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남북녀
옮긴 하숙집은 다동(茶洞) 또는 다옥동(茶屋洞, 현 청계천)이라 불리는 곳에 있었는데
큰 개천가에 위치하여 네모로 지어진 전통적인 조선 한옥이었다.
주인은 동아일보사 광고부장으로 재직 중인 신(申)씨였다.
식구는 부인, 아들내외. 초등교 4학년 딸 그리고 20대 조카 처녀, 모두가 여섯 식구였다.
신 부장은 넓은 집에 말동무될 젊은 청년을 식구 삶아 방을 내주고 싶다는 말을
부하 직원에게 입버릇처럼 하면서 경상도 청년을 소원하였다는 것인데
결국 내가 영광스럽게도 선정된 것이다.
광고부장 자리는 광고주들이 광고 잘 내 달라는 뜻으로 선물을 많이 한단다,
그래서 선물이 들어 올 때는 사랑채 청마루에 상을 차려 놓고 같이 먹자는 것이다.
어느 날 굴비를 뜯고 맥주를 마셔가면서 남남북녀 설을 늘어놓는 판인데
마침 며느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을 가르키며
“저것 저년 보게, 저것이 서울 여자라네, 3년이 되었지만 아직 아이를 못나,
그게 여자여! 저년이 두 번째 며느리라네,
내가 남남북녀란 말에 따라 내 며느리감 구하려고
함경북도를 순례해서 함흥 지사장 소개로 함흥 아가씨와 결혼 시켰는데
석달도 못가서 이혼 해 버리고 제가 좋다는 대로 다시 결혼 한 며느리가
저 모양이거든,” 하는 말에는 유감스런 심정이었다.
신부장은 아는 것이 많았는데, 그가 하는 말 가운데
“서울깍쟁이는 넥타이 하지 않는 놈 없고,
대구깍쟁이는 자전거 못타는 놈 없고,
부산깍쟁이는 일본말 못하는 놈 없어,
또 있어” 하면서
살림 잘 살려면 함경도라고 할 것 같았는데
뜻밖에 경상도 처녀에게 장가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식 많이 얻으려면 황해도에, 서비스 많이 받으려면 서울 처녀라야 되,
그런데 우리 집 며느리는 서비스도 몰라” 하고는 내 손을 꼭 잡더니,
“천군! 고향은 울산이라지? 조선 팔도에 울산이 제일로 살기 좋은 고장이야,
기후 좋고, 쌀이 기름지고, 소금 나고, 금나고,
자급자족으로 살기 좋은 곳이란 말이야����� 하기에
울산은 금이 아니고 쇠붙이로 유명했다고 하였더니,
“천군은 몰라 금이야, 금이란 말이야!” 하면서 고집하는 것이었다.
* 떠나기 싫은 신(申)부장 댁
다동(茶洞)하면 서울의 중심지요, 기생 동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들었다.
당시 집 앞 개천에는 물이 흘렀고 조선시대에 건설 된 돌다리가 놓여져 있었는데
옛 조선시대 사람이 된 기분으로 돌다리 위를 걷기도 하였다.
저 위 건너편에 갈색의 동아일보사 건물이 보였고,
또 저편 멀리 높고 하얀 조선일보사 사옥도 보였다.
어느 날 신부장이 “천군 요즘 밤중에 무슨 소리 들리지 않느냐?”하여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더니,
요즘 조카 년이 밤중에 우물을 덮어쓴다는 것이다.
마당 한 복판에 우물이 있었는데 이 샘물이 이 집의 용수라는 것이다.
이어서 하는 말이 “전에 하지 않던 짓을 천군 때문에 하는지도 몰라,
조카 년은 춘하추동 사시용(四時用) 신발이 여러 켤레나 있으면서,
뭐 오후에 신을 사러 간다나, 천군 어때 예술가 눈으로
신발을 골라 주었으면 하는데 같이…….” 하고는
내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로부터 또 하나의 고민꺼리를 안게 된 것이다.
사실 낙원 같은 이 집을 떠나기가 싫었지만 도심에서 뚝 떨어진 동대문 밖 청량리로 옮겨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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