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곡 천재동(1915-2007)의 부인 서정자(1924-2020) 여사가 별세한 지 넉 달이 되었다. 지난 6월 13일 97세를 일기로 돌아가시기까지 많은 곡절을 겪었을 것이다. 1924년에 독립운동가인 서진문의 딸로 태어나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재봉기술 전수학원을 수료하였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지만 조부모와 네 분의 숙부 등이 울타리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스물한 살이던 1944년에 서른 살 노총각인 천재동과 결혼했다. 신랑은 당시 모든 조건을 갖춘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는지 모른다. 신랑인 천재동은 17세(1931)에 방어진 상빈관에서 <부대장>이라는 극을 올렸는데, 이는 울산 연극의 효시였다. 그 후 193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가와바다회(繪,그림)학교에서 미술과 연극의 기초를 공부하였으며, 서울 국민극연구소도 수료하였다. 예술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운동 기량도 남달랐고, 반일 기질이 매우 강한 청년이었다. 자기 성장을 위해 노력하다보니 결혼이 늦어졌는데, 마침 서진문의 딸을 소개받자 따져볼 것도 없이 결혼했다.
아마도 두 사람의 사랑은 극진했을 것이다. 남편은 서 의사의 고명딸을 진정으로 아꼈을 것이고, 아내는 아홉 살 연상의 지아비를 때로는 아버지처럼 믿고 의지했을 것이다. 남편의 연극인 활동에 재봉 기술로 수많은 의상이나 소품을 제작하는 등 조력자 역할을 성의껏 수행했을 것이다. 친정어머니와 6남매를 건사하며, 예술인 남편과 함께한 살림살이는 어려웠을 것이다. 안 그래도 박봉의 교사 월급인데, 1970년에 남편이 전업 작가로 나섰기 때문이다. 두 분은 2007년에 남편이 이승을 떠나기까지 서로 아껴주면서 63년 동안 해로했다.
울산의 예술은 증곡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광복 후 연극연출가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46년에 <남매의 비극>을 연출하였는데, 이는 최초의 위안부 문제를 다룬 연극이었다. 일제의 잔악상을 알리는 <박제인간>도 창작하고, 순회공연을 하였다. ‘바가지탈’을 만들어 민속공예품의 가치를 한층 드높였으며, 신라 토우에 착안하여 민중들의 모습을 흙으로 빚었다. 증곡은 또 1945년부터 8년 동안 유화전시회를 가졌으니, 울산 최초의 미술전시회였다. 그는 또 84세에 400여 편의 전래동요를 채록, 동요 민속화집을 발간하였다.
증곡 일가는 서진문 의사의 유일한 유족이기도 하다. 서 의사는 임란 선무원종 1등공신인 망조당 서인충의 후손으로, 1901년에 일산마을에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남목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당시 그가 살던 방어진은 일본 수산업자들이 조선 어민들을 수탈한 현장이었다. 그는 요코하마에서 조선인 대학살 현장을 경험했고, 조선인 노동자의 착취를 보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노동운동은 곧 항일운동의 일환이었고, 동포애의 발로였다. 그의 의기는 일본 국왕 암살 기도로까지 이어져 1928년에 순국했다.
증곡 천재동과 서진문 의사에 대한 나의 관심은 2018년에 시작되었다. 관련 논문을 접하고 그해 봄에 멀티예술가 증곡 천재동을, 같은 해 11월에 서 의사 90주기 추모제 참례기를 썼다. 2018년 12월에는 극단 ‘푸른가시’에서 ‘증곡 천재동’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다. 그날 공연장에서 애제자의 부모를 만났는데, 증곡의 사촌 처남이라고 하여 반가움이 컸다. 증곡의 처삼촌 두 분이 치과의사였는데, 나의 제자도 치과의사이니 그냥 우연은 아닌 듯하다. 연극인 전우수씨가 연출한 ‘증곡 천재동’은 2019년에 두 차례 더 앙코르 공연이 있었다.
증곡의 큰아들인 천영배씨는 증곡과 서 의사 유족의 대표이다. 그는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아버지에게 토우 제작 기능을 전수받았다. 필자는 ‘증곡 천재동’ 연구자인 이기우씨와 함께 그를 서너 차례 만나 양친과 외조부 얘기를 많이 들었다. 증곡은 해방 후부터 10년간 울산에서 초등교사로 근무하다가 1955년에 부산으로 전출한 출향인이다. 그는 부산에서 중요무형문화재 18호인 ‘동래야류’ 연출 기능 보유를 비롯한 만능 예술인으로 활동한 거장이었다. 수구초심 그리던 울산으로 귀향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증곡의 예술 세계는 만인이 우러를 금자탑이다. 유족들은 증곡의 유작들이 울산으로 돌아오기를 원한다. 이런 뜻이 여러 경로를 통하여 관계요로에 전달되었지만 아직도 시작점이 보이지 않는다. 울산에는 오영수문학관과 서덕출문학관, 외솔기념관이 있다. 여기에 ‘천재동기념관’이 들어선다면 문화도시를 표방하는 울산의 이미지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단순 기념관이 아니라 증곡의 큰아들이 토우 전문가이니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친숙한 공간이 될 것이다. 이참에 울산시와 동구, 울산예술인들의 깊은 관심을 촉구한다.
이정호 수필가·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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