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동래민속보존협회에 가입했을 당시인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연희자들은 연세가 많았는데 한 분씩 유명을 달리하기 시작하였다. 이 분들은 모두가 어린 시절 어른들이 놀던 야!류의 놀음을 보고 듣고 체험하기도한 산 증인들이다. 이 분들의 놀음을 모태로 삼아 고증을 받아 정리하고 정립된 연희본이 아직도 없는 관계로 연희자와 지도자간에 이견이 발생하는 것은 물론 어제와 오늘의 놀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감히 내가 東萊野遊놀이 연구에 뛰어든 동기가 마련되었다. 나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였을 때 “千在東은 동래사람이 아니다!”라고 전해지면서 74년에 내가 시립 釜山民俗藝術館長으로 취임을 하자마자 나에 대한 감정들이 노골화되었는데 심지어 K 씨 같은 동래유지는 나를 앞에 앉혀놓고, 동래의 사정뿐 아니라 야류에 대해서 일인자로 사무능력이 훌륭한 B 씨가 있는 자리에서 “당국은 눈이 어두웠나? 얼토당토않은 사람을 앉혔나?”고 흥분한 일이 있었고, 뿐만 아니라 “가면제작도 그 기능을 이어 받아온 S 가 있다” 등 감정들을 표면화시켰다. 이로 인하여 민속학자인 S 씨도 덩달아 어느 중앙지 신문에 나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도하게 되었고 또 다른 S 씨도 같은 내용의 글을 무기명으로 청와대, 문공부 기타 단체와 개인 앞으로 투서하여 전국의 민속예술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청와대에서 조사인이 나오고 서울대학교 L 교수는 개봉안한 봉투를 가지고 부산까지 날 찾아와 진상을 알아보는 가운데 S 씨의 입장에 동정이 간다면서 탄식했다. 이 바람에 나와 B씨는 법원의 검사실에 2차에 걸쳐 출두명령을 받았다. 나는 집안 식구들의 권유로 문화재관리국에 사퇴의사를 통고했더니 오히려 S 씨가 가짜임이 판명되었고 누군가 개인 아니면 집단적으로 나를 음해한 것이 분명한 사실로 드러나면서 이일은 일단 끝이 나게 되었다.“千先生의 실적을 가지고 정당하게 지정받은 지가 7년이나 되니 아무 말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 면서 문화재관리국에서 인편으로 통고해 왔지만 매우 시원섭섭하였다.
그 동안에 어떤 이사장은 재임 기간 동안의 감사 등 모든 영광을 실무자에게 안겨 실무자로 하여금 책무의 소중함을 일깨워 줌과 동시에 당신은 본의 아니게 고매(高邁)한 인격체로 칭송받았고, 어떤 이는 본인이 모든 수상을 즐겨 독차지하여 실제 공이 큰 자를 원망케 만들고 당신 스스로 존경 받기를 포기한 것을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것에 나는 애석하여 눈물지었다.
협회 출범이후 1999년12월 31일까지 대만, 중국, 일본 등지의 해외 공연 시 모두 나에게는 일체 비밀로 했다. 그리고 2001년 4월 현재까지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공로상, 감사장 수여가 몇 차례 있었건만 나에게는 36년 동안 한 번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상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없었다. 내가 상을 초월하고 산다는 것을 알고 있던 타 지역 출신 동료가 화가 나서 밤중에 전화로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요? 잠만 자기요!”하였다.
부산시에서 협회에 의뢰한 시 주최 풍어제등 수많은 일을 나에게 맡겨 놓고 따뜻한 말 한마디 위로조차 들은 바가 없었다. 어느 해 시로부터 또 풍어제 의뢰를 받았다. 일을 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나 뿐이기 때문에 응당히 혼자서 할 수 밖엔 도리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일에 책정된 예산금이라고는 지금껏 지급 받은바가 없었을 뿐더러 비용에 대하여 들은 바도 없었다. 재료 등 필요한 물건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연구 끝에 당시 우암동에 위치한 성창합판공장(盛昌合板工場)을 찾아가서 행사와 용도를 자세히 말하고 기증해 줄 것을 부탁하였더니 불량품을 회사의 소형 화물차에 가득 실어 갖다 주었다. 또한 페인트가 필요해서 가야동에 위치한 제비표 페인트공장을 방문하였다. 공장안에 들어서니 앞뜰을 소공원으로 조성하여 아늑한 분위기가 넘치는 환경이었다. 사장을 만나보니 쾌활하고 첫인상이 이해심이 풍부하게 느껴지면서, 사장답게 풍기는 인상과 정원의 분위기가 잘 어울렸다. 취지를 이야기 드렸더니 내가 마음먹은 그것들 즉 페인트 및 크고 작은 붓들과 부속기물 일절을 챙겨주어 차에 싣고 왔다. 지금도 이 두 곳 회사의 사장님들께 진정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이렇게 구한 합판과 페인트로 작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런 중에도 기억나는 일은 내가 애써 정립하여 완성한 『東萊野遊演戱本』을 온천장 철도호텔에서 3일 동안의 전문가(?) 검토를 거친 결과 무사히 통과된 후에 M씨가 L 씨 저(著)〔韓國假面舞劇〕책을 나에게 주면서 “ 그동안 애 많이 썼소. 우리가 보답할 것이 없소. 이 책은 L 박사가 우리 협회에 보내온 것인데 축하의 의미로 千先生께 드리오.”하는 것이었다. 이 책 선물은 36년간에 있었던 단 한 번의 귀중한 기념품이 된 것이다.
한때『東萊들놀음』책을 발간한다면서 참여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편집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당시 나는 병으로 인해 병원에서 퇴원한지 얼마 되지 않아 불편하였으나 책임감을 느껴서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드디어 『東萊들놀음』이란 高級의 책자가 발간되었다. 며칠 후 어느 날 편집위원중의 한 분 문화재전문위원이었던 K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맨 뒷 난에 편집위원들의 명단 속에 당신이름이 빠지고 없는데 어찌된 일이냐?” 하는 것이었다. 책을 들여다보니 그러했다. 나는 아무에게도 항의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 이사장 임기가 시작되면서 “너는 동래사람 아니다” 등등의 분위기가 암암리에 전개되고 있던 터인데다 아예 말 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얼마 후 스스로 잘못을 깨달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실수를 했다.”고 사과 아닌 사과가 있었다. 1998年 어느 날 이사장은 “전 종목 연출 총 책임은 30여년간 맡아왔지만 늙고 병든 몸이 되었으니 원로로 모시고 후임을 K○○에게 맡기겠다.” 이런 식으로 사석에서 선언하고만 것은, 지금까지 발 편하게 잘 신고 왔던 짚신이 낡아 못쓰게 되니 훌쩍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 격으로 명색이 사단법인 단체 이사장의 처사로 보기는 너무 저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사안은 공적석상에서 올바른 방법과 절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식 밖의 처사에, 굳이 내가 동래사람이 아닌 것이 정말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천재동은 1965년 10월 하순까지는 동래야류의 야(野)자도 몰랐지만 1971년 9월 13일자로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류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미술공부, 연극공부(연출, 무대미술, 무용, 음악 등)는 물론 스포츠(육상, 축구, 야구, 정구, 배구)도 남 못지않게 잘 하였다. 특히 미술분야 중에서 일찍이 창작탈도 만들어왔다. 그래서 내가 지닌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사단법인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 크게 일조하였다고 자신 있게 자부한다.
그 동안 동래야유, 동래지신밟기 연희본을 작성해서 책임연출자에 임했고, 동래학춤 발굴에 동참하여 무보를 그렸으며 전국대회에 출전하기 위하여 5인조 군무를 안무도 하였다. 거기에다 「東萊野遊 길놀이」를 발굴하여 도해화(圖解畵) 제작하여 발표하였고 또한 「동래부사송상현군사행렬도」도 고증과 연구 끝에 7미터 크기로 도해화(圖解畵)한 대 작품이 동래문화원에 소장되어 있다. 「동래야유」,「동래지신밟기」,「동래학춤」,이 세 종목을 1998년까지 연출자로서 무려 30여 년 동안 심신을 다 바쳤다.
어느 이사장은 『사단법인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가 그냥 막나가는 놀이패들 모임으로 착각을 하였는지 연희자 들을 공장 직공들 부리듯 하여 그의 추종자와 회원들 간에 언쟁이 자자하기도 하였다. 입버릇처럼 “지가 뭔데!”, “지가 뭔데!”, “야류는 지 보다 내가 더 많이 알아!”를 연발하면서 자만에 가득차 있었다. 어느 해 제주도에서 행사가 있을 때였는데 행사전야에 제주시장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시장관사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젊은 남녀회원 K와 P를 개인 비서처럼 대동해 갈 기미가 보여 K 에게 “이사장의 심복이니까 이런 초대에는 인간문화재들이 참석하는 것이 맞는 일이지 젊은 남녀 비서를 거느리고 가서야 되겠느냐?”하고 말 전하라고 하였더니 심복이 뭐냐고 따지며 항의하는 바람에 그만 두었다.
1977년 12월 송년호. 『대한지방행정공제회』에서 발행한 지방행정지에「自治時代의 地方探究⑭ 釜山 東萊區」편에『東萊를 빛낸 사람들』이란 제하(題下)에 실린 내용에 박○○(國會議員) 추○○(前 建設交通部長官) 박○○(地方自治經營協會長) 문○○(東儀醫療院 病院長) 추○○(前 釜山高校長) 김○○(文學家) 천재동(鄕土民俗藝術家) 김○○(同一고무벨트(株)會長) 이○○(韓國石油化學工業協會長) 이○○(前 釜山每日新聞社長) 등 10名을 소개하는 가인데 이 중 아홉 名은 모두가 東萊出身들이고 나머지 한 명은 東萊出身이 아니다. 그러면 동래출신이 아닌 千在東에 대해 쓰인 내용을 소개해 보면
“ 千在東 翁은 重要無形文化財 第18號 東萊野遊 假面製作 技能保有者이자 釜山民俗藝術保存協會 演出擔當 理事이며 鄕土民俗藝術 分野의 巨匠으로서 어릴 때부터 藝術에 대한 才能이 特出하여 1938년 홀로 渡日하여 日本天端畵學校를 2년 修了하고 1940년 歸國後 總督府 時節 一時 敎師로 在職하다 現代劇團이 主管하는 硏究所 硏究生으로 들어가 演劇과 因緣을 맺은 以來 옛날부터 東萊地域에 傳해 내려오는 民俗놀이의 硏究 및 繼承發展에 全力을 다하고 있다. 第6回 全國民俗藝術競演大會에서 大統領賞을 受賞한 無形文化財 第18號인 「東萊野遊」. 釜山市 指定 無形文化財 第3號인 「東萊鶴춤」. 釜山市 指定 無形文化財 第4號 「東萊地神밟기」의 臺本인 演戱本 整理를 위해 10餘年間 硏究와 考證 및 鑑定을 거쳐 演戱本을 完成했다.
1965년부터 現在까지 獨自的인 創作탈을 製作하여 20餘會에 걸쳐 展示하고 있으며 1971년에는 東萊野遊탈 製作 技能保有者로 指定된 後 東萊野遊길놀이 行列圖. 軍士行列圖. 東萊鶴춤 舞譜를 作成하여 現在에도 再現하고 있다. 1974년 市立 釜山民俗藝術院 初代館長을 거쳐 現在까지 28년간 東萊野遊, 東萊鶴춤, 東萊地神밟기 演出擔當 및 總 監督으로 活動하고 있다. 著書로는 「東萊野遊硏究」「東萊野遊小考」가 있으며 71年에는 鄕土文化賞, 85年에는 釜山市 文化賞을 受賞한 바 있다. 30餘年 탈과 함께 울고 웃어온 그의 얼굴은 영락없는 말뚝이가 되었다.” 했지만도 협회나 동래인 중에서는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관지에서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 기사가 사실이라면 어떤 이는 바보가 되어야 되고 그렇지 않고 기사가 거짓이라면 『대한지방행정공제회』편집자의 능력이 무능함을 면치 못하리라. 2001년 7월 25일자 발행된 지역지인 『釜山의 民俗』藝人探訪 내용 중에 특정 인물 M 씨를 내세워 터무니없게도 “혁혁한 공헌을 이바지 해 왔으며 부산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를 4종목(동래야류, 동래학춤, 동래지신밟기, 동래고무)을 발굴하여 무형문화재로 등록하는 등……(後略)��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이 네 種目 中 東萊鼓舞는 내가 알 수 없고 東萊野遊는 해방 전에 송석하선생이 채록한 연희본이 이미 학계에 알려진 것이 사실이고, 해방 후에 최상수선생의 채록본이 역시 세상에 다 알려져 있다. 현재 사용하는 연희본은 1972년 7월에 천재동이 재정립하여 학계로부터 검정을 받아낸 것이다. 東萊鶴춤은 徐國英과 千在東이 여관방에서 각각 글을 쓰고 무보를 그려서 文化公報部 文化財管理局에 등록하였으며 현재의 5인조 군무는 1972년 7월에 천재동이 정립하고 안무를 하여 오늘 날에 이르게 되었다. 東萊地神밟기는 연희본 없이 놀이하여 오던 것을 역시 1972년 7월에 千在東이 東萊地神밟기 연희본을 정립하여 학계로부터 인정을 받아서 오늘 날에 이르게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M 씨가 회원으로서 공헌한 바가 없지는 않으나 모르는 사람들이 기사 내용그대로 인식해 버린다면 역사가 엄청난 왜곡에 처하기 때문에 진실을 밝혀두는 것뿐이다.
동지(同誌) 3쪽 동래야류 탈에 대한 기사의 원고는 어디서 나왔는지, 충분하고 정확성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내용이어서 매우 안타깝고 민망스럽다. 독보적 전문가 千在東이 건재함에도 불구하고 원고 청탁이나 자문한번 요구하지 않고 자의로 대중지에 불충분한 기사를 싣다니 정말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었다.
2000년 10월 제6회「東萊忠烈祭」가 개최 되었는데 참가인원 670명, 행렬 0.6㎞, 행진거리 4.7㎞ 등등 기사와 함께 千在東이 발굴하여 도해화한 그림도 지면에 소개되었는데 나의 낙관은 빼버렸다. 또한 내가 6월 10일부터 10월 행사 날 까지 무려 5개월간 완전무료봉사로 엄청난 장비제작과 총지휘를 맡아 일했는데도 내가 소속되어 있는 『사단법인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의 소식통인『釜山의 民俗』誌 이면서도 千在東 이름 석자 중 한자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나는 그들로부터 철저한 배척의 대상이었다.
2001년 3월 20일자로 재(再) 발행한 「東萊들놀음」책자의 내용 중에서 누락되었거나 잘못 기록되어있는 부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1934년 2월부터 1973년 12월 7일까지의 사실이 잘 기록되어 오다가 1973년 12월 8일부터 1976년 4월까지 천재동이 관장으로 재임하면서 동래야류전수협회와 직접 관련 된 많은 행사들은 몽땅 누락시켜버렸다.
둘째로 「1976년 5월에 에 제1회 전국 민속백일장 개최 현재까지 지속, 제1회 전국 그네뛰기 대회 개최」하였다고 기록했는데, 이들 행사는 천재동이 1974년 5월에 관장에 취임하여 곧바로 창설하여 부산시립민속예술관 주최하고 동래야류전수협회가 주관하여 오늘 날까지 이어온 것인데 처음부터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가 창설하여 주최한 것처럼 왜곡하였다.
셋째로 162쪽 연혁에서 「1974년 7월 9일에 현 전수관으로 입관함(1969년 문공부 문화재 관리국 예산확보로 동래야류 전수관 건립에 착수 …… 완성됨)」그리고 369쪽에 「1976년 7월 1일자로 동래 금강공원내 민속예술 전수관으로 본 협회 이전<현 전수관>」이 부분에서는 1969년 문화재 관리국에서 책정한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여 박영수 부산시장의 민속예술에 대한 속 깊은 애정으로 배려된 시(市) 지원금으로 충당하여 착공에 들어갔다. 건립된 당시에는 동래야류의 제반 운영체계가 미약하였을 뿐더러 재정상태도 어려웠기 때문에 자립적인 운영이 불가능하여 동래야류 전수관으로 개관하지 못하고 市立釜山民俗藝術館으로 개관되어 시에서 행정직원 2명 급사, 소사 각 1명 그리고 관장인 나까지 5명이 근무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시 직원을 설득하여 관장실 겸 사무실을 釜山民俗藝術保存協會에 제공하고 제 행사도 관(官)으로 내세웠다.
넷째로 214쪽에 「1970년 당시 김기조의 자(子) 김희영(1923-1972)이 학춤의 예능보유자로서 동래학춤에 대한 문화재 지정 보고서가 S 씨에 의해 문화재 관리국에 접수되었다. 1972년에 김희영씨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지정이 보류되어 그 보고서가 현재까지 문화재 관리국에 보관되어 있다」로 잘못 적고 있는데 사실은 S 씨가 문화재 관리국에 보고한 내용은 「김희영이 학춤의 보유자로서 동래학춤에 대한 문화재 지정 보고서」가 아니고 「동래학춤 발굴보고서」이다. 전술 한 바와 같이 S 씨가 글을 쓰고 천재동이 무보를 작성하여 사진첩 등 한보따리 분량인 이 보고서의 등록 번호가 105호로 기억된다.
1965년 제6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김희영씨는 넷째양반 역을 맡았는데, 당시 넷째 양반 역 문화재로 후보선상에 올랐다가 안타깝게도 사망하여 취소되었으며, 동래학춤과 연관시켜 기록된 것은 큰 잘못이다.
千在東은 가족과 협의 없이 훌쩍 직장을 내 팽개치고 사단법인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 가입한 처음부터 신조는 喜怒哀樂 노(怒)자를 빼버린 것이다. 그래서 수많았던 일들을 혼자서 하듯이 다하고 그 모든 행사 결과에서 얻은 영광은 나누어 가지려고 애써왔었다. 그리고 東萊말뚝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東萊地神밟기에서 심신(心神)밟기를 배웠고, 하얀 도포자락을 날리는 東萊鶴춤에서 선학(仙鶴)처럼 되어 살기위해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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