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일들을 해냈다
1965년『부산 민속예술보존협회』에 가입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속예술에 몸을 바쳐 장장 40년 세월,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는 동안 나는 희로애락 중 노怒자만 빼놓고 묵묵히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와 자식들의 교육에 한층 애써야할 쉰다섯의 나이에 인정받고 있던 교직을 박차고 도망치듯 나와 버린 내가 무보수도 마다않고 민속예술단체에 몸을 던진 것은 각오가 크게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희망하였던 꿈을 달성하기위해 조형미술과 연극예술을 공부하였기에 동서남북 가릴 것 없이 투신한 것이었다. 교직에서 불태운 열정을 다시 지펴 시기, 질투, 음해, 왜곡에 아랑곳 않고 내가 아니면 누가하랴! 자부심을 가지고 묵묵히 발굴, 연출, 제작, 지휘하여 오는 가운데 협회와 직접 관련되어 내가 이룩한 것 중에 핵심이 될만한 몇 가지를 정리하여 보면
○.『동래야류(東萊野遊)』를 조사 채록하여 『연희본정립』하는 과정에서 『앞놀이』『뒷놀이』가 나타나게 되어 결국 『동래야류길놀이』를 발굴하였다. 따라서 길놀이의 구성과 순열이 구체적으로 밝혀져 1972년 7월에『동래야류길놀이』 도해화(圖解畵)를 완성하였다.
○.『동래학춤』 발굴자는 서국영, 무보는 천재동, 그 발굴 조사서 제 105호는 현재문화재관리국에 보관되어 있으며, 내가 그린 무보대로 내가 연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5인조 군무』를 내가 안무하고 연출도 하여 전국 민속경연 대회에 참가하였다.
○.『동래지신밟기』연희본을 정립하여 연출하였으며 세트 장치도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을 보았다.
○.1981년도 10월과 다음해인 1982년도 양 해에 걸쳐〔부산시민의 날〕각 구청 대항 길놀이 대회에 『동래부사송상현군사행렬』을 재현하여 우승을 하였다. 동래구청장의 협조 요청에 의해 내가 1981년도에 심혈을 다하여 조사하고 도해화 한 『동래부사송상현군사행렬』을 기획, 장비제작, 연출, 총지휘 감독하여 유감없이 재현하였던 것이다.
○.『동래충렬제』는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우고 동래 민초들과 함께 숨진 송상현(宋象賢)동래부사를 길이 추모하는 동래구민의 가장 큰 행사이다. 2000년 10월 제6회『충렬제』를 앞두고 동래문원에서의 협조요청에 의해서 『동래야류길놀이』와 『동래부사송상현군사행렬』두 작품을 주 행사로 재현하기로 하여 기획, 장치, 제작, 연출 등 총 지휘 하에 동년 6월10일부터 준비에 착수 10월 22일 끝날 때까지 봉사했다. 나의 작품에 나의 제작에 나의 연출에 동래의 자랑 충렬제가 큰 성황리에 전개 된 것이다.
그러나 유감없이 협조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섭섭한 부분이 있다. 행사 중에 『동래야류길놀이』도해화를 포스터와 신문 지면에 실으면서 작가 천재동의 낙관을 완전히 지워 버린 것이다. 그리고 1981년 당시 동래구청장 의뢰로 천재동 완전 단독으로 조사 발굴한『동래부사송상현군사행렬도』(원화 길이 7미터)에 구청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설명한 내용을 보면 이 군사 행렬 도는 임란때 혁혁한 공이 있던 당시의 동래부사 송상현 공의 애국충절과 부산진첨사 정발(鄭撥)공 및 다대 첨사 윤흥신(尹興信)공의 장엄한 전형상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동래성 순절도와 부산진 순절도 및 임란 사료를 모아 학계 문화예술원, 인간문화재 등 각계각층의 중지를 모아 편집된 것이다.라고 거짓으로 기재되어 있다.
2000년도 제6회『충렬제』에 길놀이와 행렬 2점을 축제 길놀이 에 총책을 맡아 달 라 할 때 나는 동래 출신이 아니다. 허다한 동래 출신들을 두고 하필이면 왜 나에게 부탁 하느냐 했더니 두 작품 모두가 선생 작품이니까 천선생 아니면 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좋은 기회로 삼아 6월 10일 날 1차로 J 동래 문화원장이 우리 집을 방문 한 것과 구청장 실에서 3차례에 걸쳐 행사 협의회를 개최 한 석상에서 잘못 기록된 군사 행렬도의 설명문을 지우고 천재동 단독으로 발굴했다는 설명서를 원화 밑에 새로 붙이고 또 동래구청 신문「동래고을」지(紙)에 라도 좋으니 사실대로 정정(訂正) 보도하라!고 요구하였더니 구청장도 문화원장도 약속하였지만 구두약속만으로는 믿을 수 없으니 간단한 각서를 부탁하였다. J 문화원 원장은 화를 내면서 하는 말이 나는 사대부의 자손이요, 집안 명예 를 걸고 한 약속이니 무슨 각서가 필요 합니까? 틀림없이 고쳐 놓고 결과를 연락하겠습니다. 했지만 2년이 지난 오늘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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