1. 20)
◆서군 추도회에서 동포 10명 검속
- 횡빈에서 열린 추도회에서, 불온하다고 10여 명이 잡혀
횡빈에 잇는 신내천조선노동조합에서 오래 동안 분투하고 잇든 로동운동의 맹장 서진문군이 작년 11월에 『모」사건으로 횡빈경찰서에 검거되어 필경 형무소에 수감되어 잇든 중 경찰서에서 당한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병을 어더 보석출옥된지 불과 긔일에 드듸어 이 세상을 떠나버린지 벌서 1주년이 되엇슴으로 전긔 신내천조선로동조합에서는 지난 19일 오후 7시에 횡빈 신수관에서 동지 5백여 명이 회합하야 그의 추도회를 엄숙하게 거행하얏는데 당일 장내 장외에는 다수 경관이 출동하야 경계가 비상하얏다 하며 추도사, 추도문은 중지 또는 압수를 당하고 서진화 외 10여 명은 검속까지 당하얏더라. (동아일보, 1929. 11. 27. 수)
◆지난 십구일 오후 칠시 신내천현 조선로동조합 주최로 횡빈시내 신수관에서 고서진문군의 제일주년 추도회가 열리엇는데 장내장외에는 수백명 경관의 경계가 자못 살긔를 띠엿으며 시작되기 전에 장내 입구에는 검속자를 시러갈 감옥자동차가 두 대이나 준비되어 잇든 중 장내에 부처노흔 표어가 불온하다하여 전부 압수를 하는 등 이와가티 험악한 분위긔 속에서 오백여 명의 대중의 집합으로 정각이 되자 정웅군이 등단하야 개회를 선언 동시에 의미심장한 개회사로 비롯하야 묵도 삼분간과 리성렬 군의 략력 보고가 잇슨 후 추도문 랑독에 들어가자 읽기도 전에 전부를 압수당하얏스며 추도사에 들어가서 고 서군의 친동생되는 서진화군을 비롯하야 대부분이 중지 검속을 당함에 여긔 분개한 대중은 노호성을 연발하야 장내의 공긔는 미구에 수라장으로 화할 형세이엇스나 원래 경관의 엄중한 경계로 인하야 별일업시 오후 십시경에 산회하얏는데 고 서군이 로동자의 리익을 대표하야 맹렬히 싸호든 투사이엇스며 군의 죽엄이 죽엄인것만큼 특별히 당일의 주목을 끌게되엇스며 검속된 사람의 씨명은 다음과 갓다더라(조선일보, 1929. 11. 28)
이상은 장인 서진문이 1928년에 순직한 다음해인 1929년 까지 신문에 보도된 내용들이다.
위 1928년도 보도 내용 중
… 미명에 재일본조선로동조합을 습격하여 지도 간부를 검거하엿다함은 …
(조선일보. 1928. 11. 28)
지난 10월 25일 미명에 횡빈시 수서 형사 수십명이 돌연 활동을 개시하야
신내천현 조선로동조합 횡빈 지부를 습격하야 서진문 … 등 다수한 조선사람을
검거 검속하얏는데 … (1928. 12. 7)에서 습격하여 검거하였다. 하였고
순직한 다음해인 1929년도 보도 내용은
노동운동의 선구자로 제1선에서서 만흔 활동을 하다가 …
(조선일보. 1929. 1. 20)
… 오래동안 분투하고 잇든 로동운동의 맹장 서진문군 …
(동아일보. 1929. 11. 27. 수)
… 고 서군이 로동자의 리익을 대표하여 맹렬히 싸호든 투사이엇스며 …
(조선일보. 1929. 11. 28)
이상의 보도 내용으로 보아 서진문이 핵심적 지도 간부였으며 그 활동상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진문만 가혹한 고문으로 죽임에 이르게 된 데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의 여지가 있다.
다음 내용을 살펴보면
귀보한 바와 가티 「모」사건에 관련되야 … (조선일보. 1929. 1. 12)
노동운동의 선구자로 제1선에서서 만흔 활동을 하다가「모」사건에 관련되어
… (조선일보. 1929. 1. 20)
… 로동운동의 맹장 서진문군이 작년 11월에 「모」사건으로
… (동아일보. 1929. 11. 27. 수) 에서와 같이 「모」사건 이라고 하였는바 「모」사건이 어떤 사건인지가 매우 궁금하다. 급습하여 간부들이 다수 체포되었는데 서진문이 이십 여 일간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는 동안에 혹독한 고문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 단순히 노동운동만이 체포 요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내가 결혼전 청년시절에 고향 바닥에 나돌았던 서진문에 대한 이야기와 결혼 후 사위가 되어 장모님으로부터 자세히 들은 바에 의하면 장인 서진문이일본왕 히로히토 어대전 행사시에 꽃으로 장식한 전차에 직접 뛰어들어 권총으로 일왕을 살해하려다 체포되었다.고 들었으며 또한 서진문 생전에 함께 국내외에서 활동한 동지나 기타 지인들이 장모님 안부인사차 방문하였을 때도 같은 말씀들이었다. 당시 어대전 행사를 전후하여 일본 당국은 삼엄한 경계를 펼쳤으리라 추측할 수가 있다.
아내의 회고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어느 때인가 도일하기 전 날 일산진 우리 동네 동편 해돋이 동대산 산등선 소나무 숲을 바라보시며 산머리에 바람이 불면 내가 살아있는 줄 알고 바람이 멎으면 내가 죽은 줄로 알아라하셨고 또 잠시 귀국하셨다가 도일하기 전날 뒷마당 채소밭 울타리에 핀 개나리 한 그루를 뽑아다 어머니께서 부엌일 하시면서 쉽게 볼 수 있는 곳에다 옮겨 심으면서 이 꽃이 피어 있으면 내가 살아 있는 것으로 알고, 시들면 내가 죽은 줄로 알아라하셨다.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도일(渡日)하신 해인 1928년 6월에 비로소 다섯 살 때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를 만나러 일본에 건너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어머니 손에 이끌려 일본 신내천횡빈시(神奈川橫濱市) 혼모구로 갔을 때 아버지께서는 시기적으로 잘 왔다고 하시면서 두 모녀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조금 있다가 내 뼈를 고향으로 가지고 가라고 하셨을 때 우리 모녀는 울고 말았다고 기술하였는데 이와 같은 정황을 보아 서진문은 생사를 걸고 어떤 대사를 치르고자 의연한 결의가 이미 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928년 11월 21일 전일본조선로동조합장으로 성대히 장례를 치른 며칠 후 야간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린 뒤 1시경 누군가 대문을 두들겼다. 누구냐고 물으니 고베(神戶)에서 온 동아일보 기자라고 하였다. 집 앞에 설치된 경찰감시초소를 피하는 눈치였다. 잠시만 들어가도 되겠느냐며, 들어와서는 놀라지 말라고 하면서 서진문에 대하여 자세히 듣고는 통금이 해제가 된 후인 새벽에 돌아갔다.고 유가족인 장모님과 딸인 나의 아내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십 여일 후에 보도된 동아일보(1928. 12, 7)는 ... 서진문군은 잡혀가기 전부터 심장각기로 맥박이 일백오에 올라 거의 죽게 되엇섯슴으로 ... 하였는데
평소 건강한 모습으로 고향 교단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후학을 가르쳤고 일본에서는 노동자 동료대중 앞 단상에서 주먹으로 책상바닥을 내리 쳐가면서 열변으로 토로하는 모습을 모녀가 직접 목격하였으며, 재일본조선노동총연맹 대회에서 서진문은 의안심사위원, 예산결산심사위원, 전형위원 그리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당시 일본지역 조선인 노동자들의 구심적 역할인 신중앙위원에 선임된 점 등등을 보아 그러한 중책과 활동을 병약한 자에게 맡길 수 있었을까? 장모님은 물론 친인척과 주변 지인들의 말씀에도 장인의 병세에 대하여는 한마디 하신 바도 들어 본 바도 없다.
위의 기사에 이어 동아일보는 …풍문으로 떠돌아다니는 말을 종합하면 그의 고향에는 미망인으로 윤상필 녀사가 친덩 어머니와 어린 딸 하나를 봉손하고 슬픔에 잠기엿다한다.로 기사화 한 점에서 당시 일본 땅에 거주했던 유가족으로서는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동아일보는 다음해인 1929. 11. 27. 수요일 보도에서는 … 로동운동의 맹장 서진문군이 작년 11월에 『모」사건으로 횡빈경찰서에 검거되어 필경 형무소에 수감되어 잇든 중 경찰서에서 당한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병을 어더 보석출옥된지 불과 긔일에 드듸어 이 세상을 떠나버린지 벌서 1주년이 되엇슴으로 …한 내용은 작년도 보도 내용과는 상반되게 기술한 것을 볼 때 체포 동기와 사인(死因)을 감추기 위해 호도한 것이라고 예측이 된다.
2004년 울산 동구 지역사 연구소 심포지엄(2004. 11. 15, 월)에서 「울산 동구의 항일운동 재조명」이란 제하의 조사유인물에 의하면 당시 서진문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원인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그가 일본왕의 어대전 행사 때 꽃전차를 덮쳐 권총으로 일본왕을 살해하려다가 실패하고 체포되었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견해는 히로히토 일본왕의 어대전 행사를 앞두고 실시된 검열과정에 적발되어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가운데 서진문이 어대전 행사에 직접 뛰어들어 권총으로 일본왕을 살해하려했다고 하는 주장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대전 행사가 11월 10일인데 서진문이 체포된 것은 10월 25일이기 때문이다.라고 하고있다.
따라서 두 가지 체포 경위에서 후자인 10월 25일에 예비 검속되었다 하더라도 어떤 「모 사건에 관련되어」있었는지 사건의 주제를 알 수가 없다. 이십 여 일간이나 구속되어 있으면서 죽임을 당할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면 어떤 대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과거 왜곡된 역사, 의문의 역사들이 재조명되고, 하나씩 의문이 풀리고 있는 이 시점에서 볼 때 장인 서진문의 체포 동기가 명명백백하게 밝혀졌을 때 억울한 죽임에 대한 고 서진문의 명예가 회복되리라 생각한다.
「서진문 항일운동 재조명」심포지엄에서 일본에서는 1928년 11월 10일 御大典 행사를 끝내고 나서 여러 관공서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 졌는데, 경찰로는 유일하게 서진문을 체포하여 고문했던 橫濱경찰서가 수상하게 된다. 이것은 서진문의 일본왕 암살과 모종의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즉, 횡빈경찰서에서 御大典 행사를 앞둔 시점에서 서진문을 체포한 것이 일본왕 암살 계획을 사전에 탐지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많은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일본 정부에서는 그들 왕의 암살을 사전에 차단한 횡빈경찰서에 당연히 포상했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미망인인 장모께서 생생히 기억하여 증언한 바를 보아도 10월 25일과 御大典 그리고 일본왕 암살로 연결되는 숨겨진 모종의 대사건이 있었음이 명확하다고 본다. 끝으로 「모 사건」의 명확한 진실을 밝히는 데는 오직 수사기록 문서만이 결정적 열쇠가 된다고 생각되는데, 경찰수사기록문서 열람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증곡의 장인 서진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에서 만난 두 사람 (0) | 2021.03.13 |
---|---|
증곡의 장인 서진문 (0) | 2020.12.12 |
1996년8월25일 서진문 묘소 (0) | 2020.06.11 |
순국선열의 날 추모제(2018.11.17) (0) | 2020.05.18 |
울산에서 보내온 보성학교 만화 (0) | 2019.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