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둥이가 높아서? ”
1943년 귀국과 동시에 고향 야구단에서 가입하라는 권유가 있어
가입하고 보니 모두가 일인(日人)이었다.
본래 나의 포지션인 1루수를 맡아 매일 오후5시면 연습에 들어갔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감을 느끼면서도 야구는 계속하였다.
감포(甘浦)에서 대회가 있다하여 선편(船便)으로 가기로 계획하고 만반의 준비를 다 하였다.
감포로 항해(航海)하는 중에 인솔자(引率者) 가와구찌(川口)가 나더러
“여보게 천군! 궁둥이가 높아서 밑 것을 잡을 수가 있나? ”한다.
이 말은 일본식 쌍말인데
“천군 자네의 다리가 길어서 굴러오는 공을 잡을 수 없지? ” 란 뜻이다.
얼마 가지 않아 코치인 노부하라(信原)가 불러놓고
하는 말인 즉 “내일 시합 때에 혹시 포지션이 바뀌더라도 불만은 없겠지? ” 하면서
나의 표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일언반구(一言半句)를 할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경기가 시작되면서 아니나 다를까 코치 노부하라(信原)가
나에게 외야 센터를 맡기고 오까다(岡田)를 1루수로 보내면서 하는 말이
“1루수는 왼손잡이가 봐야 되기 때문에 오까다와 교체한 것이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나 ” 하는 것이다.
오까다의 실력을 나는 잘 알고 있는 터라 대꾸도 하지 않았다.
코치의 의사가 아니고 인솔자 가와구찌의 민족 차별적인 심사(心思)임이 뻔하였다.
시합이 6회까지 왔는데도 내야수들이 서로 호흡이 맞지 않아
실수를 거듭하자 3루수 오까모도(岡本)와 유격수 모리(森)가
불만을 코치에게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천군이 1루수를 지켜줘야 우리들은 잡은 공을 마음 놓고 던질 수가 있는데,
오까다가 잡을 공도 놓치기가 일수고,
내가 잡은 공을 던져 주려 하여도 불안해서 제대로 던질 수가 없으니
본래 포지션으로 되돌려 달라 ” 고 항변(抗辯)하였다.
코치가 인솔자 가와구찌와 상의도 않고 원 위치로 되돌렸으나
점수 차이를 너무나 크게 벌려놓은 관계로 역전하지 못하고 패전하고 말았다.
그 후로 코치 노부하라는 오래 두고두고 그날을 잊지 않고
나에게 미안한 마음 떨치지를 못한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 광복과 함께 쇠퇴하는 야구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방어진 야구는 순 조선인으로 정비 되었다.
투수에 백용득(白龍得) 보조에 천재동,
포수에 이상삼(李相三) 보조에 김진수,
1루수 천재동 보조에 김주호, 2루수 김암(金岩) 보조에 ○○○,
3루수 이상호(李相高), 유격수 김진수(金振守),
외야수에 이상발(李相發), 정동원(鄭東源), 김주호(金周昊) 이었는데
포지션을 서로 교대해 가면서 연습을 거듭하였다.
1946년 광복 후 처음 열리는 대회에
울산, 경주, 장생포, 감포, 방어진 모두 다섯 팀이 참가하였는데
시합결과 방어진 팀이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광복의 기쁨과 더불어 우승의 영광을 안은 방어진 팀으로서는
매우 뜻 깊은 승리라 아니할 수 없었다.
선수 중에는 울산 포수 손사찬(孫四粲)과 감포 투수 양주호(梁柱鎬),
경주 유격수○○○는 시합 중에 박수갈채를 많이 받았다.
다시 시국은 좌․우익으로 나누어지면서
혼란해지자 좌익 진영에서 중심이 되어 축구가 성해지자
그 여파로 야구는 점차로 쇠퇴해져 갔다.
울산과 방어진에서 야구에 뜻이 있는 동호인들이
단일팀을 만들었는데 포지션은 투수 오흥조(吳興祚) 백용득(白龍得),
포수 손사찬(孫四粲)¸ 이상삼(李相三), 내야수 천재동, 김암
(金岩), 김태근(金兌根), 이상고(李相高), 김진수(金振守),
김주호(金周昊), 외야수 정동원(鄭東源), 이상발(李相發),
이 외의 사람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두 팀으로 나누어 연습경기 등으로 조직력과 경기력을 다지면서
경주 야구단과 자주 친선경기를 가지면서 스포츠 분야에 있어서
우익 진영의 건재(健在)함을 보여주었다.
방어진팀 마지막 야구선수의 직업을 보면
白龍得(無職), 孫四粲(개인 트럭 運轉士), 金周昊(印刷所 社長), 金振守(民族靑年團),
李相三(鐵工), 李相高(民族靑年團), 李相發(商業), 鄭東源(社員), 千在東(敎師) 였다.
1946년 9월 29일, 방어진읍 체육회 주최 남조선 제2회 야구대회에서 우승 기념사진
(뒷줄 가장 왼쪽이 형님 천일동千一東, 뒷줄 네 선수 중 가장 오른쪽이 필자 천재동)
* 장모와 아내가 만든 야구복
1946년 9월 29일 방어진체육회 주최로 남선야구대회(南鮮野球大會)가
당시 방어진심상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울산(蔚山), 경주(慶州), 감포(甘浦) 그리고 주최 측인 방어진 팀, 모두 네 팀이 참가하였다.
해방 직후이었던 관계로 좌 ․ 우 사상 대립으로 인하여
치안이 말 할 수 없이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좌익의 죽창(竹槍) 시위는 그 세력이 살벌하면서
대중 운동인 축구 경기마저 독차지하게 되었을 때
우익 측에서는 야구 경기만이라도 주도하게 되어 매우 다행이었다.
경기를 앞두고 우선적으로 걱정꺼리는
새로운 유니폼(野球服)을 어떻게 준비하느냐 인 것이다.
아내의 당시 기억을 되살려 회고 해보면
“야구복을 새로 만들어야 된다면서 광목도 아니고 골배도 아닌,
처음 대하는 천을 한아름 가지고 와서
유니폼 아홉 벌을 무조건 만들어 라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은 하는 수 없이 해방되기 전에 입었던
야구복을 꺼내어 옷의 구조를 파악하고 재단 법은 익혔는데
선수 개개인의 치수가 문제였다.
당신과 백용득 그리고 이상발 셋은 신장과 체구가 비슷하니
당신의 기존 야구복과 같은 크기로 만들었고,
나머지 여섯 벌은 조금 작게 만들면 될 것 같아서,
만든 결과 귀가 막힐 정도로 맞아 떨어졌다.” 하는 것이다.
우리 선수들은 매일 보는 형제와 같은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바느질의 달인(?)이신 장모님의 어림 치수에다
일본에서 재봉․수예를 전공한 아내의 솜씨가 합하여
재단하는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어낸 야구복이
훌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자, 스파이크, 스타킹 등은 평소 각자가 소유하고 있던 것인데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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