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곡에 대한 글,기타

심상교 (부산교대 교수)

무극인 2019. 10. 13. 22:39

문화예술 지킴이 / 장인 증곡 천재동

바가지에 해학과 풍자를 입히는 장인 증곡 천재동

                                                         심상교 (부산교대 교수)


울산 방어진에 일본 구파연극단이 왔다. 가부끼(歌舞伎)도 왔고 서커스, 마술단도 왔다. 영화도 개봉되어 여러 명의 남녀 배우들이 개봉 인사차 들렀다. 울산 사람들뿐 아니라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 들어 이들을 환영하며 열광했다. 그 숲에는 등에 업혀 구경 나온 네살짜리 아이도 있었다. 혼자 영화와 연극을 보러 다니게 되었을 때 그 아이는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되리라.

그리고 80여년이 흘렀다. 그는 지금, 배우 대신 멋진 말뚝이 할아버지가 되었다. 동래야류 탈제작 기능보유자인 천재동선생님이 바로 그 분이다. 말뚝이가 동시대의 윤리관을 지키듯 천재동옹은 부산의 문화를 지키는 부산문화의 말뚝이가 된 것이다.

 

부산문화를 지키는 부산문화 말뚝이

천재동옹은 1915년 울산 방어진에서 태어났다. 방어진은 육지에서 바다로 돌출된 반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방어진의 한 쪽은 동해에 면해 있고 다른 한 쪽은 울산만과 면해 있다. 현재의 방어진에는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조선소가 위치 해 있어 한국 기간산업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1910년대 방어진은 일본인들이 북적대던 어항이었다. 일본인들은 살 곳을 마련하면 그 다음, 극장을 세우고 연극과 영화를 올린다. 활황의 포경기지 방어진도 예외가 되지 않아 숱한 일본의 연행예술이 이곳에서 공연되었다. 어린 천재동은 그 숱한 공연물들을 보고 감격하며 자랐다.

극장은 집에서 100도 안되는 곳에 있었다. 대정관(大正館)이었다. 네 살 때 이사했는데 이사한 곳에 또 극장이 있었다. 상반관(常盤館)이라는 극장이었다. 현대식 극장이었다. 남목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이찰 때까지 극장을 돌아다녔다? 그의 성장과정에 극장은 절대적 존재였던 것이다. 1939년에 처음 도일하였으니 그 때까지 그는 방어진의 일인 극장의 문화세례를 흠뻑 받은 셈이다.

어린시절 집에 서사(書士)가 한 분 있었는데 그의 등에 업혀 연극영화구경을 다녔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조루리, 가부끼 등 일본 전통극 공연도 많았다. 동보, 신꼬, 봉절관 등의 영화사에서 만든 영화주인공들이 개봉에 맞춰 인사를 오기도 했는데 그들의 무대인사는 영화이상으로 관심의 대상이었다.

?제일 기억나는 작품은 뭐에요??

?산림의 여왕. 매일 가서 봤어.?

산림 속에서 여자가 타잔같이 나무를 타고 다니며 짐승과 싸우고 임금노릇을 하며 자유롭게 사는 내용이었다. 자유롭게 행동하는 영화주인공을 동경했던 천재동. 그 자유분방함의 예술가적 기질은 당시 유행하던 구파와 신파의 작품들을 예사로이 볼 수 없게 했고 실제로 그것을 해보게 했다. 그는 이미 16세에 친구들과 ?부대장(部隊長)?이라는 연극을 직접 만들어 공연했었다.

당시 어린 천재동의 집에는 과객이 많았다. 그의 집에 머물던 많은 ?과객?들은 그의 예술혼에 불을 놓은 예술방화범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배우나 자유예술인이 되고픈 희망을 키우던 터라 과객의 방문은 그의 희망을 더욱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과객?은 말그대로 ?지나가는 손님?이다. 그런데 그냥 지나가는 손님이 아니다. ?환치는 사람?, ?서예가?가 과객이었다. 별나고 뛰어난 재주를 가졌지만 사회가 그 재주를 수용할 상황이 되지 못하여 유랑할 수밖에 없던 사람들, 일종의 유랑예술인들이 과객인 셈이었다. 과객은 깍듯한 대접을 받으며 일주일씩 집에 머물렀고 갈 때 깨끗한 옷을 만들어 입고 간 과객도 있었다. 그들은 천옹의 집에 머물며 집을 장식해주고 예술품도 남겼다. 전나무를 가져다 장기판과 장기말을 깍아 만들어 주고 간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솜씨 하나 하나가 어린 천재동에게는 신기했고 배울 것들이었다. 유복한 집안 사정과 23녀의 차남이라는 조건은 그를 더 자유롭게 했다.

 

연극작업과도 인연맺어

1939년 그는 도일한다. 미술을 배우려는 생각에서였다. 동경 태평양미술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는 1941년에 귀국하여 연극작업을 하였다. 이 때의 연극작업은 후일 그의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1944년에 다시 도일하여 가와바다회학교(川端繪學校)의 야간부 소묘과 조교를 하며 당시 입학이 극히 어렵던 가와바다회학교 특설 인체과(人體科)에 들어가 그림공부를 했다.

천재동의 연극작업은 ?국민극연구소?에서 시작하였다. 국민극연구소는 유치진이 대표로 있던 ?극단 현대극장? 소속의 연극연구소였다. 국민극연구소의 소장은 함대훈이 맡고 있었다. 국민극연구소는 이동극단을 만들어 공장이나 군대에 위문공연을 다닐 목적으로 연극요원을 만들어내던 일종의 양성소였다. 일본에서 일시 귀국했을 때 국민극연구소에서 연극요원을 모집했다. 현재, 현대 본사가 있는 구 휘문고 자리에서 시험이 치러졌고 거기에서 연극요원 훈련이 진행되었다. 38명을 뽑았는데 400명이 모였다. 키 큰 사람, 뚱뚱한 사람, 야윈 사람 등 미술하는 사람, 소리하는 사람 등 다양한 배역에서 연극을 하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38명을 뽑았다. 다양한 신체조건과 재능을 가진 인물이 선발되었지만 어떤 배역이든 소화할 수 있게 훈련을 받던 곳이 국민극연구소였다. 뽑힌 인원 중에 미술하던 사람이 천재동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무대미술에 더 인연을 맺게 되었다. 배우연습을 하면서도 무대미술과 인연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사투리 때문이었다. 국민극연구소에 들어갔을 때 지방출신이 3명이었다. 당시 연극에서는 사투리를 절대 쓰지 못하게 했다. 표준말 연습을 해도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사라지지 않던 천재동은 배우가 되고 싶어도 쉽게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대미술 부분의 작업에 더 열심이었다. 배우보다 무대미술에 더 가까웠던 이유는 아마 감출 수 없던 미술적 재능 때문이었으리라.

당시 서울주재극단으로는 청춘좌, 호화선, 신협, 고협, 극단 현대극장, 동양극장 등이 있었는데 극단현대극장에서 주로 활동한 인물로는 유치진, 이해랑, 김동원, 서대근, 유계선과 눈물의 여왕 전옥 등이었다. 천재동은 이들과 함께 작품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는 함세덕과의 인연도 있다. 국민극연구소 수료후 함세덕이 국민극연구소 연극요원들을 연출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함께 작업을 했다. ?전설?이라는 심훈의 동아일보 연재 소설을 각색해서 공연했다.

탈은 해방되면서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해방되면서 처음에는 아동극을 만들었다. 울산 방어진의 초중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연극공연도 하고 방어진 토박이 양조복, 최용규와 함께 3인전 전시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그의 연극미술활동은 울산 예술활동의 불씨가 되었다. 당시 천옹이 그린 작품 중에 남아있는 것은 단 한 편. 울산시 중구 성남동 동광병원 벽에 붙어 있는 ?모정?이라는 10호크기의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각본연출로 되어 있는 연극활동으로는 당시 사회의 흐름을 반영한 작품이 몇 개 있는데 대표적으로 ?박제인간?이있다. 왜색척결의지를 주제로 한 것인데 후일 ?쓰리보이?라는 예명으로 유명해진 연예인 ?신선삼?이 주인공이었다. 일제 강점기간 동안 일인들이 우리를 박제로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를 마음대로 부려먹었다. 해방이 되어 박제가 살아나 새 삶을 산다는 내용으로 된 작품이었다.

1953년 부산에 정착하면서 처음에는 연극활동을 주로 했다. 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아동극 공연도 했다. 이때부터 그는 우리의 전통문화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경험이 상실되어 가는 우리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자극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전통과 민족적인 것들을 찾아 보존 발전시켜 나갔다. 아동극단 ?바다??갈매기? 민속극단 ?한나라?, 드라마센타 부산극회 극단 ?마당?의 창단과 활동이 모두 이런 생각 아래에서 이뤄졌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흥분과 재미를 예술품으로 바꾸어 놓은 인물

천옹은 손끝의 감각에 전율한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흥분과 ?재미?를 예술혼으로 바꾸어 온 인물이다. 그래서 손으로 직접 만지는 예술을 즐겨 다뤄 왔다. 토우를 빚고 탈을 제작해 온 연유가 바로 손끝의 전율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토우전시회를 이미 50년대에 개최했다. 정확한 연도를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배꼽을 드러낸 아이, 오줌싸는 아이, 키를 쓴 채 소금을 얻으러 가는 아이, 친구들과 숨바꼭질하는 아이 등등 수많은 토우를 제작하여 이미 50년대에 전시회를 한 것이다.

50년대 이미 지극히 한국적인 흙인형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50년대 이래 수많은 외국인형들 숲을 지나면서 한국적 형상의 인형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그러나 천옹은 50년대부터 외로이 우리것을 지켜 온 것이다. 때문에 도날드와 미키마우스, 뚱뚱한 곰인형, 눕히면 눈을 감는 외국소녀 인형들 숲에서 달덩이같이 둥그런 얼굴을 가진 코흘리개가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코흘리개는 이제 배꼽을 드러낸 채 마음껏 친구를 부르고 키를 쓴 채 마음껏 울고 있는 것이다.

탈도 역시 토우처럼 작품에 직접 손을 대게 한다. 다른 예술품은 감상하게만 하나 탈은 얼굴에 쓰고 노는 재미까지 준다. 탈의 이런 매력은 천재동의 예술적 열정을 유인하기에 충분했다. 1960년을 넘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탈제작에 매달리기 시작한다. 196510월 하순에 부산시 공보관에서 탈 전시회를 열었다. 국내 최초였다. 그는 탈을 만들면서 탈의 이모저모를 분석하지 않는다. 느낌대로 만든다.

 

동래야류와의 만남

동래야류와의 첫 만남은 196510월 자신의 탈작품을 보아 전시회를 열던 부산시 공보관에서 이뤄졌다. 부산에 자리를 잡고,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토우를 만들고, 연극을 만들면서 그 연극에 탈을 쓴 인물도 등장시키면서도 부산지방에 탈놀이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국내최초로 탈전시회를 할 때까지도 동래야류라는 탈놀이가 부산에 있었는지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탈전시회를 하고 있던 19651028일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일등을 하고 돌아온 동래야류 회원 한 사람이 찾아왔다.

?동래야류는 당신을 몰랐고 당신은 우리를 몰랐다. 그러나 이젠 힘을 합치자.?

이후 동래야류 회원에 가입했고 이날까지 그 인연을 이어왔다. 그리고 며칠 후 부산일보 프레스홀에서 동래야류 공연이 있었는데 그때 동래야류 탈을 처음 보고는 ?왜 바가지로 탈 만들 생각을 못했을까?라고 손을 쳤다. 천옹은 그 때까지 나무, 종이로만 탈을 만들었던 것이다.

천재동이 만드는 동래탈의 절정은 말뚝이다. 붉은 대추빛 나는 큰 얼굴에 팔뚝만한 코, 주먹크기 만한 눈, 얼굴 아랫부분을 다 차지하는 입, 세상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말뚝이 역할이 말뚝이탈에 응집되어 있다. 말뚝이 탈의 왼쪽은 화난 모습 오른쪽은 해학적 모습을 하고 있다. 같은 얼굴에 두 개의 감정을 담는 미묘한 조화가 말뚝이 탈의 생명이다. 바가지에 그런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이 바로 천재동인 것이다.

말뚝이는 다른 탈보다 크다. 말뚝이와 대립하는 양반탈이 어른 손바닥만한 반면, 말뚝이는 탈 둘레만 1가 넘는 큰 탈이다. 동래탈은 공연이 끝나면 고사를 치르고 태운다. 때문에 매년 탈제작을 하며 그해 어떤 바가지가 나오느냐에 따라 말뚝이가 달라질 수도 있다. 주로 둥글고 큰 박을 이용해 말뚝이를 만들지만 간혹 길쭉한 말뚝이가 나오기도 한다. 박은 한 트럭분 이상을 준비해서 먼저 말뚝이탈 재료를 선별하고 다음 탈 재료를 찾는다.

탈은 여문박을 솥에 찐 다음 눈을 다치지 않게 속을 파내고 말린 다음 작업한다. 붓이나 숯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틀을 잡고 창호지를 발라 채색을 한다. 말뚝이의 큰 코는 짚으로 만든다. 탈의 눈이나 입주변에 층이 지도록 만들 때는 박을 얇게 저미듯 잘라내어 덧붙이기를 한다. 탈의 울퉁 불퉁한 면이나 높낮이를 조절할 때 지토를 사용하기도 한다. 박과 지토를 말리고 채색을 하는 데 세 달 걸리는 탈도 있다.

선생님은 현재 부산진구 초읍동에 사신다. 선생님댁은 분홍색칠을 한 깔끔한 이층양옥이다. 이층은 탈작업실이고 일층은 토우와 그림 작업실이다. 그곳에는 천재동선생님과 56년을 함께 살아온 부인,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탈제작을 이어가는 장남 천영배선생이 살고 있다. 집안에는 말뚝이를 비롯한 많은 동래야류탈과 창작탈, 그리고 토우들이 전시되어 있다. 천재동선생님은 말뚝이를 닮으셨고 부인과 장남은 많은 토우 중에서 그냥 밖으로 걸어나온 듯 친근하고 다정스럽다. 함께 있으면 닮는다고 했던가. 40년동안 탈과 토우 숲에서 살다보니 서로 닮아가는 모양이다. 선생님은 요즘도 작업을 계속하신다. 많은 탈, 토우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변함없이 우리의 민족예술전통예술을 지켜가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이 있었기에 현대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을 아우르고서 이 시대의 것을 창조할 수 있었음을 짐작하겠다. 선생님은 1971년 동래야류 가면제작 기예능 보유자가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런 일을 수행해 오신 터이다. 보유자는 원형의 보존이 일차 임무임에도 선생님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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