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125.동래야류 정립

무극인 2017. 6. 19. 21:35

1972年 7월  東萊野遊定立(길놀이, 特科場 앞놀이, 뒷놀이)

  

당초부터 일정한 놀이마당도 없어 ‘소 방울 묘 등’ 金剛公園 중턱 ‘연못가위에 있는 空地’ 或은 日人들의 ‘옛 神社터’ 等에서 野遊놀이 演習을 한 것이다. 第四代 郭永郁 理事長이 취임하고는 주로 가깝고 자유로운 日神社터가 알맞고 적합했다. 연습에 있어 오후 놀이가 오전과 다르고, 어제 한 놀이가 오늘과 다르다보니 내일의 연습도 오늘과 다른 재담, 체형들에 대해 하루 빨리 무슨 방법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알고 보니 연출의 基本이 되는 연희본이 없기 때문에 연희내용인 재담, 체형 등이 연습 때마다 통일되어 있지 않는 근본 원인인 것이었다. 65년 이후부터 S씨가 연출을 맡고 있었는데 소중하게 자기만이 사용하고 있던 釜山大學校 民俗(?)으로 釜大에서 펴낸 野遊演出에 관한 책자를 어떤 기회에 볼 수 있었는데 그 내용은 統營五廣大 형이 농후했다. 그러니 우리 演戱者들은 본래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과 연출자의 또 다른 형식의 演出로 인해 혼란스러워서 오늘과 내일의 놀이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石南 宋錫夏 民俗學者의 遺稿는 兩班科場만 수록되어 있는데 由來와 特色 等으로 엮어져 있어 연출에 도움이 되기는 어려웠다. 해방 후 채록한 崔常壽 民俗學者의 채록에는 왜곡된 곳과 자기 나름대로 쓴 듯한 생소한 것들이 있었다. 나와 對面한 기회에 질문한바 있었는데 崔學者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當身은 그림이나 그릴 것이지 무엇 때문에 이러느냐? ” 라고. 나는 東萊野遊에서 이미 많은 資料를 粹集했고 野遊의 化身이라 볼 수 있는 두 어른 朴德業 翁과 辛佑彦 先生任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 郭永郁 理事長이 제공한 協會事務室 한 구석에서 언제나 朴德業 翁이 자기가 사용하는 탈이나 소도구를 손질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접근하면 ��千 先生가, 무슨 일이고?�� 하였다. 옹은 주로 춤사위와 동시에 말뚝이채찍을 흔들며 실기로 설명하였다. 辛佑彦 先生은 당시 耆英會 총무를 맡아 일하셨다. 댁에 계실 때나 사무실에 계실 때나 나를 만나면 ��가자!��한다. 耆英會館 숙직실이 있는 건물 방 하나를 東萊屋의 주류를 저장해두는 房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방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 電球를 켜고 문어다리를 빚으며 마주앉아 술 한 잔 마셔가며 가르치고 배우고 하기를 매일같이 반복하였다. 여기는 감춰져 있던 野遊의 생태를 출산시키는 산실인 셈이다. 이렇게 출산된 『東萊野遊演戱本』으로 30년간 가르치고 배우는 영원한 토대가 된 것이다.

 ○「東萊野遊 길놀이」

 辛佑彦 고증으로 채록하던 과정에 생각지도 않았던 「東萊野遊길놀이」가 불쑥 나타난 것이다. 「東萊野遊硏究」책에서 이미 얻었으니 구체적으로 생생한 실태가 정확하게 내 머릿속에 전개되고 있었다. 생소하게도 갑옷차림의 中軍이 나오고, 무지개 大將軍 밑에 男女歌唱 길軍樂이 나오는가 하면 말을 탄 八仙女 等이 五, 六面의 華麗한 行列이 놀이 形體로 길을 누빈다. 이「東萊野遊길놀이」를 完全 發掘로 認定받아 1972年 7月12日 나는 다시 東萊野遊 길놀이 全貌를 그림으로 그려( 圖解化) 世上에 내 놓게 되었다.

 ○「特科場 앞놀이」

  연이어 또 다른 하나의 特科場인 앞놀이가 출산된 것이다. 이 앞 놀이는 「東萊野遊 길놀이」행렬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서 넓은 마당에 당도하여 펼쳐지는 놀이인데, 우리나라에 많은 축제가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문 것으로, 온 마을 사람이 이날 이 시간만은 남녀노소 구별이 없고, 부모자식, 일가친척 상관없이 얼굴에는 탈을 쓰고 옷차림도 재미있게, 모닥불과 오색초롱의 불빛을 밝혀놓고, 먹고 마시고 춤추는 大同和合의 한 마당 펼치는 놀이가 바로 이「東萊野遊特科場앞놀이」인 것이다.

 ○「뒷놀이」

  이 뒷놀이는 「東萊野遊 길놀이」앞놀이가 신명나게 놀아나다가 자정을 전후하여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면 부녀자들을 비롯하여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정으로 돌아가고, 첫 닭이 울고 동이 틀 무렵까지 東萊野遊 演戱者들이 自己네끼리 즐겨하며 노는 놀이를 말하는 것이다. 모두 둘러앉아 장구長短에 맞춰 출출 넘쳐흐르는 해학이 담긴 요동춤을 잘 추면 웃음과 박수, 못 추면 벌을 받고, 축제 동안의 육신의 고달픔을 해소하고 다 못한 신명풀이를 원 없이 발산시키는 뒷풀이가 「뒷놀이」인 것이다. 부녀자 중에는 가정에 돌아가지 않고 숨어서 몰래 구경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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