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출신 천재동 전국대회 참가 위해 5인무로
확대시켜
학수대·학암 등 동래지역 지명과 결부 오방형태로 작성
다수의 연희자 자유롭게 등장·퇴장하는 똬리
대형 창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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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학춤의 군무 모습. |
울산 방어진 출신 천재동(1915~2008년) 선생은 동래학춤의 조사부터 활성화까지 큰 역할을 했음을 이미 밝혔다. 천재동은 다시 김희영의 1인무를 5인무로 확대하는 작업의 중심에 있었다. 그 당시를 천재동의 회고를 통해
소개한다.
“1974년 당시는 곽영욱 이사장, 강호인 총무이사가 직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곽 이사장이 ‘천 관장 학춤은 이만큼
성장했으니 우리 금년에 전국 대회에 참가합시다. 군무로 만들어 보는 것이 어때요?’ 했다. 대찬성을 했더니 만들 사람은 당신 밖에 없으니 만들라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잘나나 못나나 발굴은 S(서국영: 필자가 밝힘)씨이니 S씨의 동의 없이는 아무리 크고 좋은 일이라도 나는 맡을 수가 없다. 발굴자의 권위를 세워야 한다고 하였더니 내가 책임지겠다’ 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네 차례에 걸쳐 인정할 만한 사유를 내게 제시했다. 그래서 마지못해 협회의 일이라 승낙하고 군무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40년전 까지만
해도 부산에서 전차를 타고 동래읍에 들어서면 전차 선로 좌우편 일대가 모두
미나리 밭으로 일색을 이루었다. 그외 곳곳에 소지가 많아 학이 많이 날아들어 서식처로 살고 있었다고 한다. 동래사람들은 팔만 들어도 춤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동래사람이 학춤을 추는지 학이 동래사람 춤을 추는지…. 어떻든 동래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지명이 있다. 학소대, 학수대, 학암, 학난…. 이런 다섯 곳의 지명이다. 이 다섯 지명을 오방설과 결부시켜 오방형태적인 체형으로 군무로 안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돼 5인조 군무로 작성하였다”
이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참가를 위한 곽영욱 이사장의 한 마디에 5인무의 학춤으로 확대 시켰다. 그 결과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천재동은 5인조 군무에서 다시 대형 군무로 확대시킨다. 천재동은 같은 책에서 그 사실을 밝히고 있다.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등무가 첨가된 동래학춤 5인조 군무를 마당무로 안무하여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그 후 그대로 계속되어 오다가 어느 해 김동원씨의 귀향 입회로 나와 둘이서 보완해 온 것이다. 1981년 10월23일 전국
민속놀이 인천대회에도 5인조 학춤이 출전하였는데 당시 심사위원장이던 김천흥(
해금 및 처용무 보유자)씨는 심사평가에서 시종일관 동래학춤을 들어 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끝이 난 뒤에 나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 ‘학춤을 대 군무화로 하시오, 소형은 너무 아깝다. 그리고 악사도 배로 증강하면 좋겠다’고 권유했다. 이 권유에
용기를 얻어 대형화에 힘썼으나 좋은 묘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본 협회에서 발간한〈동래들놀음〉편집위원의 한 사람으로 매일같이 회합하던 때
점심식사를 동래 온천장 모
식당에서 하던 중에 학춤의 대형 군무가 재고되어 천재동, 김온경 두 사람이 연구하기로 결정되었고 그 이튿날 고안한 원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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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야류의 ‘소쿠리춤사위(사진 위)’와 동래학춤의 ‘소쿠리춤사위’. 동래야류의 ‘소쿠리춤사위’와 동래학춤의 ‘소쿠리춤사위’는 명칭과 동작이 유사하다. |
제출하였더니 충분치 못하다는 이유로 보완을 요구하였다. 고심 끝에 이튿날 다시 새 안을 가지고 제시한 내용은 똬리 대형이었는데 다수의 연희자가 무리 없이 등장하여 자유롭게 실연하고 지장 없이 퇴장하는 방법이었는데 결정이 된 것이다. 즉 소라 고동껍질 생김새와 동일하게 빙빙 감겼다가 풀어나가는 것으로 춤의 시작과 끝이 통일감과 변화, 그리고 율동감이 강조되어 한층 인상화시킬 수 있는 좋은 안이라 하여 즉석에서 선정되어 지금까지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구음은 종전 그대로 부르게 되었다” 라고 밝히고 있다.
대형 군무작업에는 천재동과 김동원, 그리고 김천흥과 김온경까지 함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동래학춤은 1인무에서 시작하여 필요에 의해 점차 5인무로, 다시 대형 군무로 확대되었으며, 악사와 구음까지 가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재동의 회고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무형문화재의 운영의 한 면을 볼 수 있다. 동래야류의 군무과장, 문둥이과장, 양반과장, 할미과장 등의 춤사위를 발췌 혼합하여 동래야류 둘째 양반 역할의 김희영을
모델로 일정한 형식을 만들어 동래학춤이라 명칭한 동래학춤의 발굴조사에 중심에 있었던 서국영, 그리고 함께한 천재동, 박진주, 대형 군무를 주문한 김천흥 등 4명은 모두 작고했다. 모두 필자와 만나
대화를 나눈 인연이 있다. 현재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 이사장 김온경도 1978년도 부산 범천동 지하에 있었던 부산국악협회에서 만났다.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송순섭(1936,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명창도 그 당시 국악협회에서 활동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새삼 강조하지만 울산 출신 천재동은 동래 민속예술을 활성화시키는데 대단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동래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많은 어려움도 있었다. 그가 말한 “동래학춤은 서국영과 천재동이 여관방에서 각각 글을 쓰고 무보를 그려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에 등록하였으며 현재의 5인조 군무는 1972년 7월에 천재동이 정립하고 안무를 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과, “김희영이 학춤의 보유자로서 동래학춤에 대한 문화재 지정 보고서가 아니고 동래학춤 발굴보고서이다” “김희영은 동래야류 넷째 양반 역 문화재로 후보 선상에 올랐다가 안타깝게 사망하여 취소되었으며, 동래학춤과 연관시켜 기록된 것은 큰 잘못이다”라고 한 지적은 우리나라 학춤의 형성과정을 연구하는데 유익한 자료이다.
아무튼 서국영은 자신이 작성한 동래학춤
조사 보고서에서 “(동래학춤은)청초하고 우아한 학의 동태를 민속무로서 표현한
무용이란 점에 가치가 있고, 민속무 중에서 조류의 동태가 율동화된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며 궁중무의 학무와 비교해서 민속적인 특색이 짙은 희귀한 춤사위는 중요한 무용자료가 될 수 있다”고 하여 동래학춤의 특징을 밝히고 있다. 서국영은 생전에 울산문화원을 방문하여 울산학춤에 대한 역사성을 당시 서진길 울산문화원장으로부터 설명듣고는 “내가 계변천신 설화를 사전에 알았더라면 한국의 학춤문화의 근본을 쉽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인연이란 진실로 묘한 것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류 기능보유자인 천재동 옹은 고향 울산을 떠나 많은 고생 끝에 동래의 민속예술을 활성화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필자는 동래 온천장의 고향을 떠나 울산 사람이 되어 울산학춤을 재현 안무하고, 전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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