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94. 산제(山祭) “처녀를 잡아라”

무극인 2009. 9. 29. 11:10

     산제(山祭) “처녀를 잡아라”

우리 특설 인체과 동료 몇몇이 북륙청삼현(北陸靑森縣)으로 사생 여행을 갔다.

주로 산음도(山陰道)란 동해(東海)로 접한 국도를 걸었다.

이 길은 옛날 성주(城主)인 대명(大名)들이 가마를 타고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세를 과시하며 행차한 길로써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고송(古松)들이 볼만했다.

홍전시(弘前市)를 중심으로 해서 며칠을 보내다가 대악(大鰐)온천장(溫泉場)에 들어서니

그곳 주민들이 축제 준비하노라고 한창이었다.

무슨 축제냐고 물어보니『산제(山祭)』라 했다.

메야마(할미산) 정상을 중심으로 산자락 둘레에 산재하고 있는 부락들이

해마다 할미를 위로 하는 뜻에서 베풀어지는 축제인 것이다.

고향 방어진에서도 일인(日人)측과 일생(日生)측에서

각각 형식이 다른 축제가 베풀어지는데 일생(日生)측의 축제는 정말 볼만하였다.

이곳 축제는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어서 나는 동료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가로지(唐牛)라는 마을 농가에 민박하여 다락에서 지내면서 축제일을 기다렸다.

이 지방의 사투리는 쯔~쯔변(辯)이라 해서 알아듣기가 몹시 어려웠는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와중에 우연히

대나무로 스키를 만든다는 북해도(北海島) 사람을 사귀게 되어 동행하면서

덕분에 주민들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히 해결되었고,

이 사람을 통해 축제에 참여할 의사를 주최측에 신청 하였더니

쾌히 승낙하면서 행사비 일금 오십 전을 지불 하라 하였다.

이 오십전은 내가 당일 사용 할 기구 만드는 재료를 구입하는데 드는 대금이었다.

축제날이 왔다.

빌려주는 의상으로 단장하고 회목(檜木)으로 곱게 깎아 만든 들것을 들고

대열 속에 한사람이 되었다.

축제는 일부 특정 사람들만이 치르는 것이 아니라 거부락적(巨部落的)으로,

모든 개인 사업은 문을 내리닫는 등 철시(撤市)해 가면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심지어 전선(戰線)에 출정(出征)하고 없는 군인(軍人)은 사진(寫眞)을 참여시켜서까지

부락민 모두가 하루를, 말 그대로 대축제 속에서 먹고 마시고 춤춘다는 것이다.

들것을 든 젊은이들 사이사이에 처녀들도 끼어 있는데,

이들은 검은색 동전을 댄 하얀 웃옷에 검정색 몸배바지로 의상을 갖추고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콧대에 분을 칠하는 등으로 몸단장을 한 뒤

진지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산정을 향해 올라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사~에기 사에기 / 독고이 사에기 / 오야마니 가지다…….”

뜻은 알 수 없었지만 노래의 박자에 맞추어 들것을 흔들어 가면서

할미산을 향해 올라가는데, 이 마을, 저 마을의 행렬들이 모여드는 광경이 정말 장관이었다.

산정에는 여신(女神)을 모시는 신사(神祠)가 있어 모두 참배하고 음식연(飮食宴)이 벌어졌다.

음식연을 벌리면서부터 마음의 해방이 되어 즐거운 기분으로 하산하면서 또 다른 쇼가 있었다.

오늘을 위해 수개월 전부터 길러 잘 가꾼 머리와 의상은

흡사 중국 옛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동자의 모습과 닮았는데,

이렇게 분장을 한 연희자가 갈대를 담은 큼직한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소고삐를 잡고 놀아나는 동작은 실로 일품이었다.

소달구지에 탄 어린이 악대는 통수를 불고, 북, 바라를 치면서 놀아나고,

그 박자에 맞춰 모두들 열을 지어 손에 회목(檜木)가지를 잡고 춤추면서 행진한다.

밤 9시경 삼림(森林)의 신주(神主)를 모신 부락 신사(神祠)에 도착하면

오늘 행사의 끝을 고하고 해산하는데,

바로 그때 통역을 맡았던 북해도 사람이 날더러

“오이! 도래! 도래!(여보게! 잡아라! 잡아라!)”하는 것이 아닌가.

“뭘 잡으라는 것인가?” 물으니

“처녀를 잡아라”하는 것이다.

아무리 성 개방의 나라 일본이지만 이해가 안 되면서

한국과의 풍습을 충분히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는 되었다.

이날 행사가 끝나면, 남자는 여자를 잡을 수 있고,

잡힌 여자는 남자의 품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도회지에서 남자들이 원정도 오는데 이 기회에 한 여자를 잡아 여수(旅愁)를 풀어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일로 자식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지? 했더니,

시집을 갔다 할지라도 시가(媤家)에서는 신(神)이 점지한 자식이라 해서 소중히 키운다고 했다.

여인의 정조를 최고의 미덕으로 자랑하는 우리나라서는 이해가 가지지 않은 풍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