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98. 귀국

무극인 2009. 11. 5. 09:56

·8년 동경생활을 접고

1943년 11월이 되자 나는 귀국 할 준비하느라 서둘렀다.

출발 앞날 고교(高橋)부인께 그 동안의 고마움에 감사드리고

작별의 인사를 했더니, 부인은 내 손을 꼭 잡고 눈물 지우며 세 가지 소원을 받아 달라는 것이다.

첫째는 차(車)속에서 먹을 주먹밥이고,

둘째는 우리의 정성이 담긴 손수건,

셋째는 국대(菊代)양이 동경(東京)역까지 환송할것,

이상 세 가지 마음의 선물을 받아 달라는 것이었다.

감사히 받겠다고 했다.

그날 밤 부인과 국대는 보자기만큼 큰 회색 실크천의

가장자리 안쪽 실오라기를 정성을 다하여 빼고 또 뺀 그 실오라기로 다시

가장자리 틈새를 꿰매어 장식을 한 손수건을 만들었고

심부름하는 소녀가 한 되 병에 현미(玄米)를 넣어 손수 막대기로 찧은 백미(白米)로

가족들은 주먹밥을 만들면서 헤어짐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이튿날 아침 동경 역에서 국대(菊代)의 환송을 받으며,

8년간 생활 해온 동경(東京)을 떠나 고국에 가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실고 하관(下關)을 향해 달린 것이다.

하관 연락선 부두에는 승선하기 위해 자리를 깔고 몇 날 며칠을 기다리는

비참한 군상(群像)을 보았는데,

이 군상은 한(韓). 일(日) 양(兩) 국민(國民) 차별이 없었다.

패전을 눈앞에 둔 참상의 한 광경이었다.

나는 운 좋게 1주일 만에 경복호(慶福號)를 탈 수 있었다.

항해 중 방송을 통해, 본 선(船)의 입항지가 부산, 진해, 마산, 여수 중에

어느 항구에 입항할지 모르니 그리 알고 이해를 바란다고 하였다.

선실 바깥에는 일체 출입을 금했다.

나는 틈을 타서 나가 봤더니 연락선 전후에 순양함(巡洋艦)이 호위하고,

구축함(驅逐艦)이 당마(唐馬)처럼 돌아다녔으며

또한 공중에는 비행기가 선회하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구명옷을 착복한 나는 무시무시한 전쟁을 귀국하는 연락선 선상에서 실감하였다.

다행히 연락선은 부산항에 입항했다.

줄곧 승합자동차로 꿈에도 그리던 고향 방어진을 향했다.

경찰 주재소에 귀국 신고해야 한다기에 갔더니

종정(宗定, 무네사다)이란 경찰 부소장이 뜻밖에 환영하면서

중머리로 삭발 하라는 것이다.

“일본에선 경관도 하이칼라 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했더니

“강요하지는 않겠다. 대신, 쌀 배급은 없다!” 해서

쌀 배급 타기 위해 부득이 삭발한 것이다.

홍고구 긴수깨�(本鄕區金助町)를 하직하고 귀국하여 얼마가지 않아

편지가 왔는데 홍고구 일대는 미기(美機) 공습으로 잿더미가 되어버렸고

하숙집도 물론 불타 버리고 주인은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가족이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며,

기꾸요(菊代) 조카 년은 백의(白衣)의 천사로 지원해서 머지않아

만주로 파견되어 갈 것이란 내용이었다.

알맞게 귀국했다고 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