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극 연구생으로
어느 날 우연히 총독부(總督府) 주최 국민극 연구생(國民劇 硏究生) 모집이란 기사를 보았다.
나는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로 알고,
더블 양복 한 벌 맞춰 입고 일단 귀국하여 서울로 향했다.
관철동(貫徹洞) 조그마한 여관에 투숙하기로 하고
시험장인 휘문중학교(徽文中學校, 現:휘문고교)로 가보니
38명 선발인데 놀랍게도 무려 400명의 지원자가 응시한 것이 아닌가,
동경(東京)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큰맘 먹고 모처럼 서울까지 왔으니 시험이라도 치르는 것이 도리 같아서
시험에 응하기로 하였다.
연극인으로 선발된 사람은 연극 요인으로서
농어촌, 공장, 군대 등에 위문 공연하는 이동극단(移動劇團) 단원이 되는데
징용, 징병에서 제외되는 특혜를 준다는 것이다.
기중에는 순전히 그 특혜만을 노린 지원자가 다수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차 지필 시험에 무난하게 통과되었지만
면접시험이란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대문(南大門)뒤 태평로(太平路)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어학계(韓國語學界)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차례가 되어 강당 내로 들어가서 시험관 앞에 섰다.
일본 동경(東京)에서 맞춰 입은 양복에다
서울 명동(明洞: 당시는 本町이라 함)에서 30원(円) 60전(錢) 주고 사 신은 신조화(新造靴)의 차림인 나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 본 시험관은
“자네! 전공이 뭐냐?”고 첫 질문을 했다.
“예! 미술학교 재학 중 입니다”.
“왜 미술가가 되려고 하지 않고 무대인을 지원했지? ” .
“둘 다 하고 싶습니다. ”
사실은 400명 중 미술 전공은 나 혼자였다.
“그래?!자네 욕심이 많구나,
그러면 고구마 껍질을 먹을 줄 아느냐?”
상상 밖의 질문에 나는 당황해서 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설명을 조용히 해 주셨다.
“무대인은 가난뱅이거든, 오늘도 공연을 끝내고 하숙소로 가는 길에,
추운 겨울이라 외투 호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는 순간 잡히는 것이 있어,
집어내어 보니 10전짜리 돈이었다. 이 돈 10전으로 군고구마를 산다.
이불속에 들어가서 고구마를 맛있게 먹고 잠을 잤는데,
이튿날 아침잠에서 깨어 보니 머리맡에 간밤에 까서 버린 고구마 껍질이 있잖느냐 말이다,
자네 같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 .
”……먹……겠……”
당시는 연극인을 무대인이라 했다.
“좋아! 아침 끼니를 때우기 위해 먹는다 말이야! 죽을 때는 무대 위에서 죽어! 자네 그런 각오 하느냐?” .
“예……”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나가!”
나는 진땀을 흘리면서 돌아서 터벅터벅 나가는데
“잠깐! ”하기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는데
“좋아! 가!” 하였다.
최종 합격자 명단은 어학원(語學院) 담 벽에 붙었는데
맨 끝에서 두 번째에 내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 훗날 극작가 오세덕(吳世德) 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지만
더블 양복을 걸치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그렇게 멋이 있더라 하고
또 발을 멈추고 돌아서는 모습은 바로 연기적 이였다고 했다.
38명을 선발하는 이유는 크고 작고, 굵고 가늘고,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잘 웃기고, 잘 울리는 사람, 이 재주, 저 재주 등등
여러 형태와 재질로 구성되어야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는 극단 하나가 만들어 진다는 것이었다.
연극사(演劇史), 연극개론(演劇槪論), 극작(劇作), 연출(演出), 장치(裝置),
조명(照明), 효과(効果), 음악(音樂), 건축(建築), 연기(演技), 무용(舞踊), 야담(野談),
가극(歌劇), 기타 등등을 6개월간 소정(所定)의 교육을 받았다.
주최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주관 극단 현대극장(現代劇場),
소장(所長) 함대훈(咸大勳), 강사(講師) 진영(陣營)은 연극(演劇) 원로(元老) 여러 선생이 출강(出講)하셨는데,
기억할 수 있는 선생은 야담(野談)작가(作家) 윤백남(尹白南), 고고학자(考古學者) 주자후(朱子厚), 무용가(舞踊家) 조택원(趙澤元), 무대미술(舞臺美術) 강성범(姜聖範), 음악가(音樂家) 이종태(李鍾泰), 성악가(聲樂家) 임상희(任祥姬), 연출가(演出家) 주영섭(朱永燮), 극작가(劇作家) 오세덕(吳世德), 배우(俳優)로선 이해랑(李海浪), 김동원(金東園), 강홍식(姜弘植),
서대근(徐大根), 전옥(全玉), 유계선(劉桂仙), 김양춘(金陽春).......
교육장소는 휘문중학교, 나는 지금도 휘문중을 모교 같은 애정을 느낀다.
교육 도중에 청강생이라면서 한 20여명이 추가되어 왔다.
그 청강생 중에 비밀순사가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의심하였는데,
그렇게 의심을 받는 청강생이 접근해 오면 “워리워리”하며, 개 부르는 구호로 또는 손뼉을 쳐서 서로 간에 신호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민족애로 굳게 단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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