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우(土偶)에 눈을 돌리다
어린 날 경주 외가에 들리면 왜색(倭色)에 물든 방어진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을 갖기에 충분하였다. 계림(鷄林), 고분(古墳) 등 유물과 유적은 물론이고 대궐같이 큰 최부자댁의 기와 집, 모든 것들이 고색창연(古色蒼然)하여 신비로웠다. 물은 북으로 흐르고 모래는 남으로 흐른다는 강과 반월성(半月城,), 그곳 교동(校洞) 외가(外家) 일대(一帶)에는 흙으로 빚은 토우(土偶)가 굴러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가 있었다. 외가에도 토우가 있었는데 문화재 차원에서 소중히 간직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 그냥 굴러다니기 때문에 아이들이 가져다 놓아둔 것뿐이다. 어떤 가정에서는 아이가 주워 오면 귀신 시끄럽다 하여 내 버리는 것이 일수였다. 또래의 외가 집 아이들과 지천으로 깔린 황토로 여러 가지 기물을 만들어 소꿉장난 하면서 토우도 만들어 보았는데, 이렇게 만들기에 관심을 갖게 되어 오늘 날 토우를 정식으로 빚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아마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집 서사(書士) 김생원(金生員)을 보좌하던 허도령(許道令)의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이 든다.
크지도 않고 조그마한 『신라토우(新羅土偶)』는 소박하고 투박한 것이, 그 시대의 생활상을 말해 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나는 어린 날을 일제(日帝) 강점기(强占期)에 살면서 보고 겪었던 우리들의 애환(哀歡)을 토우로 만들어 현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내가 아니면 누가 만들랴? 하는 심정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내가 만든 것 중에서 가면이나 그림보다도 토우에 매력을 많이 느끼는 편이다. 그런대 흙을 빚어 완성해 놓고 보면 무엇인가 부족한 데가 없나 하고 걱정이 된다. 그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 나의 시대에 걸맞은 토우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만들 것인가? 평소 나의 토우에 관심을 보이던 박영수(朴英秀) 시장이 어느 날, 일금 10만 원짜리 수표를 내 손에 쥐어 주면서 여행도 하고 연구도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10만원이면 적지 않은 액수다. 참으로 고마웠다.
여행길에 올라 제일 먼저 간곳이 김해(金海) 수로왕릉(首露王陵)이었다. 능 양쪽에는 양(羊) 모양의 석조물과 돌기둥이 꽂혀 있다. 나는 둥근 돌기둥 인줄만 알고 곁에 가 보니 뒷면에서 볼 때는 돌기둥인데 앞에서 보아하니 섬세한 갑옷 차림의 장군 조각상이었다.
경주(慶州)에 들어서면서 먼저 괘릉(掛陵)을 찾아 가니 마침 자전거 여행자 일행이 그리로 간다기에 자전거 뒤를 밟아 괘릉 앞에 들어서니 상당히 큰 돌기둥이 서 있었다. 수로왕릉 돌기둥 조각과 같은 수법의 조각상이 나를 놀라게 하였다.
경주 시내에 들어서서 박물관을 찾아 실내를 일주하고 뒤뜰에 들어가니 수많은 석불들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웬일인지 모두가 두상이 없다. 관원의 말에 따르면 6․25전쟁 중에 인민군이 쳐들어와서, 도끼 등으로 불상을 내리치고 파괴하여 웅덩이 속에 수장시켜 내버린 것을 건저 냈지만 모두 두상이 없었다 한다. 두상이 없어졌다는 말에 나는 흥미를 가졌다. 왜 하필이면 두상이 없어졌을까? 곰곰이 생각 끝에 의문의 실마리를 풀 수 있었다. 말하자면 돌기둥 형식으로 조각하면 불상의 목과 같이 약한 부분이 없기 때문에 외부의 어떠한 물리적 힘에도 잘 파손되지 않을뿐더러 오랜 세월을 지나더라도 최소한의 원형이 보존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장승상이 그렇고 제주도 돌하루방이 그렇다. 토우의 경우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 나의 결론은, 조그마한 흙덩어리로 안면과 사지(四肢), 몸통을 최소한의 형태로 최대한의 의미를 부각 시킬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보존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된다고 다짐하였다.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7. 제2회 천재동 단독 『시민위안민속잔치』 (0) | 2012.11.21 |
---|---|
116. 부산시립민속예술관(釜山市立民俗藝術館) 관장 취임 (0) | 2012.11.21 |
114. 무례한 두 사람 (0) | 2012.11.21 |
113.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천단화학교로 (0) | 2012.11.21 |
112. 일본(日本)인의 국수주의(國粹主義) (0) | 2011.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