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의 鶴이야기]부산시 적극적 관심·배려로 인지도 높여 | ||||||||||||||||||
13. 동래학춤(중) 수십년 후 나타날 기대효과 파악 시 무형문화재 지정 금강공원에 전수관 짓고 전수장학생제도까지 마련해 고교·대학 무용과 ‘전수 지정학교’ 선정 장학금 지급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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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수준 높아지고 지역경제에도 도움 ‘두마리 토끼’
서국영이 1973년 12월 당시 문화재관리국에 제출한 동래학춤 조사보고서에 의한 차림은 다음과 같다. 의상으로 갓, 망건, 저고리, 바지, 도포, 대님, 버선, 도포 끈, 미투리 등 모두 아홉 종류로 나타난다. 머리에는 망건을 쓰고 그 위에 갓을 쓴다. 의상으로 속옷은 백색 옥양목을 재료로 한 바지와 저고리를 입는다. 겉옷은 백색 광목을 재료로 한 도포를 입는다. 대님은 백색 광목을 재료로 한 것을 사용하며, 버선은 광목으로 만든다. 신발은 삼·닥·짚을 재료로 한 미투리를 신는다. 도포 위에는 명주를 재료로 한 끈을 맨다. 그러나 현행 동래학춤 의상은 도포라고 하기엔 소매 길이가 긴 장광수 형태의 인위적 의상을 착용하고 있다. 동래학춤 의상 차림의 특징은 갓 끈의 매듭은 기록이 없으나 리본형으로 매고, 행전을 착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반드시 갓 끈의 고리를 오른쪽으로 향하게 하고, 행전을 착용하는 양산학춤과 울산학춤의 복식 차림과 차이가 있다. 동래학춤의 춤태는 어떤 것이 있을까. 1973년 조사보고서에 의한 동래학춤의 춤태는 비상태(등장), 정립태, 좌우살핌준비태, 좌우살핌태, 좌태, 농
그런데 1989년 (사)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 동래야류보존회에서 발행한 <동래들놀음>에는 활갯짓뜀사위, 일자(一字)사위, 돌림사위, 모이어룸사위, 외발서기, 옆걸음사위, 좌우활개사위, 배김사위, 좌우풀이사위, 소쿠리춤사위, 뒷배김사위, 소매걷움사위, 모이줍는사위, 모둠뛰기사위, 좌우배김사위 등 15가지로 나타난다. 전술한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같은 동래학춤인데도 조사보고서와 보존협회 발간 책에서는 춤태의 가지 수와 표현 용어에서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최초 조사 보고된 뒤 16년이 경과한 뒤에는 많은 차이가 발견된다. 물론 ‘춤태’라는 기존 명칭에서 ‘사위’로 표현방식이 바뀐 것은 같은 동작이지만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더라도 춤태 종류도 5종류가 축소된 것은 의아하다. 또한 같은 책에서는 동래학춤의 특징 및 가치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동래학춤은 학의 모의무가 아니고, 동래지방 기방무의 일종인 한량춤에서 발전하여 학춤답게 정형화되어 전문성을 띠게 되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다음은 동래학춤이 조사에서부터 어떻게 독무, 5인무, 대형군무 등 순차적으로 바뀌게 되는지를 우선 조사할 때부터 살펴본다. 울산 출신이면서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류 탈 제작 기능보유자 천재동(千在東, 1915~2007년)은 그의 저서 <아흔 고개를 넘으니 할 일이 더욱 많구나!>의 구술내용에서 독무로 발굴할 것인가, 쌍무로 발굴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김희영(金熙英, 동래야류 넷째 양반예능 보유지정 직전 사망)이 활보하고 다닐 때 동래학춤은 발굴이 시작되었다.(중략) 쌍무로 발굴할 것이냐, 독무로 발굴할 것이냐 양론이 대두되었을 때, 하루는 협회 사무소 아래 종다방에서 내가 이런 의견을 제의했다. ‘우리가 많이 보아온 옛 그림에 보면 한 쌍씩 짝을 지어 한 마리가 날면 한 마리는 앉아있고 한 마리가 쳐다보면 한 마리는 내려보는 조류 그림을 볼 때 정감도 가고 통일감도 있어 짜임새가 있는 것과 같이 독무보다 쌍무로 발굴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고 했더니 마침 김희영이 ‘내 여동생과 그의 딸 향경양도 다 같이 학춤을 춘다’고 해서 쌍무로 발굴될 듯 했으나 이때는 이미 독무를 주제로 하여 S씨가 많은 진도에까지 이르러 발굴되어 있는 상태여서 하는 수 없이 쌍무는 무시되고 말았다”라고 당시 상황을 구술하고 있다. 아무튼 동래학춤은 1973년 조사 이후 전국에 많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결과로 논문도 박연진의 <학춤에 관한 연구(1980년)>등을 비롯한 10여편이 발표됐다. 뿐만 아니라 한때는 한국무용을 전공한 학생 가운데 동래학춤을 배워보지 않은 학생은 없을 정도로 많이 연수되었다. 그러다 보니 학춤이라고 하면 동래학춤을 떠올릴 만큼 그 인지도가 높았다. 동래학춤이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이유 가운데 부산시의 절대적인 관심과 적극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점은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지자체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부산시는 일찍이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활발한 문화활동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그들의 예술적 역량을 비중있게 인식했다. 그러한 결과 지역 문화예술인은 현 시대의 지역문화 발전을 위한 성찰의 노력으로 쉬운 삿대질보다 어려운 실천으로 수십 년 후에 나타날 기대효과까지도 내다보고 선견지명의 깊은 뜻을 결집했다. 이에 부산시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동래학춤을 1972년 부산시 지정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했다. 동래 금강공원 안에 전수관을 짓게 되고 전수관에서 지속적으로 연수활동 뿐만 안으로는 전수장학생제도를 실시해 전수의 단절을 준비했다. 한편 밖으로의 전수는 지역 고등학교와 대학 무용과를 선정해 ‘동래학춤 전수 지정학교’로 지정하여 지속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고 매년 발표도 했다. 동래학춤의 인지도가 그냥 무관심 속에 하루아침에 높아진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국가나 자치단체로부터의 무형문화재 지정은 국가나 단체, 그리고 개인에게 있어서 인지도를 상승시키는 중요한 역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지방자치단체에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나 지방지정 무형문화재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역 시민의 문화에 대한 관심과 수준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로 인한 지역경제의 도움도 크다. 김성수·울산학춤보존회 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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