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뚝이와의 첫 만남
1981년 10월 전국민속놀이 경연대회가
계기가 되어 말로만 들어왔던 서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인천(仁川)에 처음 온 것이다.
인천에 가면
중국인이 경영하는 중화요리를 꼭 먹어 보라는 친구의 말이 생각나서
집사람을 올라오라고 연락을 하였더니
작은 며느리의 보호를 받으며 도착하여 함께
인천에서 중국인의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인천 행사를 모두 마치고 하부(下釜)할 즈음에
서울 국립 중앙 전시관에서
한국의 탈, 국보, 문화재급 전반에 걸쳐
특별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일행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서울 국립 중앙 전시관으로 향했다.
전시관에는 하회탈(원형)을 비롯해서 귀중한
고유 탈들 모두 전시되어 있는데
내가 꼭 보고 싶어 그렇게 원했던
동래말뚝이 탈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끝내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에 찾아 들어가서 담당 직원에게 문의 하였더니
동래말뚝이 탈은 바가지로 만든 오래된 탈인 만큼
파손이 염려되어 그 탈만은 전시가 금지되어 있다고 하였다.
옛날의 말뚝이 탈이 실제로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기 한량없었다.
모처럼 왔으니 보여 달라 했더니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다.
꼭꼭 가둬 놓으면 썩은 보배와 다름없지 않으냐 했더니
어이없게도 외국인 민속학자가 오면 공개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에 나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 사람이 중하느냐 우리 사람이 중하느냐면서
옥신각신 2시간이나 싸웠다.
마지못해 나는 최후수단으로 그 탈의 임자는
서울중앙박물관이 아니라 바로 내다!
나는 동래야류탈 만드는 기능보유자다.
가령 내가 보기 싫다 한다 할지라도
이 탈을 가지고 가서
고증 삶아 대대로 후계자에게 전해 주라고 해주어야 할 게 아니냐?
직접으로 간접으로 국가가 지정 해준 보유자가 왔어도
보여주지 않는 몰지각한 행정이 대관절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느냐? 며
항의하였더니 비로소 보여주겠노라고 승낙하였다.
잠시 후 직원 두 사람이 지하실에서 옮겨오는
회색의 기다란 나무상자가 아주 조심성 있게 책상 위에 놓여졌다.
뚜껑을 열고 솜 같은 것이 든 손바닥만한 봉지들을
차례차례 거두어 내니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말뚝이는 물론
예상치도 못한 양반탈 한점도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감개무량한 이 감격적인 순간의 감동은 어디 비할 데가 있을까!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한 일본인이 골동품을 가득 넣은 상자 하나를
가지고 일본으로 갈려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어느 사람에게 맡겨 두었는데 그 속에는 한국,
중국의 골동품들과 말뚝이 같은 탈도 섞여 있더라는 것이다.
그 상자를 맡았던 사람은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으로 생각하여
경주박물관에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다.
『부산시립민속예술관』관장 재임 당시에
혹시 말뚝이의 원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지인(知人)인 민속사진작가 박진주(朴珍柱)와 함께 경주박물관으로 향했다.
찾아간 연도와 날짜는 기억에 없지만 마침 박(朴)관장이
석굴암 가는 토함산 길을 처음으로 포장하여
개통식 행사에 참석하기위해 공석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그리고 일년 후 기회가 있어 박씨와 다시 경주로 갔다.
그때는 이미 박 관장은 타계하시고
서울에서 새로 부임해 왔다는 관장을 만나 뜻을 이야기 하였더니,
관장의 말이 “나는 부임해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그 상자가 자물쇠로 잠겨져 봉인이 찍혀 있는 관계로
임의대로 열고 닫을 수 가 없다”하였다.
일단 단념하고 건물 밖으로 나와
경비원 한 분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가운데 탈 이야기를 하였더니,
여러 번 다녀간 사람 중에 상자 뚜껑을 열고
탈 사진을 찍고는 자물쇠에 봉인을 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S 대학교 민속학자 L 교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교수로서 특히 우리 민속을 널리 보급하고 계승시키는
책임자의 위치에 처한 민속학자가 민속자료를
개인 소유 인양 말뚝이 탈을 감금해 놓고
책임 있는 전문가까지도 볼 수 없게 숨겨 왔던 것이다.
나는 과거 경주박물관에서 이미 보았어야만 되었을 탈이었지만
지금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다행으로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약간은 씁쓸한 심정이었다.
양반탈은 송석하 선생의 유고 사진과 똑같았는데
면상에 실밥만 남아 있고 눈썹과 수염은 없었다.
말뚝이는 L 교수만이 내놓은 사진과 꼭 같은,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말뚝이 탈이었다.
사진을 찍으려 하니 한 컷에 4000원씩 받아야 된다고 하였다.
사진 값이 문제냐! 속속히 관찰하고 사진 촬영도 했다.
촬영 값을 주겠노라 하였더니 차마 받을 수 있겠느냐면서
사양함과 동시에 대하는 태도가 더욱 부드러워 졌다.
지금도 그때 찍은 사진을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이 말뚝이 탈은 1930년대 탈로써
안쪽에 김용우(金鎔佑) 작(作)이란 서명(書名)이 분명히 되어있으며
현재까지 발표된 동래 말뚝이탈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앞에서도 기술하였지만 이렇게 발굴하고 고증 받은 말뚝이 탈을 부정하고,
눈이 막혀 있는 등 현재 사용하는 말뚝이를 고집하는
동래『민속보존협회』의 처사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설령 과거 사람들이 말뚝이 눈을 뚫지 않고
막힌 채 사용했다 하더라도
오늘 날에 와서는 편리성과 기능성을 감안하여
눈구멍을 뚫어야 진보적인 발전인데,
하물며 과거에 뚫린 눈구멍을 막아버렸으니
이것은 조상들이 이룩하여 놓은 수준 높은 문화를 오히려 퇴보시켜버린 결과가 된 셈이다.
각고의 노력으로
중앙국립미술관에서 찾아낸 동래말뚝이(1981년 10월 25일 촬영)
1930년대 故 金鎔佑(김용우)선생 작품. 서명이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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