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람이 될 것만 같아
1942년 강세를 부리던 일제(日帝)는 전세가 기울어져 가는 판이어서
모든 필수품은 배급제로 통제 되면서 일본 전역이 암거래 세상이 되었다.
나는 판교구(板橋區) 임정(林町) 전셋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옮겨간 아담한 기와모옥(母屋)에 서남 방향으로 이어 지은 자옥(子屋)이 있었다.
자옥은 일용품 가게로 모녀(母女)가 경영하고 있었다,
남편 되는 주인은 어느 회사 수위로 상주(常住) 근무하고 있는 관계로
본채인 모옥은 텅텅 비워져 있는 상태여서 내가 전세 20원을 내고 독채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식량 배급은 어김없이 꼭꼭 정해진 날이면 배달되어 왔기 때문에
자취 생활에 아무 불편 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큰 사건(?)이 발생하였다.
아침밥을 가스 불에 안쳐 놓고 그만 잠이 들고 만 것인데,
잠결에 들리는 고함소리와 대청마루를 뛰어오는 소리에 잠을 깨어 정신 차려 보니,
모녀가 먼저 가스 불을 끄고, 코를 찌푸리며, 아이고 밥 타는 냄새야 한다.
사실은 냄새보다도 화재로 번지지 않은 것이 다행스런 일이었다.
손수 밥 지어 먹고 생활할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자취 생활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이 밥 짓고, 상 차리는 일은 우리가 같이 해 줄 테니 배급품은 우리에게 마껴라 해서,
그날부터 나는 편안한 식객(食客)이 되고 말았다.
귀가 해 보면 방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고,
간혹 가다가 사과 한 개가 책상 위에 놓여 있지를 않은가,
한 개의 사과지만 그때는 매우 귀한 과일이었다.
부부 내외와 무남독녀인 딸 그리고 나 모두 네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한 상에 밥을 같이 먹고 하다 보니 날이 갈수록 정이 들었는지
그들이 나에게 대하는 인간애의 도가 점차로 높아져 가기만 했다.
이러다간 나는 장차 일인(日人)이 되고 말 것이 아니냐고 생각이 들어서
이 집에도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집에서 멀지 않는 곳에 파출소가 있었는데
나이가 지긋한 한 경관은 평소 내가 등·하교 시에 자연스럽게 자주 얼굴을 마주치곤 하였는데 어느 날 그 경관은 나에게 하는 말씀이
“네 내 말을 귀담아 들어! 이 전쟁은 아국(我國)이 패한다.
요즘 동경에서는 10만 명의 징용자를 징발 중에 있어!
자네같이 화구 박스를 어깨에 메고 다니면 위험하니까
조심하고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거다”라고
친절하게 일러 주었을 때 비로소 나는 이사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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