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소 문
호소인: 서진문 외손자 천영배
주민등록 번호:
주소: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성지로 72번길 17-1(초읍동)
전화: 010-6215-1401
울산동구 주민의 행복한 삶을 위해 불철주야 분주하신 홍유준 의회 의장님께 호소합니다.
독립투사 서진문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또 하나의 산지인 울산 동구 일산동 출신으로 울산 동구 구민들이 자랑 할 만하며 우리가 그의 뜻을 기려야 할 역사속의 인물입니다.
동구청에서 시행 중인「화정공원어울림문화센타」건립에 있어 기존 독립유공자 서진문 묘소 주변 자연경관과 조망권이 훼손되어 심히 염려가 됩니다.
현재 우리나라 독립유공자 서진문 묘소가 시설과 보살핌 면에 있었어 가장 외면당하는 편이며 서진문은 일제의 고문으로 목숨마저 빼앗기고 해방 후 지금도 조국으로부터 홀대받고 있다고 사료됩니다. 일반인들의 묘소도 전통양식에 준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그 가문의 자랑이요 긍지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화정공원은 면민이 한 마음으로 성대히 서진문 장례식을 치르고 이곳으로 시신을 운구하였던 상여에는 서진문의 시신뿐이었겠습니까 면민들의 일본에 대한 분노와 독립에 대한 열망 그리고 나라 잃은 서러움의 뜨거운 눈물이 함께 녹아 잠들어 있는 당시의 「면민공원」이라고 저는 감히 주장합니다.
고 독립투사 서진문은 이십대의 나이로 그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적(敵)인 일제의 심장부에서 재일조선인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면서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밝혀지지 않는 모 사건으로 체포되어 살인적인 고문으로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며 천추의 한을 품고 스무 여덟 살 꽃처럼 아름다운 나이에 동갑네기 사랑하는 아내와 다섯 살 귀여운 딸을 두고 차마 숨졌습니다. 서진문 서거 당시 동아ㆍ조선 신문 보도에는 서진문을 노동운동의 선구자, 노동운동의 맹장이라 칭하였는데 이로 보아 그 적지에서의 활약상은 우리나라 어떤 독립운동가에 못지않는 인물임이 과히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서진문이 편히 잠들어 있는 도심 속의 아담한 화정공원! 꼭대기에서 공원을 둘러보면 덤성 덤성 부스럼 난 사람 머리통 같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수목을 심고 알뜰히 가꾸면 훌륭한 녹지 공간으로 주민들의 자연휴식처 역할은 물론 천혜의 허파 구실을 충분히 하리라 생각되는데「화정공원어울림문화센타」건립으로 오히려 아까운 수목마저 베어져 나가는 등 자연이 훼손되어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가 없습니다.
문화센타 건립 주변 경관을 둘러 볼 때 서진문의 눈은 막히고 숨통은 멈추고 동편 길에서 묘소를 본 시야가 편안했던 녹지 공간은 사라지고 시멘트 덩어리로 막아버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사거리에서도 서진문의 얼이 느끼기 어렵게 되고 있습니다. 저는 동구청이 문화센타 건립을 취소하거나 변경 할 것을 주장하며 더불어 화정공원을 「서진문공원」으로 명명할 것과 「성역화」하여야되는데 그렇지 못할 것 같아서 안타깝고 비통한 심정으로 의장님께 호소합니다.
2022년 2월 11일 호소인: 천영배
서진문 묘소(2022년 현재)
울산 동구청에서 앞으로 동구 화정공원 서진문 묘역내에 세울 <화정공원어울림문화센타>
ㅡ묘지를 완전히 믹아버림ㅡ
서진문 묘소 바로아래 공사 현장(2022년 2월 현재)
독립운동가 서진문 묘소가 있는 묘역 광장은 이 땅의 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산하하신 독립운동가 서진문 의사의 얼과 충효정신이 깃든 유서 깊은 곳입니다. 유족의 협의없이 일방적 설계 확정 및 시공 허가하여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으로 진행되는 화정공원 어울림 문화센터 조성은 수용할 수 없습니다.
서진문 의사(1900~1928)는 서장식과 유남련 사이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6세 때 백부 서원준과 성감동의 양자로 입적하였습니다. 서진문의 부인은 윤상필이고 그의 딸은 서정자입니다. 서정자는 천재동과 결혼하였고, 천재동은 훗날 무형문화재 18호 인간문화재가 되었으며, 천재동은 천영배를 비롯한 천영광 등 6남매를 낳았습니다.
서진문은 외사촌 성세빈과 함께 일산사립보통학교(훗날 보성학교) 설립을 도왔습니다. 1919년 서진문은 윤상필과 결혼했으며, 1920년 서진문은 명치대학교 학생이었습니다. 서진문은 귀국하면 주야학생을 가르쳤고, 부녀자들은 야간부에 많이 다녔습니다. 1922년 서진문은 유학 당시 동경을 찾은 성세빈 교장과 만나 국내외 정세를 나누었습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일제가 퍼뜨린 거짓소문으로 인해 조선인들에게 분노를 가진 일본인들이 휘두른 곡괭이에 목덜미를 찍혀 사력을 다해 사체 밑으로 숨어 들어가 깔려있으면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니 어느 병원이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귀국하였고, 1924년 무남독녀 서정자가 태어났습니다.
서진문은 여성 야학교사를 맡아 여성교육에 이바지하였습니다. 나라를 빼앗긴데 대한 한을 노래로 만들어 가르쳐 학생들이 애창하였는데, 고향생각, 적포가, 집 잃은 새, 그리운 엄마 등입니다. 서진문은 일본의 만행으로 항일의지를 굳건히 하였습니다. 서진문은 교사로서 안주할 수 없었으며, 1926년 전후하여 6회에 걸쳐 목숨을 건 일본으로의 밀항선을 탔습니다.
서진문은 일본에서 조선인 노동자의 권리와 인권을 위한 노동운동에 힘쓰며, 독립운동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고 연행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습니다. 그는 피신 차 귀국하여 보성학교에 복직되어 근무 중 들이닥친 일본경찰에 의해 어린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체포되어 가기도 했습니다.
서진문은 해돋이 대왕암 솔숲을 바라보며 “바람이 쉬지 않고 항상 불고 있을 때까지는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줄 알고, 바람이 자면 내가 죽은 줄 아시오”하며 입버릇처럼 말하였습니다. 잠시 귀국하였다가 마지막 여섯 번째 도일하기 직전에 뒷마당 채소밭 흙 담 밑에 핀 개나리를 뽑아다 부엌 뒷문을 통하여 쉽게 볼 수 있는 곳에다 옮겨 심으면서 “이 꽃이 생생하게 살아있으면 내가 살아있는 것으로 알고, 이 꽃이 시들어지면 내가 죽은 줄로 아시오.” 하였습니다.
1928년 6월 윤상필과 서정자는 요코하마에서 활동하는 서진문과 조우했습니다. 서진문은 두 모녀를 반기며 “조금 있다가 내 뼈를 고향에 가지고 가라”하였습니다. 일본 집 앞에는 일본 경찰이 감시소를 설치해 놓고 감시하였고, 모녀가 붙들여가 취조에 시달려야 했고, 빰을 몇 차례 씩이나 얻어 맞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예고없이 급습하여 집 안을 구석구석 수색당했습니다.
서 위원장이 있는 강당에 두 모녀가 가니 서진문이 단상에서 연설을 시작하였습니다. 점점 목소리는 높아지고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는 등 무언가 강력하게 주장할 때마다 군중의 환호와 박수로 장내는 용광로처럼 달아올라 그 열띤 분위기에 두 모녀가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잠시 후 경찰이 들이닥치고 집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서진문은 군중 사이로 빠져 나갔습니다.
1928년 10월25일, “일본 일왕(천황, 昭和) 어대전” 날입니다. 일왕이 꽃전차로 요코하마로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서진문은 권총을 품고 일왕을 암살하기위하여 꽃전차에 뛰어 올랐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의 위장술에 의하여 꽃전차가 3대나 되어 서진문은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어 결국 실패하고 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일본 보도에는 이 어마어마한 천황 암살 시도 사건을 숨기기 위해 서진문 예비검속이라고만 보도하였습니다. 배후인물은 누구냐? 단독 범행은 아닐 것이다. 등등으로 살인적 고문과 굶주림으로 임종 직전인 11월 16일 인력거에 실려 집으로 왔습니다. 의사를 불러보았으나 생존이 불가하다 하여 돌려보냈습니다.
11월 16일 오후 6시 노을 녘에 모녀를 찾는 서진문은 꺼져가는 한 가닥 가는 목소리로 정자야 정자야 딸 이름을 세 번 부른 뒤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목소리가 들릴 듯 들릴 듯 멀어지면서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며 한많은 세상을 마감하였습니다.
11월 21일 일본조선노동조합장으로 성대하게 장례가 치러졌는데 수백 명이 훨씬 넘는 조문객이 운집했습니다. 며칠 후 통행금지 기간 중인 밤 1시 동아일보 기자가 방문하여 서진문 의사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통금 해제가 된 후에 돌아갔습니다.
서진문 장례 후 권일성 명치대 학생이 집에 묵고 있었는데 일경들이 체포해갔습니다. 며칠 후 유치장에 갇혀 있는 권일성에게 밥을 손수 지어 달라는 부탁을 받아 윤상필은 밥 심부름을 맡았습니다. 반찬 중에는 다시마 튀김이 있었는데 다시마를 싼 종이가 동지들과 내통하는 밀서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서진문 사후에도 일경들이 여전히 철수하지 않고 감시하였습니다. 모녀는 울분을 삭이다 못하여 귀국을 결심하고 서진문 유골을 모시고 동경역에 도착하였습니다. 동경역에는 전차 3대에 가득 타고 전송 나온 동포들이 외치는 만세삼창에 모녀는 너무나 감격하여 울었고 작별의 아쉬움에 또 울었습니다.
부산항에 도착하여 다시 기선을 갈아타고 방어진항에 도착한 것이 새벽 3시였습니다. 선창가에는 남녀노소 수많은 고향 친인척과 주민들이 마중 나와서 맞이하여 주었습니다. 고향에서 아름다운 상여를 다시 만들고 전 면민 장례로 장례식을 성대히 치룰 때 그 행렬은 10리를 더 뻗었고 유골은 고향 마을 일산리가 내려다보이는 양지 바른 곳 당시 우리 산인 선산(현 화정공원)에 모셨습니다.
한 아름 크기의 일산 해석(海石) 차돌에 고 서진문의 묘 서기 1928년 동지 일동이라 성세빈 선생께서 직접 쓰신 비석은 일산마을 바닷가에서 묘소까지 고향 분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 안으시고 운반되어온 비석으로 더욱 값집니다.
1980년 재일거류민단 고국방문객을 통하여 민단 차원에서 매년 서진문 추모제를 거행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윤상필은 속병을 앓기 시작하여 3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모진 고생을 하였습니다. 1963년 무렵 꿈속에서 나비넥타이에 검정색 의료가방을 든 서진문에게 복부에 주사를 맞은 후 속병이 사라져 아흔두 살까지 아픈 곳 없이 사시다가 이승을 하직하였습니다.
2006년 독립운동가 서진문은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습니다. 사위 천재동은 울산에서 연극을 최초로 무대에 올렸고, 장모 윤상필과 부인 서정자로부터 한많은 서진문 의사의 모사건에 대해 들었고, 그의 연극세계 또한 반일, 항일연극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천재동은 울산 최초로 미술전람회를 8년간 펼쳤습니다. 또한 한국 최초의 위안부 연극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가 창작한 가면과 토우는 한국 최초의 전시회였습니다.
천재동은 2007년 아흔둘에 타계했고, 부인 서정자는 2020년 아흔 여섯에 타계했습니다.
이상은 서진문의 무남독녀 서정자 <그리운 아버지> 글입니다.
울산에 사는 지인과 천씨 문중에서 여러차례 전화가 왔습니다. 다짜고자 “서진문 묘역 광장에 건물이 들어선다며 유족이 어찌그리 무심하냐”며 나무래는 것이다. 동해선을 타고 2022년 2월 13일 묘역을 찾았습니다. 팬스가 둘러져 있었고 광장으로부터 진입하던 통로가 폐쇄되어 있었습니다. <화정공원 어울림문화센터> 조성이라는 공사 팻말이 걸려있었습니다.
화정공원 옆길로 우회하여 묘역에 예를 갖추었고 조상님께 잘 돌봐달라는 하소연하였습니다. 작년에 화장실 부근에 문화공간이 들어선다는 언질만 받았을 뿐이었는데, 묘역에서 내려다보고 네거리 모서리까지 건물로 가득 메워질 것을 생각하니 조상님께 면목이 없었습니다. 울산광역시 동구청 문화체육과를 방문하니 건축주택 담당도 배석하였습니다.
묘역 광장은 시유지였다가 2021년 구유지로 사들여졌습니다. SOC로 국고 50억 유치로 어울림문화센터를 짓기 위해서입니다. 설계안이 채택되어 시행을 앞두고 주변 정리 중이라는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건물 앞에 서진문 흉상을 옮기고 서진문 문화센터라고 명명을 검토한다고 했습니다.
교통환경 영향평가 절차를 밟았는가 반문하니 SOC사업이어서 그런 절차는 밟지 않았다고 한다. 그게 SOC 사업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무엇보다 화정공원의 정체성이다. 서진문 묘역이 그 정점이 아니겠는가? 묘역을 둘러싸고 그 일대가 성역터입니다. 묘역 광장 역시 그러합니다.
서진문 묘역은 서씨 문중의 선산이었다가 국유지로 되었습니다. 묘역 광장은 서진문 의사 장례식이 거행된 성역터입니다. 시민들에게는 독립운동의 얼을 기리며 머무는 접점 공간임에도 오랫동안 방치된 것입니다.
2018년 서진문 90주기 추모제가 시민의 공동주최로 열렸는데, 구청장이 처음으로 참석하였습니다. 2019년 3.1절 100주년 기념식은 구청 주최로 서진문 묘역 광장에서 개최되었습니다. 2019년 8.15 기념식에는 서진문 흉상 제막식이 있었고, 서진문 의사 무남독녀 서정자의 마지막 방문길이 되었습니다. 그해 11월 서진문 의사 91주기에는 화정공원 서진문공원 명명 청원 추모예술제가 시민주최로 진행되었습니다. 서진문 의사가 즐겨 불렀던 고향생각을 편곡하여 지역 가수와 어린이 중창단이 화음을 넣어 불러 감동을 주었습니다.
SOC사업으로 진행되는 어울림 문화센터는 다른 지역을 찾아야 합니다. 만약 묘역 광장에 해야 한다면 화정공원 화장실에서 화정행정센터 방향으로 조성하고, 1층은 필로티 구조로 묘역 광장과 하나가 되도록 하면 차선책이 있습니다.
묘역 북쪽과 서쪽의 도로변에 위치한 언덕은 바위 군락과 함께 경사길로 조성해야 합다. 길을 따라 오르면서 서진문 의사의 독립운동 행적을 반부조 도조(陶彫)로 조성하여야 합니다. 서진문 의사의 얼굴과 맞지 않는 흉상은 유족들로부터 외면되고 있습니다. 야외에는 왜소한 흉상보다 전신상으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삼일절, 광복절 행사는 독립운동가 서진문의 묘역 광장과 보성학교전시관과 연계하여 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독립운동가 박상진 의사는 생가와 메모리얼 공원이 조성되었고, 외솔 최현배는 생가와 기념관이 조성되어져 산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청년 서진문이 일본의 심장부 요코하마에서 거사를 펼쳐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크다하겠다. 화정공원 명칭을 《서진문공원》으로 명명하여야 합니다. 청년 독립운동가 서진문 의사의 항일 의지와 요코하마에서의 일왕 암살 미수 사건의 내막인 《서진문 모사건》 등 독립운동사를 알리고, 묘역을 성역화해야 합니다.
2022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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