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동 재동 천재동(天才童)’
댓글 0 카테고리 없음 2019. 9. 4.
부산 원도심 문화사랑방 이야기[8]
최화수 2017. 2. 14. 11:44
웃고 울며 사랑하노라니…
- 부산 원도심 문화사랑방 뒷이야기(8)
최 화 수
‘재동 재동 천재동(天才童)’에 물찬 ‘제비’
1960년대부터 반세기 동안 부산 원도심에서 열린 각종 문화행사의 현장사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아마도 증곡 천재동曾谷 千在東이 아닌가 한다. 중요무형문화재(동래야류)인 그는 자신의 회고록 『아흔 고개를 넘으니 할 일이 더욱 많구나』 제명이 시사하듯 그 누구보다 건강하고 다양한 예술인의 삶을 구가했다. 증곡은 토우土偶, 동요민속화, 연극, 가면탈, 민속놀이 등 우리 전통민속예술에 일가를 이루었다.
2007년 그는 회고록 『아흔 고개…』 중 ‘회고록 들어가기’에서 부산 원도심에서 자주 어울렸던 문화예술계 인사들 이름을 열거했다. 향토연구가 박원표 선생을 필두로 연극인 한형석 이해랑, 소설가 이주홍 김정한, 문화전령사 김상수, 사진작가 허종배, 서양화가 우신출 김종식 한상돈 송혜수, 한국화가 이규옥 이석우, 미술평론가 이시우, 민속인 신우언 조성국, 사업가 곽영욱 김종필 박태윤 등등이다. 문화계의 마당발 증곡이 가까이 한 사람이 어찌 이들뿐이랴.
오후 5시경 교실에서 내일의 지도안을 작성하고 있으려니 똑똑똑 창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유리창을 통해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시인 이인영의 희고 길쭉한 얼굴이 오늘 따라 더 길게 느껴졌다. 얼마의 지폐를 집어주었더니 작은 쪽지를 건네주고 떠나갔다. 6시 30분까지 〇〇상점으로 오라면서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남포동 자갈치 입구 〇〇상점에 가니 시인 천상병, 강파월과 6~7명의 군상들이 진을 치고 모여 있었다. 진로 소주 여러 병을 찌그러진 커다란 주전자에 쏟아 넣은 후 코카콜라 여러 병을 추가로 쏟아 부었다.연탄불에 구운 마른 오징어를 안주로 하여 잔을 돌려가면서 정답게…. - 천재동 회고록, 『아흔 고개를 넘으니 할 일이 더욱 많구나』
증곡은 천부적으로 예인의 기질을 타고 났다. 그는 16세 때 고향 방어진에서 또래 친구들을 모아 연극공연을 얼마나 잘 했는지 ‘천재동(千在東)’이란 본명 대신 ‘천재동(天才童)’이란 이름을 얻었다. “재동 재동 천재동(天才童), 방어진의 천재동(天才童)”이란 노래 아닌 구호가 사람들의 입에서 넘쳐났다고 한다. 그는 운동신경이 빼어나 ‘제비’란 별명을 얻었는데 부산 대표축구, 야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일본 도쿄와 서울을 오가며 미술과 연극 공부도 줄기차게 했다.
증곡은 결혼하면서 교직에 투신, 울산과 부산에서 25년간 교사로 봉직하며 어린이 민속극단 공연과 민속길놀이 지도 등을 했고, 1970년부터는 교단을 떠나 민속예술문화에만 전념한다. 전통민속문화 발굴, 연구, 조사, 채록, 재연, 정립을 하면서 연극은 물론, 창작 탈, 민속풍속화, 토우 전시회 들을 개최하면서 자신의 모든 신명을 바쳐 예술세계를 승화시킨다. 그는 “제2 고향인 부산 동래민속예술이 나의 끼와 잘 접목되어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전시회를 개최할 때면 가장 걱정거리는 개막할 때 초대한 손님을 어떻게 대접하느냐이다. 적은 경비로 좋은 먹을거리를 준비할 수 없을까? 나는 집사람과 궁리한 끝에 전시작품이 민속적이라는 것, 손님은 개성이 남다른 예술인이라는 것 등으로 분위기를 집약하여 놓고 보니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집사람이 적의(適宜)한 독에다 물김치를 담그고, 해장에 좋다는 시락국을 끓이고, 맛도 있고 씹기에도 좋은 비득비득하게 잘 말린 명태 한 상자, 고추장에 설탕을 버무려 함께 올려놓았다. 가장 중요한 막걸리를 단골 통술집에 부탁하여 세 말을 가져다가 술통 위에 쪽바가지를 동동 띄어놓았다. - 천재동 회고록, ‘위의 책’
증곡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권하는 이가 없어도 축객들이 손수 막걸리를 퍼마시는가 하면, 너나할 것 없이 다투어 맨손이나 준비된 칼로 명태를 자르고 비틀어 찢고 하는 등 야단이었다. 달콤한 고추장을 직접 또는 손가락으로 찍어서 고기에 발라 한입에 넣어 맛있게 씹어 먹는 그 모습들이 너무 고맙고 기쁘지 아니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증곡의 독창적인 멋과 천재적인 풍류는 자신의 금혼식을 작품발표회로 멋지게 장식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1994년 천재동 서정자 부부 결혼 50주년 기념일이다. 기념장소를 물색한 결과 전시장과 무대를 갖춘 곳은 대청동 부산가톨릭센터 한 곳 밖에 없었다. 전시장에는 식장 겸 작품을 전시키로 하고, 극장에서는 천재동 작 <중매소동> 단막극을 극단 도깨비 단원들의 공연으로 올리기로 했다.
먼저 기념식과 함께 많은 하객들로부터 축복을 받고, 다음 장소인 극장으로 옮겨 연극을 감상하게 했다. 다시 전시장으로 되돌아와 개전(開展)식을 하는데, 초대형 말뚝이 탈을 전시장 벽면에 걸고 하얀 천을 덮어씌워 하객 중 최연장자와 최연소자가 좌우 양편에서 천에 묶은 줄을 당기게 했다. - 천재동 회고록, ‘위의 책’
‘광포동 신사’로 불리는 서양화가 단광 우신출丹光 禹新出은 천재동과 곧잘 어울리는 막역한 사이이다. 두 사람은 일찍이 부산 대표 축구선수로 함께 뛰었고, 대회를 앞두고 같이 합숙도 했던 깊은 인연이 있다. 부산 수정동 태생의 단광은 전문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림 그리기를 익혀 화가로 성공했다. 그는 소학교를 마치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10대 후반에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다 임응구林應九 화백을 만나 처음으로 ‘유화油畵’를 접했을 만큼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단광은 부산 토박이의 삶을 살아간 화가로 오직 부산에서 자신의 미술세계를 승화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1934년 수정사립보통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기장중학교장 등 평생을 교단에 서면서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단광은 신창호申昌鎬 화백과 1967년 출범한 부산일요화가회의 지도교수로 매월 1, 3주 야외스케치 활동을 줄곧 함께 했다. 단광은 술과 담배를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간판가, 혹은 영화관 마네킹 화가들이 주가 되어 미술전이 개최되던 시절이었다. 우신출 화백은 8절 백노지 다발을 옆에 끼고 다니면서 거리에서 혹은 열차 속에서나 눈 깜짝할 사이에 그려버리는 속필로 하루에 수십 장씩 그려낸다. 마다리에 아교풀을 먹인 사제 캔버스에 유채로 그림을 그렸다.
우 화백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 그는 참 교육가로 취미로는 만돌린 연주가 일품이었다. 나와 만날 때면 차를 마시기보다는 간단한 요리를 먹었다. 남포동 ‘부산튀김’집에서 새우튀김을 먹고 나오는데 한 청년이 담배꽁초를 길바닥에 버리자 그는 말없이 그것을 주워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말없이 모범적 행동을 하는 그의 바지 주머니에는 담배꽁초가 한 주먹이나 들어있었다. - 천재동 회고록, ‘위의 책’
2007년 6월 15일 크라운호텔에서 증곡 천재동 회고록 『아흔 고개를 넘으니 할 일이 더욱 많구나』 출판기념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평생을 한결같이 우리 시대의 참예술인으로 살아온 증곡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하객들에게 인사말을 했다. 그로부터 한 달 열하루만인 2007년 7월 26일, 증곡은 아흔 고개를 넘어 할 일이 더욱 많다는 그 ‘일’을 남겨놓은 채 9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떠나갔지만, ‘광포동’ 곳곳에 남겨놓은 예술혼과 낭만의 자취는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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