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스승
옛 어린 동료 주민규(퇴임교장)
증곡 천재동 선생님은 나의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쳐주신 분이셔서 일찍 부터 마음속에 스승으로 모실 뿐만 아니라 몇 년 전에 돌아가신 나의 선친과 연배가 비슷하여 평소 부친과도 같이 모시는 분이시다.
내가 학교를 갓 졸업하고 사회로 첫발을 내디디던 때부터 교직에서 퇴직한 지금까지 나를 도와주시고, 일깨워주시고, 걱정해 주시는 선생님이시다.
이야기를 하자면 상당히 오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45년 전인 1958년 3월 말인가 보다.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요행히도 부산에 있는 전포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고 부임하러 간 첫날부터 선생님으로 모시게 되는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교감 선생님이 안내하여 교장 선생님께 겨우 인사만 드리고 교무실로 나온 나를 한쪽에 앉히더니 이력서(요즈음의 인사기록카드) 용지 3부를 주시며 오늘 다 작성해서 제출하고 나가라는 것이다.
요즈음 신규임용 교사들은 임용 전에 미리 인사기록카드를 작성해 두었다가 부임시 그 학교에 바로 제출토록 되어 있는데 그 당시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력서를 작성하려고 하니 필기구가 없었다. 요즈음 같아선 그 흔한 휴대용 볼펜 한 자루쯤은 안주머니에 꽂고 다녔을 텐데 그 무렵에는 모든 게 어려워 생활에 좀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야 만년필 한 자루 정도 갖고 다닐 수 있었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펜대에 펜촉을 갈아 끼워 가며 잉크를 찍어 사용하던 시절이었기에 이제 갓 부임하는 신규임용 교사 주제에 다른 필기구가 있을 턱이 없었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맞은편 자리에서 한참 바라보고 계시던 선생님께서 당신이 쓰고 계시던 펜대와 잉크스탠드를 나에게로 넌지시 밀어 주시면서 천천히 작성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때 그 고마움을 지금도 잊을 수 없으며 펜대와 잉크스탠드를 밀어 주실 때 그 미소 띤 인자하신 모습이 내 머리 속에 각인되어 버렸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교직에 입문하던 그 당시는 사범학교(지금의 고등학교 과정)만 졸업해도 초등학교 교사로서 복무할 수 있었다. 겨우 만 나이 열여덟 살 조금 지난 어린 나이에도 그 당시로선 다른 직종보다 대우가 좋았던 교사가 되었다는 자만심과 미래에 대한 환상적인 꿈에만 한껏 가슴이 부풀어 멋모르고 설쳐대는 햇병아리 교사였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직장 안팎에서 알듯 모를듯 항상 나에게 시선을 주시며 여러 가지로 배려해 주셨을 뿐 아니라 틈나실 때마다 하나에서 부터 열까지 새롭게 다 가르쳐 주시면서 꼭 훌륭한 교육자가 되라고 당부해 주셨다.
가끔 직장에서 전 직원이 함께하는 회식 시에도 꼭 당신의 시선이 미치는 자리에 나를 앉히고 술자리에서의 여러 가지 예법을 행동으로 가르쳐 주셨다.
그렇게 지내던 중 함께 근무하시던 J선생님을 비롯한 몇 분 선생님이 발의하셔서 주로 ‘예술과 교육’을 이야기하는 ‘돌거울’이라는 친목모임을 하나 만들었다. 선생님께서는 이 모임에도 그 당시 나이가 제일 어렸던 나를 추천해 입회시켜 여러 가지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고,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당신께서 종신회장으로 계시면서 매월 만나는 그 모임을 계속하고 있다.
1960년대 중반 무렵 나의 부친이 등대 장으로 근무하고 계셨던 가덕도 등대에 돌거울회에서 2박 3일 여정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도 선생님께서는 한 모기장 속에서 한 이불을 덮고 함께 주무시면서 부친에게 나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다고 했다.
내가 전포초등학교에 근무하던 1960년대 초반은 생활이 모두 어려웠는데 선생님께서는 많은 식구에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시면서도 부처님 같은 얼굴로 항상 미소를 지으며 인자하시고 말없이 너그러워셨으며 그리고 즐겁게 남을 웃기시며 생활하셨다. 여기에는 아마 사모님의 내조의 공도 있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선생님은 무슨 일에나 열심히 성심성의를 다하셨으며 특히 미술이나 연극 등의 분야에 임하실 때는 무아지경에 이를 정도로 그 한 가지 일에 몰두하고 매진하는 모습을 보고 장래 꼭 유명하신 분이 되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벌써 선생님께서 남다르게 뛰어난 분으로 되어 계셨던 것을 나만 너무 어려서 잘 몰랐던 것이었다.
훗날 다른 분들을 통하여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당시는 국제교육시찰단이 종종 학교 현장을 방문하였다. 그때마다 교육청에서는 선생님이 연구수업을 하도록 지명하였다고 한다. 선생님께서는 그 당시로서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도 못했던 선진화된 학습 자료와 지도 방법을 창의적으로 구안하여 수업에 적용시켰던 것이다.
연구수업을 도맡아 하시면서 꼭두각시놀이 또는 극화한 국어 수업, 자작으로 개발하여 움직이는 입체 괘도를 활용한 산수 수업 등 70여명의 다수인 학급인데도 탁월하게 수업을 전개하시는 것을 보고 외국 교육 사절단은 물론 모든 참관인들이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고 하는 사실이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선생님께서는 당시 부산시내 45세 이상의 평교사는 노후교사라 하여 군․면으로 전출시키면서도 선생님만은 제자리에 두었으며 교감 승격을 권했으나 결사 거절하였는데 그 이유는 교감 직은 관리직이라 아이들을 직접 대할 수 없어서 당신께서 좋아하는 그림과 연극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도 교육청에서는 비상수단으로 남천초교로 부임케 하여 앉은 교감 승진 방법을 동원하여 강제로 교감 직에 임용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마다하고 9개월 만에 교직 자체를 뿌리치고 나와서는 그림과 연극이 있는 민간단체인 민속 예술단에 뛰어들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자 교육청에서는 예능 분야에 너무나 아까운 인재를 놓치기 싫어 그 당시로선 획기적인 민간인 장학사로 추대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당신께서는 그림과 연극을 너무나 좋아하는 예술가였고 또 그 분야에서 뛰어난 교육자이셨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예술성에 대하여는 그 깊이와 가치를 사실 잘 모른다.
그렇지만 증곡 선생님은 나의 삶에 많은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시며 인생의 깊은 참 멋과 즐거움을 주시기 때문에 항상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시다.
선생님 부디 만수무강하시고 더 많은 가르침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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