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93. 두 번째 청루(靑樓) 구경

무극인 2009. 9. 29. 11:00

    두 번째 청루(靑樓) 구경

얼마 뒤에 나는 홍고구 긴수깨쬬(本鄕區金助町)로 방을 옮겼다.

고교(高橋)란 성(姓)을 가진 사람의 집이었는데

남편은 천엽포병현역(千葉砲兵現役)으로 본토 방위로 근무하는 관계로 집에는 없었다.

나와 동갑인 부인은 가내 양재업(洋裁業)을 하였고

국대(菊代)라는 미혼 여조카 아이와 심부름하는 어린 하녀 아이,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남자 식구가 없어서 그런지는 세 여자 모두가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이집 바로 앞에 유명한 「오짜노 미쯔바시 (ぉ茶の水橋)」란 다리가 있고

서북쪽 저 건너편에 니고리이탑(塔)의 거대한 초록색(草綠色)지붕이 보인다.

배급품 대신에 식권으로 교환 했다.

식권 한 장으로 하루 세끼씩 먹게 되어 있어,

한 장이라도 소홀히 취급하면 하루 끼니를 굶어야 한다.

한창 식욕이 왕성한 때인지라 사실은 배가 자주 고팠다.

당시에 배급제가 되자 가정집 식당업소가 많이 생겨,

온 식구가 종사원이 되었다.

내가 단골로 드나드는 식당 딸이 무슨 영문인지

구석 자리에 나를 앉히고는 밥과 반찬을 큰 그릇에 담아 주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이것을 알게 된 고교(高橋)부인은 나를 놀려댔다.

하루는 고교부인이 나에게「요시하라(吉原)」에 가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길원(吉原)이라면 강호시대(江戶時代)로부터 이어온 그 유명한 전통 유흥가로 알고 있던 나는 뜻밖의 물음에 흥미를 가졌었다.

오늘 하교 길에 천초지하도(淺草地下道) 남문 입구로 오라 했다.

그리고 당부하는 말이, 가보면 알지만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온단다.

청루(靑樓)마다 한두 명의 「규스께(牛助)」가 현관 입구에 서 있으니

한부로 쳐다보지도 말고, 말도 걸지 말아야 한다면서,

만일 그네들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을 때는 품속의 비수가 가만있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규스께(牛助)란 창녀가에서 안내와 질서를 유지시키는 역할이 주업이면서 호객도 하는 자들을 일컫는다.

말을 듣고 보면 목숨을 걸고 창녀를 구경해야 된다는 말 같아서 무섭기도 하였고,

또 일본은 성이 개방된 나라라고 하면서도 이럴 수가 있나?

하는 생각에서 나는 더욱 호기심을 가지고 하교하면서 약속된 장소로 갔다.

그런데 처녀인 국대(菊代)도 거기에 와 있는 데는 놀랐다.

요시하라(吉原)에 들어서서 첫인상은 「일본시대극(日本時代劇)」에서 본 그대로였다.

일본의 예복(禮服)인 「하오리하까마」차림의 우조(牛助)들이 선수(扇手)로 멋을 부리며,

예(禮)를 갖추어 구경꾼 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요사이 말하는 관광객이라 할 수 있는 구경꾼들은 주로 늙은 할머니들이 많았고

심지어 아이들 까지 섞인 말 그대로 남녀노소가 무리 지어

이 청루(靑樓), 저 청루(靑樓)를 들락날락 구경하느라 몹시 붐볐다.

나도 현관문을 들어서서 보니 왼쪽에는 창녀들이 그들 고유의 의상으로 갖추어 입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자신이 선택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듯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고,

오른쪽 벽에는 창녀 사진들이 게시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