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립민속예술관(釜山市立民俗藝術館) 관장(館長) 취임(就任)
1971년 4월 한국에선 최초로 민속예술 전수관 건립의 기공식이 동래구(東萊區) 온천동(溫泉洞) 산 13, 금강공원(金剛公園)에서 거행되었다. 3년만인 1974년 5월에 약 60석 규모의 실내 공연장과 전시장을 갖춘 한옥 2층 건물에 『부산시립민속예술관』이란 이름으로 간판을 붙이고 성대히 개관식을 하면서 초대 관장으로 임명된 천재동이 별정직 을(乙) 2급으로 즉석에서 박영수(朴英秀) 시장으로부터 직접 사령장을 받았다. 한원석, 신우언 양 옹께서는 자기 일같이 기뻐하여 주었지만 인사들 가운데는 동래 출신이 아닌 엉뚱한 사람을 관장으로 임명했다는 점과 「동래민속보존협회」자(字)가 든 간판이 아닌 데에 대해서 비난과 불평을 노골적으로 털어놓는 자들도 많았다. 어떤 이는 나에게 와서 직접 불만과 불신의 눈치를 던지기도 하였고, 40년이 지난 오늘 날까지도 내가 힘겹게 이루어 놓은 업적에 대하여 왜곡(歪曲)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사실은 당시 부산시 입장에서 볼 때 민간단체로서는 경영에 어려움이 있을 테니, 민간단체인『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가 자력으로 운영할 능력이 생길 때까지 먼저 시에서『부산시립민속예술관』이름으로 운영키로 방침을 세운 것이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민속예술에 열정을 가진, 본 협회 임원이요 문화재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곳으로 부임 해온 시청 행정 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리 행정 사무실은 2층으로 옮기고, 본 사무실을 협회 사무실로 사용하도록 배려하였다. 이제부터 나는 시(市)의 녹을 먹은 공무원의 한 사람이 되었고, 교육공무원 때와는 전혀 다르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걸림돌 없이 하게 되어서 마음이 더없이 한층 홀가분하였다. 먼저 전속 무용단, 창극단, 민속놀이, 풍물놀이 등을 창단하여, 당시 부산에 거주하고 있었던 이동안(李東安 제79호 발탈예능보유) 선생을 지도자로 모셔 와서, 단원들을 교육하여 매주 토․일요일마다 공연하였는데, 실비로 관람객을 유치하면서 시민들의 민속예술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전속 출연 단체는 주로 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민속반(啓星女子商業高等學校民俗班) 학생들이고, 창극단은 김동표(金東表 제45호기능보유)일행이었다. 이색적인 공연은 학생들의『오방신장기(五方神將旗) 놀이』, 김동표 일행의『춘향전(春香傳)』, 공연에서 수입된 금액은 꼭꼭 시청에 납부했더니, 시에서는 이런 소액은 관의 경비로 사용하라는 것을 사양하였다. 담당 직원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시민회관 관람료보다 수입이 많다고 하였다. 또한『민속백일장』과『부녀자그네뛰기대회』도 연중행사로 개최하였다. 월급과 작품 판돈으로 제반 경비에 사용하고 한 푼도 부산시의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 이 대외적인 행사를 몇 사람의 직원과 관장의 힘만으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워서 주최는『부산시립민속예술관』이 하고 주관을『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가 맡아서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협회의 협조가 대단히 컸음을 알 수 있다. 1976년 5월 달을 기해 협회 전수관으로 바뀌면서 민속경연대회와 민속백일장 등 모든 연중행사가 협회 행사로 고스란히 인계하였는데 그 중 그네뛰기는 7회에서 중단되었고 민속백일장은 전국대회로까지 발전하여 오늘 날에는 대상(大賞)에 대통령상을 수여하기까지 되었다.
『부산시립민속예술관』이 개관하던 날은 신임 초대 관장 천재동 취임과 함께 예술관 앞 송림(松林) 숲 일대에서 환갑연(還甲宴)도 겸하였는데, 예술계를 비롯하여 많은 하객들로부터 축복과 함께 기념품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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