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수 김연수(金演洙)
동네 청년들 중에 무학자들이
자기네들 끼리 모여서 만든 신파극을 가끔 공개하였다.
유랑극단 배우 한 사람이
방어진 청년들이 연극을 한다는 것을 알고
제대로 지도하여 공연한 “나까무라상과 가야금 ” 그리고 “ 꾹꾹새” 두 연극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동기 방학 때는 서울 배재전문학교(培材專門學校) 이광삼(李光三),
서울 제2고보 장덕기(張德基), 부산 제2상 천일동(千一東), 동래고보 옥태진(玉泰鎭)외
이규대(李奎大)같은 유학생들이 고향에 돌아오면 연극 공연을 했는데
이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나는 열여섯 살 때 내 또래 친구들을 모아
도끼와깡(常盤錧)에서 연극 공연을 해서
千在東(천재동)아닌 天才童(천재동)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고
“재동 재동 천재동(天才童), 방어진의 천재동(天才童)”
노래아닌 구호까지 사람들의 입에서 외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콜롬비아레코드 전속 가수 김연수(金演洙)가 무대 공연 왔을 때,
노래하는 모습을 즉석에서 그려 무대 밑에서 사인을 청하였더니
김 가수는 놀라면서 나를 무대로 안아 올려
관중에게 내가 그린 그림을 자랑해 보이면서
사인을 해준 후에 관중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게 해준
장면은 잊을 수 없는 추억 중의 하나이다.
훗날 소식으로는
김연수 일행은 화물차에 콜롬비아레코드 회사 간판을 크게 써 붙이고 다니면서,
회사에서 주관하는 순회공연인 것처럼 하여
회사 이름을 도용(盜用)하였다는 이유로 전속가수가 취소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 진주 노랭이
당시 축구공은 3호, 4호, 5호, 6호등으로 크고 작은 공들이 있었다.
시합 때는 4호로 정하고 가격은 2원이었다.
축구란 운동은 눈이오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우나
사시사철 어디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공 한개만 있으면 운동할 수 있는 것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면 대회가 군 대회로, 다시 경남대회가 남선(南鮮)대회,
나아가서 전국축구대회로까지 발전해 갔다.
유명한 평양 백호단, 함흥 XX단, 마산 OB단이 이름 높았고,
선수 개인으로는 “ 진주 노랭이”가 유명하였는데
머리카락 색이 노랗다하여 사람들은 진주 노랭이라고 불렀다.
우리 어린 선수들은 노랭이가 되고 싶어 대회 때마다 옥시풀(Oxyful)로
머리칼을 감아서 노랭이가 되려고 하였다.
지금 추억해 보면 천진난만한 그 시절이 즐거웠고
웃음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남녀들이 노랭이로 염색하여
진주 노랭이가 아니라 서양 노랭이로 둔갑하여
국적 없는 모습으로 활보하고 있다.
이 꼴을 본 한 서예인의 말씀인 즉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머리색을 싫어하고
남의 머리로 변색했으니 이거 불효가 아이고 뭐꼬?”했다.
* 축구계(蹴球界)의 “얼룩 호랑이 ”
보통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바깥세상의 다른 면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무엇보다도 운동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든다.
볏짚으로 둥글게 만들고 거기에다 그물을 씌운 공을
논바닥에서 짚신발로 차면서 노는 공놀이를 보았고,
추석 때면 연중행사로 거행되는 장사씨름 대회도 관람하였다.
하기 방학이 되면 귀향한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주최한
남선축구대회(南鮮蹴球大會)는 내가 축구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됨과 동시에
축구경기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더할 수 없는 기회가 되었다.
등교 길에는 상급생의 지도하에 이끌려 줄을 지어 갔지만
하교 길에는 15리 길을 자유롭게 행동하였는데,
또래아이들과 주먹만한 고무공을 몰아 차면서 돌아오곤 하는 것이
우리 어린이들의 즐거운 놀이이면서 기본축구였다.
당시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방어진 대표선수는
이광삼(李光三 京城培材), 옥태진(玉泰振 東萊高普), 천일동(千一東 釜山二商),
장덕기(張德基 京城二高), 김말봉(金末奉 大邱醫大), 이규대(李奎大 社員),
김재곤(金在坤 金融), 이기용(李基容), 김임득(金任得) 외 기타 선수들로 짜여져 있었다.
축구장은 그 옛날 자전거경주장 이었던 댕방우(大王岩) 섬끝 잔디밭이었는데
시내 서진구 매축지(西津區 埋築地)로 옮겨졌다.
옥태진은 동래고보(東萊高普) 축구단의 주장을 맡아 맹활약하였으며,
우리 방어진 축구팀의 코치도 맡아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또한 코치 옥태진의 영향을 받아 우리 팀의 제복을
코치가 소속된 동래고보의 흑백 가로줄 무늬로 된 것과 꼭 같은 유니폼으로 만들어 입었다.
함경도 함흥(咸鏡道 咸興) 축구단에서 말하기를
“평안도에는 평양 백호가 있고, 경상도에는 얼룩 호랑이가 있다 ” 고
평할 정도로 방어진 축구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어느 해 방어진축구단이 주최한 전조선축구대회에서
방어진 “얼룩 호랑이 ” 팀이 결승전에 올랐을 때
우리 동포들보다도 일본인들이 더욱 열광적으로 좋아하였는데,
그들은 청주(淸酒)를 통 째로 들고 냉주(冷酒)를 들이마셔 가면서,
북 치듯 술통을 마구 두드리면서 응원하는 광경은 볼만하였다.
결국 우리 방어진 팀이 우승을 하였는데
일인들은 자기들이 우승한 것처럼 기뻐하며 우승컵에 청주를 부어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축배를 권하여 올리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
풍진난파 밑에서 /모인 우리들
배고픔을 한하며 /눈물 뿌리며
빈주먹을 마주잡고/ 앞을 나설 때
가슴속에 뛰는 피는/ 근하사(?)를 스치고
금수강산 삼천리에 /몸을 바쳐서
한풀이로 일하세/ 숨 쉴 때까지
노랫말이 정확하게는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우리 선수들과 동포들은 단기와 우승컵을 하늘 높이 들고
축하 시가행진을 하면서 노래를 힘차게 부를 때,
우리 소년들은 그 뒤를 따르면서 노래를 함께 불렀다.
위의 노래 제목은 『적포가(赤包歌)』인데 작사자와 작곡자도 모르고
내포된 뜻의 깊이도 알 수 없으며 누구든지 즐겨 불렀는데
아마도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면서 목청 놓아 부르는 노래였음이 틀림없으리라.
수년이 흐른 후에 우리 또래보다 서너 살 나이가 든
양조복(梁曹福)을 단장으로 한 방어진소년축구단이 결성되었지만
아직은 어리고 기술이 미숙하여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내 나이 17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양조복을 비롯하여
이문규(李文圭),사덕선(史德先), 이몽호(李夢虎), 최임철(崔任哲),
김인출(金仁出), 이광호(李光浩), 박태주(朴台柱) 그리고 이발사 김씨,
센터링을 잘 한다고 하여 별명이 “호미 발” 인 일본 나막신 수리공 박씨,
농업학교 학생 박운종(朴云宗), 천재동 등으로 팀이 짜여지면서,
유학생들로 구성되었던 방어진축구단 “얼룩 호랑이 ”팀이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게 된 셈이 되었다.
우리는 매일 같이 나의 사형인 김임득(金任得)의 코치를 받으면서 연습에 들어갔다.
이 무렵 대 선수였던 이기용(李基容)은
함경도 함흥축구단의 초청에 의해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해가 바뀌면서 동면 축구대회가 울산군 축구대회로,
더 나아가 남선축구대회로 까지 발전되어 갔을 때
나는 주전 선수가 되어 등번호 2번을 달고
제비란 별명으로 종횡무진 뛰어 다녔다.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우리 팀은 명실 공히
대형 축구단으로 성장하였으며
방어진축구단이 주최한 전(全) 조선축구대회에 참가하여 우승도하였는데
당시의 우리 팀 진영을 말하자면 골키퍼 이발사 김씨,
수비에 주전(朱田) 이씨와 부산 영도 김씨,
부산 화가 우신출(禹新出) 그리고 이광우(李光雨), 공격수에는 김임득(金任得),
신장 오척 일촌에 별명이 목탁인 범어사 승려(梵魚寺 僧侶) 최학수(崔學守),
제비 천재동(千在東), 정구(庭球) 선수권 보유자인 황병곤(黃秉坤), 이기용(李基容),
잘 굴러다닌다 하여 붙여진 별명 다마고(달걀)인 부산의 김씨,
박운종(朴云宗), 외 생각나지 않지만 많은 선수가 있었다.
요즘 축구 전법은 보통 4·3·3 전법이니 3·5·2 전법이니 하지만
당시 우리 팀의 진영은 속백 2명, 겉백 2명, 하프센타 1명,
공격수는 전방센타 1명을 중심으로 좌·우 2명씩 모두 5명이 횡으로 포진하고 있는 전법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약 보름동안 합숙훈련을 하는데
이때는 3가지 엄중한 규칙인 금주, 금녀, 금욕(禁浴)을 꼭 지켜야 했다.
그 동안 단련된 근육이 욕탕에서 풀려버린다는 이유로 금욕을 하는 것인데
냉수로 몸을 훔치는 방법이 고작이어서 모두가 허벅다리는 항상 곱지를 못한 편이었다.
* 죠센진이 무슨 야구를
열세 살 무렵 한두 살 차이가 난 또래 소년이 많았는데
우리는 친형제 이상으로 사이좋게 지냈다.
바다에 가면 바다아이가 되고 들에 가면 흙아이가 되어 어울려 놀면서
성장기에 혈기가 넘쳐서 그런지 뜀박질 등
육체적으로 힘쓰고 싶은 데다 공만 보면 선배들을 따라 축구가 하고 싶었다.
이종사촌 최임철(崔任哲), 제주도 출신 김인철(金仁鐵),
어머니 꿈에 범(虎)을 보고 태어났다는 나보다 한 살 위인 이몽호(李夢虎),
동장의 아들 사덕선(史德先), 두 살 위인 목수의 아들 이문규(李文奎) 등
또래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 「소년보건단」이라는 모임을 결성하고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유지(有志) 변동구(卞東久) 아저씨를 찾아갔다.
변동구씨는 5촌뻘 되는 아저씨인데
나에게 “바다를 건너가는 처용무(處容舞) ”를 가르쳐 주신 변동조(卞東祚) 아저씨의 형이다.
아저씨는 우리들의 취지를 경청하신 뒤에
“보건”이란 낱말은 의학적으로 건강에 대한 것이지
운동 단체 이름으로는 적합지 않다고 하시면서
「방어진소년축구단」이란 명칭을 즉석에서 만들어 주셨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풋볼 공이 네 종류( 3,4,5,6호, 요즘은 국제적으로 지정된
축구공이 4호인 줄로 알고 있는데, 당시에는 아주 큼직한 6호도 있었다.)가 있었다.
그 중에서 일금 2원을 지불하고 산 3호 공과 소년단 기를 기증하여 주시면서
우리나라 소년들의 사기를 위하여 격려의 말씀도 빠뜨리지 않으시고 자상히 말씀 해주셨다.
우리는 너무 고마워서 기뻐하였고
아저씨의 격려 말씀에 더욱 감격하여 서로 손을 맞잡고 울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소년단 기(旗)아래서 시작한 축구가 계기가 되어
훗날 백넘버 2번을 달고 경상남도 대표 선수가 되어 맹활약하게 되었다.
일인들은 우리들의 축구에 못지않게 야구를 즐겨하고 있었다.
소년축구단원은 축구로 만족하지 않고,
야구장비 마련에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일인들의 야구에 도전하기위하여 돗베 천으로 글러브를 만들어서
한길가에서 공을 던지고 받고 하면서, 보고 듣고 한 것을 기본으로 하여
규칙과 용어를 익히면서 기초를 다져 나갔다.
마침 일본인 여인을 부인으로 둔 간장공장 장(張) 사장이
우리들의 사정을 전해 듣고 글러브 일체를 기증해 주는 바람에
이에 힘을 받은 우리는 방망이를 손수 만들어서 열심히 연습한 끝에
일인 소년야구단에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일인들은 비웃기나 하듯이
“ 뭐!? 조센진이 야구를 해?!”하는 것이다.
결국 합의가 되어 심상고등소학교(尋常高等小學校) 운동장에서 시합하게 되었는데
, 당일에 그들은 유니폼, 모자, 스파이크 등으로 빈틈없이 무장한데 비하여
우리는 평상복 차림에 아무런 모자를 쓴 사람, 안 쓴 사람, 신발은 모두가 축구 스파이크를 신고 시합에 임했다.
투수는 내가하고 포수는 이상삼(李相三)이 맡았다.
우리는 대목(大木)아들 이문규(李文奎)가 만든 사제 방망이로
공을 치고 달려가서 슬라이딩할 때마다 축구화에 겁먹은 그들은
공을 자주 놓치는 등 수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첫 시합은 우리가 보기 좋게 승리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 팀을 야만적 팀이라고 하면서 게임에서 진 분노를 삭였다.
이렇게 야구를 출발하여 훗날 백용득(白龍得), 김백학(金白鶴), 이상삼(李相三) 같은 대 선수들이 탄생된 것이다.
* 소화제(消化劑)
일제 시(日帝 時) 경남고등학교 재학생 중에는 방어진 출신이 많은 편이었는데
그 중에 백○○, 장○○. 김○○는 야구 선수로 활약하였다.
하계방학을 맞이하여 귀향한 경남고등학교 야구선수 세 사람을
방어진 야구단에서는 정규선수로 영입하고
그 해 대회에 대비하여 합숙 훈련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합숙훈련에는 조기훈련(朝起訓練)이라 해서
아침 해 뜨기 전에 기상하여 해가 뜰 때까지
달리기와 체조, 세면하기, 아침식사, 자유시간으로 해산한다.
오후 2시에 다시 집합하여 해질 무렵까지 연습을 하고
숙소에 돌아와서 땀을 씻고 저녁밥을 먹은 후
반성회를 끝내고 11시에 취침, 대략 이러한 과정으로
대회 날까지 괴로우나 즐거우나 훈련을 하면서
음주와 목욕은 절대 금기(禁忌) 사항으로 되어있었다.
며칠이 지나 저녁 식사 도중에 장○○ 학생이
한 말씀드릴 것이 있다 면서 말을 건넸다.
“ 소화제는 없습니까? ” 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왜 배탈이라도 났느냐? 하면서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더니
“아니요, 식사 뒤에는 건강을 위해서 소화제 한 잔씩 있어야 할 게 아입니까?! ”
“소화제 한 잔이 뭐꼬? ” 선배들의 반문에
세 학생은 서로들 얼굴을 마주보며 “ 이것 말입니다”하고는 빙그레 웃어가면서
손으로 술잔 비우는 시늉을 하였다.
“술 말이냐? ”
“ 예!? 술 아닌 소화젭니다.”
뜻밖의 요청에 기성 선수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 우리 학교 감독님과 코치 선생님은 식후에
꼭꼭 소화제 한 잔씩을 빠짐없이 마시도록 하고 있습니다.”
한 번 더 어리둥절하였다.
(제비로 불리던 시절 김주호와 각종 경기에서 딴 우승기)
* 별명은 “제비”
소년시절 나이가 한 살, 두 살 먹어가니 정상적으로 몸도 커져가면서 뛰고 달리고 싶어 했다.
전속경기장까지 설비되어 있는 자전거 경기대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 경기장을 빙빙 돌아 일등만 하면 우승기 하나씩 땄다.
전국에서 모여든 선수들은 알록달록 경기 복에
주먹만 한 방울이 달린 모자를 쓰고 엉덩이를 치켜세우고는
젖 먹을 때 힘까지 쏟으며 힘껏 페달을 밟아 달리면
방울이 흔들리는 자전거경주는 정말 볼만했다.
내 나이 17세 청년시절로 접어들면서
나는 백 미터달리기 13초 8, 넓이 뛰기 6미터 14,
축구선수 공격수인 나는 등번호 2번, 별명은 제비로 통했다.
심상소학교 운동장의 정구 코트는 시설이 좋은 편이었는데
일본인들이 사용하였고 한국인들은 매축지 코트에서 공을 쳤다.
이 매축지 코트에서 연마한 친구 황병곤(黃秉坤)은
전 일본 연식정구대회에서 우승 까지 한 국가 대표선수였다.
한편 크고 넓은 매축지는 축구장으로 사용했는데
당시는 야구, 배구, 농구 등은 아직 보급되어 있지 않았다.
해마다 학교의 가을철 운동회가 크게 열려 성황을 이루었고,
일본인들이 개최하는 면민운동회 때면
나는 백 미터 달리기, 계주, 넓이 뛰기, 창던지기, 투포환던지기 등에 선발선수로 참여하여 메달을 많이 따냈다.
* “슛!”하려는 순간
축구 경기에서 양 팀 서로 치열한 경쟁으로 공방할 때
손바닥은 손가락 끝에까지 있는 힘을 다 하여 쫙 벌려 펴고,
양팔을 비행기 날개처럼 벌리고 크게 내 저으며
상대를 향해 육박해 달려가는 자세가 한때 유행하였는데
100미터 달리기 에서도 볼 수가 있었다.
선수 중 명 골 게터가 경기 전에 다리에 붕대를 감고,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경기장에 나타났다.
연습 도중에 다쳤다는 것이다.
상대 팀에서는 전략이 갑자기 달라 질 수 밖엔 없다.
그러나 경기가 막상 시작되면 다쳤다던 골 게터는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몸도 가볍게 선수 대열에 나타나서는
상대 팀을 당혹스럽게 하여 사기를 저하시키는 등의 심리 전략도 가끔 있었다.
속공 패스가 잘 이루어져서 상대 팀 문전까지 공을 몰고 온 선수는
몸을 비스듬히 눕혀가면서 슈팅을 하고는
그 자리에 넘어진 채로 얼굴을 땅에 파묻고는 관중들의 반응(反應)을 염탐한다.
환호하는 소리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 노골”로 감지하고
일어나서 다음 행동에 곧바로 들어가지만
환호하는 소리가 만장에 요란하면 “골인 ”인줄 알아차린다.
요즘 같으면 특이한 동작으로 자랑과 기쁨을 과시하지만
당시 우리 선수들은 땅바닥에 넘어져 누운 채로 있다.
‘나는 사력을 다 하여 이렇게 공을 세웠노라!팬들이여! 나를 열광하라!’
영웅심? 대중심리? 어떻든 자랑스럽고 자부심도 생긴다.
결국 동료들이 칭찬 겸 위로 차 다가와서 일으켜 세워준다.
전국대회가 부산 구덕운동장에서 개최되었을 때
우리 팀이 마침 부산 팀과 대전하게 되었는데
내가 공을 몰고 상대 문전까지 육박하여 슈팅 하려는 순간
“ 이놈 재동아!!” 고함 소리와 동시에 찬 공이 맥없이 굴러갔는데
그 공을 가슴에 안고 나를 보며 빙그레 웃고 있는 상대편의 골키퍼는
다름 아닌 나의 고종 사촌 김영길(金英吉) 형이었다.
* 어머니의 목소리
서진(西津) 매축지 축구장에는
평소에 콜타르를 먹인 그물이 널려져 있기 때문에
축구장 바닥 군데군데가 콜타르로 굳어있다.
이 땅이 누구의 소유인지도 모르며,
이곳에서 공을 차고 놀아도 간섭하는 이 물론 없다.
축구장과 바다 사이에 동쪽으로 폭 9미터의 해변 도로가 쭉 나있어
시내와 조선철공소를 지나 방파제로 연결되어 있다.
공이 종종 바다에 떨어지기 때문에
긴장대로 만든 그물 뜰채가 항상 준비되어 있는가 하면
멀리 날아간 공을 건져오기 위해 전마선(輾馬船)도 대기 시켜놓고 있다.
때문에 공은 항상 물에 젖어있기 마련인데
물먹은 공은 몇 곱이나 무거워서 공을 차는 요령도 다를뿐더러,
우리 팀은 정상적인 공과 물먹은 공의 차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다루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외부 축구인 들은 방어진 축구단을 “물공 선수들”이라 했다.
바다 쪽의 반대편에는 일본인들의 신사(神社)가 있고,
신사 입구 계단 밑에는 오백년 노송이 하늘을 덮고 있어
우리 선수들의 소지품을 놓아두기도 하고,
옷을 갈아입는 장소로도 이용하는데 매우 유용하였다.
그 옆에 목조 2층 일인 가옥 두 채가 있었는데,
종종 공이 날아가서 유리창을 깼지만 별 탈이 없는 것이 이상하였다.
큰 축구 대회가 있으면 운동장 주변 공간마다 음식 가게들이 들어서서
성시를 이루는 것은 오늘 날과 다를 바가 없다.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깃털 같이 가벼운 축구화가 요즘에는 시중에 나오지만
그때는 축구화를 구하려면 양화점에서 일금 2원을 주고 맞추어 신었다.
소가죽 갑피(甲皮)는 흰색, 검은색, 갈색이 있었는데 우리 팀은 흰색으로 통일 하였다.
구두창은 홍피(紅皮)를 대었고,
밑창 돌기 부분(스파이크)은 홍피를 직경 2센티 크기로 둥글게 오려낸 것을
서 너 개 겹쳐서 머리가 단단한 못으로 구두 창 앞쪽에 일곱 개,
뒤쪽에 세 개씩 박아 고정시킨다.
경기 중에 스파이크가 떨어져나가는 일이 잦았고
못이 솟아올라 발바닥이 상하기도 하였다.
어느 대회에서 열전 중에 상대편 선수의 축구화에
내 왼쪽 가슴이 심하게 차여서 나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지만 아주 멀리서 모기 소리만큼의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연이어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차츰차츰 가까이 조금씩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눈앞에 안개 같은 것으로 흐려지더니
얼굴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가운데 어머니께서 나를 안고
내 귀에 입을 대고 이름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것이 보였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동료 선수들의 모습들이 점점 뚜렷해지면서,
비로소 이곳이 축구장임을 느꼈을 때 내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 언양(彦陽) 미나리
선친 대까지 우리 가문이 3대 독자로 내려온 데다
친인척도 본래 많지 않은 관계로 우리 집안 어른들의 후손을 많이 보려는 열망은 컸다.
그래서 덕망이 높은 여인을 양모(養母)로 삼으면
아들이 장수(長壽), 복덕(福德) 한다 하여 나에게는 양모가 몇 분 계셨다.
황현필(黃玄弼)의 모친께서는 평범한 가정주부이었는데
아들만 셋을 보고 네 번째 딸을 원했지만 또 아들이었다.
우리 할머니께서는 쌀 한 가마와 미역 다섯 단을 생남 축하 선물로 보내는 등
평소에 현필 어머니의 인간 됨됨이를 잘 보아 와서 아는지라
자손에 복 있으라고 우리 형제의 양모로 정해주신 것이다.
내가 동경에서 그림공부하고 있을 당시에 양모께서는
일본 하관에 거주하셨는데 형님께서 사업관계로
시모노세끼(下關)에 드나들 때면 꼭 양모 댁에 들려서 문안드리고 또한
동경에 있는 나에게 고향에 다녀가라는 등 여러 차례 전보를 치기도 하였다.
이웃에 형(兄)뻘 되는 이석수(李石守)씨는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연날리기에 명수로
설날에는 나에게 연날리기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그의 형인 이(李○○)씨는 일본 말로 “ 오끼아이(沖合)”라는 직책을 소유한 선원인데
이는 건착선(巾着船 고등어 잡이 發動船)의 망대에서
어군(魚群)을 발견하는 중임을 맡은 자로
선장보다 지위가 높으며 30여명의 선원을 거느린 권한이 큰 전문가이다.
이 오끼아이의 부인이며 이석수의 형수 되시는 여인이
나의 또 다른 양모이시다.
안면(顔面)에 마마 자국이 알금알금 있고
본래 진주 기생출신이어서 그런지 용모가 빼어나고
예의범절을 갖춘 여인이어서 집안 어른들께서 맺어주신 것이었다.
당시에 내가 축구선수로 활약하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울산 언양축구단에서 사월 초팔일을 맞이하여
「부처님오신날」 축제 행사의 일환으로
동래 범어사가 주최하는 축구대회에
방어진의 선수 천재동을 초빙하기로 결정되었으니
사양하지 말고 참가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간곡한 초청장이 날라 왔다.
혼자 가기가 허전하여 친구 박운종(朴云宗)을 대동하고
자전거를 이용하여 출발하였는데
당시 잘게 조각내어 깔아 놓은 돌길 차도 양 옆으로 난
폭 30센티 가량의 황토 길을 헤치고 나아가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자전거여정이었다.
돌멩이들로 뒤섞여 초원을 이룬 어느 사립 중학교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게 되어있었는데
경기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인하여 경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부득이 날씨가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양모께서 경영하는 언양여관에 신세지기로 하고 찾아 들어갔다.
옛날부터 집안 어른들과의 사이가 돈독한데다
나와는 오래간 만의 상봉이라 양모와 나는 반가워서 서로 손을 붙잡고 울었다.
여관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큰 개천이 있었는데
나무를 심고 흙으로 덮어 쌓아다진 둑 다리가 빗물에 쓸려 떠내려가
교통이 단절되는 등 비 피해가 컸었다.
양모께서는 날씨가 개면 방어진 생선으로 회(膾)도
국도 끓여서 대접하겠다고 하였으나
기후관계로 여건이 여의치 않아 뜻을 펼치지 못하시고 못내 안타까워하셨다.
1주일간 여관에 머무는 동안에
그 맛으로 소문난 언양미나리로 만든 여러 가지 음식을 실컷 맛있게 먹었지만
양모님의 마음만 괴롭혔다는 생각에 죄송함과 아쉬움을 내 마음 속 깊이 새긴 채 돌아오고 말았다.
1* 일인(日人) 교장의 흉계(凶計)
광복 전이나 광복 후에도 읍민 운동회와 학교 운동회가 성행했는데
무엇보다도 가장 인기 있는 경기 종목은 4인조 이어달리기였다.
광복 전 읍민 각 학교 운동회 때에는 부락별 혹은 단체별로 이어달리기 경기가 있어
우승 팀에는 우승기까지 수여할 만큼 큰 종목으로 우리들은 “릴레이 대회 ”라고 불렀다.
부락마다 이어달리기 팀이 있었지만
일인 측에서는 대일본청년단과 일생(日生 히나세)청년단 2개 단체가 있은 반면
우리는 뚜렷한 단체 이름은 없었지만 또래 4명으로 짜여진 무명의 방어진 팀이 있었다.
경기 때마다 우리 팀은 스타트에 김주호(金周昊), 2주자는 박운종(朴云宗), 3주자는 이영춘(李永春),
그리고 라스트 4주자는 천재동 이었는데 대회 때마다 우승한 것이다.
광복이 되었어도 변함없이 이어져
방어진, 동부, 남목 셋 초등학교에서는 여전히 춘계 소운동회,
추계 대운동회가 거행되었는데 이때면 어김없이
부락별 대항 이어달리기는 화제의 종목으로 인기가 대단히 높았다.
내가 소속된 방어진 팀은 무슨 이유에선지 기억은 없지만
선수 한사람이 교체되면서 스타트에는 역시 김주호(印刷所 經營), 2주자는 박운종(農家),
4주자는 천재동(敎員) 그대로 인데 3주자에는 이영춘 대신에 양원오(梁元吾 敎員)로 바뀌었지만
무적의 팀으로 우승하여 세 벌의 영광스런 우승 깃발은 주로 우리 집에 보관되었다.
그 많았던 시합 중에 일화가 없을 리 없다.
광복 전에 방어진 화진국민학교(花津國民學校) 추계 대운동회 때
약삭빠른 일인들의 흉계에 넘어갈 뻔한 사건이 있었다.
그 내용인 즉 내가 마지막 주자로 운동장 트랙 마지막 코너를 돌아
결승선을 향해 직선 코스를 달리고 있을 때
우리 측 응원자들이 내 옆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큰 소리로 계속 달려가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뒤를 돌아다보는 순간 뒤 따라 오던 일인선수가
트랙 마지막 코너를 돌아 나를 막 앞질러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정확하게 사정은 알 수 없었으나 순간 교만한 일인의 잔꾀가 있음을 직감하고,
격분한 나는 심신을 바로 세우고 사력을 다하여 달리면서,
함성과 박수 소리는 꿈속에서처럼 들릴 듯 들릴 듯……
아찔아찔하게 먼저 테이프를 끊고 골인한 것이다.
사전 예고도 없이 골인 지점을 40미터나 연장시켜 놓은 이유를 곧 알게 되었는데,
그들의 모략 내용인 즉, 라스트 주자 천재동은
뒷심이 부족한 자이기 때문에 결승선을 연장시켜 놓으면
자기들이 능히 우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치밀한 계산 끝에
본래의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행한 어리석음이 잘 나타난 한 예이다.
당시 일인들의 만행과 횡포를 이루 다 말하지 않아도 천하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넓이 뛰기 대회에서 내가 6.42미터의 기록을 세웠는데
스파이크를 착용하였느니 안했느니 등등 규정에도 없는 것들을 들먹이며
구실을 만들어 나를 탈락시키고 자기네 선수를 일등으로 조작하는 짓거리는
주권 잃은 약소민족의 처지에서는 별 도리가 없었다.
이와 같이 비겁한 수법을 쓰는 장본인은 방어진고등심상소학교 훈도였던 세끼 한지로(關半次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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