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100. 독립투사 아버지‘서진문’을 회고(回顧)합니다

무극인 2010. 3. 7. 09:54

‘’ 

《아내 서정자의 처녀시절》

 

◎ 아내의 회고(回顧)

우리 민족의 암울했던 時代에 살다간

 아내의 부친 인간 서진문(徐鎭文)의 일면을 회고하도록 지면을 할애(割愛)함은

아내 서정자(徐湞子)가 그의 과거사를 더 잊어버리기 전에

 어려서부터 직접 겪었던 일과

장모와 장인 그리고 주변 어르신들로부터 들은 것들 중에

 기억하고 있는 것에 준거하여 기록으로 남겨

후손의 삶에 작은 지침(指針)이라도 되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서진문(徐鎭文)을 회고(回顧)하며』

아버지 徐 鎭자(字) 文자(字)께서는

 1901年 8月 28日 蔚山郡 東面 日山里 209番地에서

達城 徐氏 집안 父 徐 章자(字) 寔자(字)와

母 柳 南자(字) 蓮자(字) 사이에

五男 一女 중 長男으로 태어났으며,

當 六歲가 되었을 때 伯父 元자(字) 埈자(字),

백모(伯母) 成 甘자(字) 同자(字)댁(宅)에 養子로 入籍하였다.

아버지께서는 蔚山郡 兵營公立普通學校에 입학하였다가

 東面公立普通學校로 전입하여 졸업하신 후에

外 四寸인 成世斌이 설립한 日山私立普成學校에서 敎鞭을 잡으셨다.

1928년 11月 17日 18時 노을 녘에

 28歲의 꽃다운 나이에 조국의 光復을 염원하다

 恨많은 世上을 마감하셨다.

 

어머니 尹 相자(字) 必자(字)께서는 1901년 8月 12日

 蔚山郡 大峴面 上開里 227番地에서

坡平 尹氏 집안 父 尹 炳자(字) 轘자(字) 와 母 崔 順자(字) 伊자(字) 사이에

 二男 三女 중 長女로 태어났으며 1992年 陰曆 4月 4日 92歲로 恨많은 世上을 마감 하셨다.

부모님께서는 1920년에 兩人이 꼭 같은 19세 나이로 결혼하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언제 日本에 처음 건너가셨는지는 모른다.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에 의하면

“명치대학교에 공부하러 간다” 하셨고

“자전거를 타고 호외를 뿌리고 다녀서,

바지의 엉덩이와 바지가랭이 부분이  항상 닳아해져있었다”고 하셨다.

추측건데 아버지께서 뿌린 호외(號外)는 재일조선노동자들의 삶 즉 해방의 염원, 근로여건의 부당성과 요구 사항, 등등을 담은 찌라시 규모였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1923년(大正12년) 9月 1日

 關東大地震이 일어났을 당시에

日人들은 朝鮮人들이 放火했다는 등의 거짓 소문을 流布하여

 朝鮮人들을 곡괭이․ 防火용 기구 등으로 무차별 虐殺할 때

아버지께서도 무사할 수가 없었다.

 머리 뒤쪽 목덜미 部位를 곡괭이로 심하게 찍혔지만

 死力을 다 하여 死體밑으로 숨어 들어가 깔려있으면서 정신을 잃었는

 얼마 후 정신이 돌아와서 주변을 살펴보니 어느 병원이었다고 한다.

九死一生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께서는 상처도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귀국하였는데,

 나는 그 이듬해인 1924년 음력 3月 12日 고향 日山里 206번지에서 無男獨女로 태어났다.

 

나의 이름  “ 湞子”  두 자는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最高의 선물이다.

1928년 6月 내 나이 다섯 살 때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를 만나러 일본에 건너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어머니 손에 이끌려 日本 神奈川橫濱市 혼모구로 갔다.

아버지께서는 時期的으로 잘 왔다고 하시면서

 두 母女를 매우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 조금 있다가 내 뼈를 고향에 가지고 가라.”고 하셨을 때

우리 母女는 울고 말았다.

 

아버지께서는 피신 차 귀향할 때나 도일하실 때는

밀항선을 이용하셨는데 내가 태어난 그해 잠시

고향에 定着하여 普成學校에 復職되어 근무 중에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授業 중에

日本 本土警察이 渡來하여 無斷으로 교실에 들어와서

어린 弟子들이 보는 앞에서 체포되어 간 일이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평소 일산진 우리 마을 동편

해돋이 동대산(東臺山) 등선 소나무 숲을 바라보시면서

 “ 바람이 쉬지 않고 항상 불고 있을 때까지는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줄 알고,

바람이 자면 내가 죽은 줄 아시요.” 하시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어느 해인가 무슨 일로 잠시 귀국하였다가

마지막인 여섯 번째 도일하기 직전에

뒷마당 채소밭 흙 담 밑에 핀 개나리 꽃나무를 뽑아다

 어머니께서 부엌일 하실 때 뒷문을 통하여

 쉽게 볼 수 있는 곳에다 옮겨 심으시면서

 “이 꽃이 생생하게 살아있으면 내가 살아있는 것으로 알고,

이 꽃이 시들어지면 내가 죽은 줄로 아시요. ”하셨다.

 

귀국하시면 항상 빠뜨리지 않으시고

 갑 성냥을 장롱 서랍에 가득 사 넣으신 것은

 맏며느리인 어머니께서

 아궁이에 불 지피는 고충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자

하는 것인 즉 이토록 아내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으셨다.

 

日本 우리 세 가족이 살고 있는 집 대문 앞에는

日警들이 우리 가족의 一擧手一投足을 살피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監視所를 설치해 놓고

집 안을 샅샅이 감시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때로는 “壽 本署 ”에 불려가서

 어머니도 나도 그들의 취조에 시달려야 했다.

 어떤 사람이 다녀갔는지? 취조에 협조 잘하지 않는다는 등

바른 말 하지 않는다고 어머니와 나는

 뺨을 몇 차례씩이나 얻어맞은 일 등 지금도 끔찍했던

그때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느 날 고등계형사들이 예고없이 급습하여

집 안을 구석구석 수색하던 중에

어머니 생활용품이 든 고리괘짝을 발견하고

 그 속에 든 우리나라 다듬이 방망이가

진귀하면서도 흉기로 생각하였던지

 어머니께 꼬치꼬치 캐묻는 통에 화가치민 어머니께서는

그들로부터 방망이를 빼앗아 들고는  

“그래 이놈아 이런 것이다!!”하면서

 형사의 가슴팍을 향해 휘둘렀는데

 한차례 맞은 형사는 아픈 가슴을 감싸고 저만치 도망을 치기도 하였다.

 

가끔 조선에서 혹은 일본 땅 멀리서

 아버지를 찾아오신 손님들이 계셨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아버지께서 계신 사무실로 안내해 드렸다.

다섯 살 어린 딸아이가 세 번씩이나 전차를 갈아탈 정도로

 멀기도 하고 이국땅의 도로 사정 등 모두가 낯설어

 어려울 텐데도 서슴없이 아버지께 안내해 드렸을 때

손님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고

 또한 주위 사람들 간에 큰 화제가 되었던 일은

두고두고 나는 자랑하고 싶다.

 어떤 때는 우리 집에 심부름 하는 조선 사람이 몰래 다녀가기도 하였고,

어머니께서 차려준 밥을 맛있게 얼른 먹고 가기도 하였는데

그런 사람 중에는 자기가 다녀간 것을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말라면서 신신 당부하는 이도 있었다.

 궁금하여 어느 날 한 분이 다녀가신 뒤에 어머니께 누구냐 고 여쭈었더니

아버지의 고종사촌 김천해 라고 하셨다.

 

 어느 날 우리 집에 심부름 다니는 분이

 徐위원장님 계시는 곳에 같이 가보자고 하여 우리 母女는 따라나섰다.

당도하여 보니 넓은 강당에 群衆이 가득 운집해 있었고

壇上에는 아버지께서 서 계셨다.

아버지께서 家族이 온 것을 아시고

 단상에서 좀 떨어진 곳에 좌석을 마련해 주셨다.

 잠시 후 아버지께서 演說을 하기 시작하셨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목소리는 높아지고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 치는 등

무언가를 강력하게 주장할 때마다 群衆의 환호와 박수로

장내는 용광로처럼 달아올라 그 열띤 분위기에

우리 母女는 어리둥절하였다.

 잠시 후에 警察들이 들이닥치고 集會場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群衆사이로 아버지께서 警察에 둘러싸여 어디론가 가는 것이 보였다.

심부름 아저씨의 말씀이,

 아무런 일 없을 터니까 안심하고 가자면서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밤늦게 歸家하신 아버지께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저녁밥도 드시지 않으시고 잠자리에 드셨다.

 

우리 집과 앞 집 사이에 낮은 나무 울타리가 있었는데

울타리 너머로 日人 남자가 훈도시(日本 팬티) 차림으로

생활하는 것이 자주 보여서 그 모습이 보일 때마다 민망하고 눈에 매우 거슬렸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그 남자를 불러 세워놓고 호통을 친 후에야 그런 차림이 보이지 않았다.

 

1928년 10월25日은 “日本 天皇(昭和) 御大典 ” 날이다.

日皇 이 花電車(꽃으로 치장한 전차)로 요코하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아버지께서는 권총을 품고

 日本 天皇을 암살하기 위하여 꽃전차에 뛰어 올랐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의 僞裝術에 의하여

 꽃전차가 3대나 되어 아버지께서는

 進退兩難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 실패한 아버지께서는

日警에 체포되고 말았다 고 어머니 생전에 누누이 말씀하셨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으면서 성장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를 “ 제2의 윤봉길 의사”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칭송하였다.

 

日本 報導에는 이 어마어마한 “天皇 暗殺 冀圖 사건 ”을 숨기기 위해

 『徐鎭文 豫備檢束』이라고만 報導하였다.

 수사를 맡은 警察署에서는

“背後 인물은 누구냐? ” 

 “ 單獨 犯行은 아닐 것이다.” 등등으로

殺人的 拷問 등 蠻行을 다 저질은 후

 臨終 직전인 11月 16日 대낮에 釋放되어

동지 여러분에 의하여 인력거에 실려 집으로 왔다.

醫師를 불러 보였으나 生存이 불가능하다 하여 돌려보냈다.

만행으로 일그러진 끔찍한 아버지의 모습을

 그 동지들은 우리 모녀에게 보여 줄 리가 없었다.

이튿날인 11月 17日 오후 6時 쯤 노을 녘에

비로소 우리 모녀를 찾는다는 동지들의 말씀을 듣고

안내되어 아버지 가까스로 다가갔을 때

 꺼져가는 한 가닥 가는 목소리로 “湞子야”  “湞子야 ”

내 이름을 세 번 부른 뒤

“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목소리가 들릴 듯 들릴 듯 멀어지면서

28歲의 꽃다운 나이에 조국의 光復을 念願하시며 恨많은 世上을 마감하셨다.

 

11月 21일 日本朝鮮勞動組合葬으로 盛大하게 葬禮가 치러졌는데

수백 명이 훨씬 넘는 弔問客 중에는 日人들도 많이 참가했다고

 어머니께서 수차례 말씀해 주셨다.

葬禮를 치른 며칠 후 通行禁止 시간 중인 밤 1時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누구냐고 물으니 神戶에서 온 東亞日報 記者라고 하였다.

잠시만 들어가도 되겠느냐며, 들어와서는 놀라지 말라고 하면서

아버지에 대하여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通禁 解除가 된 후에 돌아갔다.

후일에 안 사실이지만 國內 新聞에

 아버지에 대하여 記事가 報導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지만

그 내용을 본 바는 없었다.

 

우리 집 앞 감시소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여전히 철수하지 않고 日警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었는데

우리 母女는 울분을 삭이다 못하여 서둘러 歸國을 결심하고

東京에 있는 外家와 京都에 계시는 큰 삼촌과 相議한 결과

아버지 유골을 모시고 큰 삼촌과 함께 東京驛에 도착하여 보니

3대 電車에 가득 타고 傳送 나온 同胞들이 외치는 萬歲 三唱에

우리 母女는 너무나 감격하여 울었고 作別의 아쉬움에 또 울었다.

 

釜山 港에 도착하여 다시 汽船을 갈아타고

方魚津 港에 도착한 것이 새벽 3시었는데

선창가에는 男女老少 수많은 고향 친인척과 주민 여러분들이

 마중 나와서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다.

 

故鄕에서 아름다운 喪輿를 다시 만들고

全 面民葬祭로 葬禮式을 盛大히 치룰 때

 그 행렬이 10里를 더 뻗었고 유골은 月亭寺 옆

고향 마을 日山里가 내려다보이는 양지 바른 곳 당시 우리 山인 先山에 모셨다.

한 아름 크기의 日山 海石 차돌에

 “故 徐鎭文의 墓 西紀 1928년 月 日 同志 一同”이라

 成世斌 先生께서 직접 쓰신 碑石은

日山마을 바닷가에서 墓所까지 고향 분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 안으시고 운반되어온 碑石으로서 더욱 값지다.

 

1928년 11月 21일 아버지의 장례를

全日本朝鮮勞動組合葬으로 성대히 치른 후

 우리 모녀가 비통한 심정으로 있을 즈음 까지

 慶北 浦項 사람이 우리 집에 묵고 있었는데

이름은 權一成, 당시 明治大學校 學生이었고

어린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 해 주었기 때문에 인지

기억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어느 날 일경들이 우리 집에 와서

 권일성 학생을 체포해 가는 것을 본 어머니께서

나를 꼭 부둥켜안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쿵쿵 뛰고 있었다.

 

 며칠 후

 

 

 

아버지의 동지 한 분이 권일성이 보내왔다면서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으니

어머니께서 밥을 지어 손수 넣어달라는 부탁이었다.

어머니께서 밥 심부름하시면서

 반찬 중에 다사마 튀김이 항상 빠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다시마를 싼 종이가 동지들과 내통하는 밀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구타하는 소리와 고함소리, 신음하는 소리 등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서 참혹하게 당하는 모습이

 상상 되어서 유치장에 밥 심부름으로 드나드는 일과는

고통의 나날들 이었다고 훗날 술회하셨다.

 몇 달을 다녔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는 수 없이

밥 심부름을 그만 두고 서둘러 귀국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권일성 학생의 소식은 전혀 없다가,

 

우리 모녀가 귀국하여 아버지 장례를 고향 면민 장으로

 성대하게 끝내고 한참 후에야 그 학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인편으로 전해 듣고 우리 모녀는

권일성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버지를 생각하며

 가슴이 저미어 슬피 울고 말았다.

 

아버님 생전에 어머니께 “사람은 많이 배워야 한다. 정자 공부 많이 시켜라!” 하신 말씀이 있었기에,

내가 열 네 살 되던 1938년에 남목공립보통학교(南牧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그 해에 어머니와 함께 일본 효고껭 가와배군

 가미쭈무라 시모가하라(兵庫縣 川邊郡 神津村 下河原)에 거주하시는

큰삼촌(徐鎭華)댁에 찾아갔다.

며칠 후 졸업장을 들고 찾아간 학교는

오사카(大阪) 센진(宜眞)여자고등학교였는데

 입학시험을 치른 다음 날 삼촌댁에

자전거를 타고오신 어떤 분이 “정자야 시험 잘 쳤나?”하시며

 빙그레 웃으시던 그 분이 9년 전에 뵈었던 아버지의 동지 이성백(李成佰)아저씨였다.

80년대 재일거류민단 고국방문객을 통하여

민단 차원에서 매년 아버지 추모제를 거행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아버지께서는 일산사립보성학교 주 ․ 야학생을 가르쳤다.

 당시에는 부녀자들은 야간부에 많이 다녔는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야간부 아버지 제자는 숙모 언니,

 숙모 송기난, 월봉 끝조, 정갑길씨 부인, 박두복씨 부인,

방어진 한기선, 영달씨 곰보누님, 성세륜씨 부인,

 장두길 모친, 어머니 윤상필, 방어진 장덕순, 등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부터 어머니께서는

속병을 앓기 시작하여 약 3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모진 고생을 하시던 중 1963년 무렵

 깨끗한 옷차림에 나비넥타이, 검정색 의료가방을 드신 아버지께서

 꿈속에 나타나셔서 어머니를 모시고

소나무가 우거진 어느 산속 정자에 올라

 어머니를 눕혀놓으시고 복부에 주사를 한대 놓으시고

 아무 말 없이 사라지신 뒤로는 그 속병이

 온데간데없이 깨끗이 나으셔서 아흔두 살 까지

아픈 곳 없이 사시다가 편안히 이승을 하직하셨다.

 

1992년 친인척들의 애도 속에 어머니 장례를 치른

삼일 후인 삼우 날 밤 꿈속에 자그마한 몸매에,

 갈색양복에 검정색 넥타이를 매신 아버지께서

 홀연히 거실에 나타나셔서 “정자야! 욕봤다.” 한 말씀 하시고 사라지셨다.

외롭게 사셨던 당신의 부인을 평생 동안 모신데 대한

고마움의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머니를 당신이 계신 곳으로 잘 모시고 가셨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면서 안도의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러내렸다.

 

아버지의 유품은 月峯里 접장 장병두(張秉斗)선생에게

사사할 때 친히 쓴 漢詩 칠언절구 몇 수가 있으며,

비망록 같은 공책 한 권이 있었는데

정확하게 그 내용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략적으로

당신의 결심, 노래 가사 등이 쓰인 것으로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소중히 간직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아버지께서는 교편을 잡고계시면서

 나라를 빼앗긴데 대한 한을 당신께서

 직접 작사 작곡하였는지는 분명치 않으

나 노래로 만들어 가르쳐 주야 학생들이 애창하였다 한다.

 노래 제목은 『고향생각』,『적포가』,『집 잃은 새』,

『그리운 엄마』등인데

 그 중 아버지께서 즐겨 부르셨고 나도 알고 있는

 노래『고향생각』의 노랫말과 곡은 다음과 같다.

 

친구 다 가고

밤은 깊어 적막한데

홀로앉은 이내 몸

세상이 모두 잠이들어 고요한데

고향생각 절로나네.

                         (주: 위의 악보는 음악가이신 부산상록수합창단 房富源단장께서

 내가 부르는 노래를 직접 들으시고 5선지에 옮겨 작성하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이 조선땅에 태어나면서부터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결사의 신념을 가지신 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딸은 1928년 10월25日에 있었던 天皇(昭和) 御大典 사건 진실이

전문 지식인들에 의하여 하루바삐 밝혀지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도 가끔 全日本朝鮮勞動組合葬 葬禮式 寫眞을 꺼내 보면서 아버지를 回想한다.

2003年 7月 20日 湞 子 씀

 

 

(재일본조선인노동연맹 주관으로 거행된 아버지 고 서진문 장례식 광경.

어머니 윤상필과 당시 다섯살 된  정자가 상여 앞에 나란히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