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서울에서 동경(東京)으로
·서울에서의 결심
유복한『천호방네』둘째 손자로 태어나 호의호식하며 사람들에게 귀염도 받고,
대접도 받고 집안 어른들은 명이 길라고 양모를 세 분이나 인연을 맺어 주었다.
나는 신장 178㎝, 체중 70㎏, 상체보다 하체가 긴 체격으로,
옛날의 보통이 아니었고 “제비”라는 별명으로 육상과 축구 그리고 야구 선수로 활약하면서도
그림과 연극에 대한 열정도 키워 나가던 중,
1939년 스무 넷의 나이에 처음으로 상경(上京)하여 서울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방어진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에서 받은 충격은 엄청 컸다.
내가 무엇이며,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자문하면서 동경(東京)에 가서 공부해야만 되겠다는 결심을 비로소 하게 되었다.
방어진 경찰 주재소에서 도일(度日) 증명서(證明書)를 받아,
부산(釜山) 제일부두(第一埠頭)에서 연락선을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방송을 통해 “반도인(半島人)은 증명서를 오른손에 쥐고 높이 드시오!”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냥 양손을 외투 호주머니 속 깊숙이 넣고 모른 체 서 있었다.
왜 반도인은 손을 들어 표시를 해야 하는가?
고등계형사들이 손을 들지 않은 반도인 을 색출하려고 매서운 눈초리를 하고 지나간다.
볼품없는 일인(日人)들은 의기가 양양한데,
대열의 틈틈이 멋진 모습을 하고 있는 오른손을 든 동포들이
일본(日本)으로 끌려가는 죄인 마냥 생각되어
나는 정말로 분통이 터지는 심정을 달래면서 손을 들지 않았다,
시모노세끼(下關)에서 하선하여 기차를 타고 동경으로 향했다.
약엽정역(若葉町驛)에 하차하여 여관에서 일박하고 이튿날 태평양 미술학교를 찾았다.
·가와바다화학교(川端畵學校) 특설(特設) 인체과로
다이해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의 입학시험은 석고 소묘였는데 간단하였다.
학교는 네모반듯한 백색 건물이고 조그마한 운동장 북편(北便)에
평옥(平屋)의 일본화(日本畵)를 공부하는 교사(校舍)가 있었고,
교무실에 들어섰을 때 본교 설립자인 나까모라 후세츠(中村不折)가 그린
남성 나체 그림 2점이 눈에 띄었다.
밤낮 석고상만 들여다보면서 목탄으로 소묘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과거 도고 세이지(東鄕靑兒: 1897~1978)가 사사(師事)하는
실기 수업 반에 들어가고 싶어 고심하고 있던 중에
가와바다화학교(川端畵學校) 특설(特設) 인체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당장 천단(川端)으로 옮기기로 결심하였다.
천단은 학교라기보다는 거대한 미술학원(美術學園)이다.
매일 같이 몇 백 명의 미술 지망인 들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일본(日本)에서 화가가 되려면 천단(川端)을 거쳐야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특히 특설 인체과는 정원이 18명으로 하늘에 별따기만큼이나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 먼저 석고 소묘과에 들어가서 공부하면서 특설 인체과에 들어갈 기회를 살피기로 하였다.
마침 별명이 “호꾸리꾸(北陸)”라고 부르는 사무원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마음씨가 착하고 매우 친절하였다.
가끔 학교 사정에 대하여 그에게 묻기도 하면서 그와 더욱 친숙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환심을 샀다.
하루는 지도교수 호수(虎首)께서 나의 소묘 작품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자네! 석고상은 석탄이 아니야! 그러나 데생력은 대단하구나!”
칭찬하면서 석고 소묘과 야간부 조교(助敎)역할을 하겠다면 그 대신에
특설(特設) 인체과에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그렇게 쉽게 인체과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호꾸리꾸(北陸) 덕택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인체과(人體科)는 본동(本洞) 건물의 2층에 있었는데 휘 넓은 교실에 모델 대가 중앙에 있고,
아득하게 높은 천정에는 유리로 하늘을 가렸으며 커튼으로 태양 광선을 조정하게 되어 있었다.
창문마다에는 길게 비로드 천으로 늘어뜨려 외부 광선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18명이 정원이었는데 그 이유는 모델의 정면과 측면(側面) 등 둘러앉아
빠짐없는 인체구조를 그리는 데는 18명이 적정 인원이라는 것이다.
나는 일본명(日本名)이 없다. 본명 천재동(千在東)으로 통했다.
때로는 중국인(中國人)으로 오해받기도 하였는데
일어(日語) 발음이 사국인(四國人: 일본의 한 지명)발음 같다 해서
“지아리(千在)야쯔마(東)”라고 불려서 쓴웃음을 짓기도 하였다.
·무례한 두 사람
때는 전쟁 중이라 화구도 구입하기가 힘들었고,
특히 백색은 구하기가 더욱 힘들었으나 암거래로 비싸게 손에 넣을 수는 있었다.
모두는 대용품을 쓰고 있었다.
나는 고향의 형님으로부터 매월 60원씩 송금해 왔는데
담배, 술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용돈에 여유가 있는 관계로
진품 화이트가 항상 두개씩이나 화구 박스에 들어 있었다.
모델이 자세를 취해서 30분이 되면 모델 대에서 내려와 20분 동안 휴식을 한다.
다시 시작 시간이 되면 모델은 모델 대에 올라 전과 동일한 포즈를 취하고,
우리들은 일제히 캔버스에 집중하여 계속 작업에 임하는데,
정적(靜寂)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몰입되기에 충분하였다.
토요일에는 크로키를 하고, 그리고 일주일 동안의 작품을 평가받는다.
18명 속에 한국인은 있을까? 있다면 몇 사람이며, 한국 어디에서 왔을까? 궁금하였다.
나는 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한국인 인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얼굴 생김새로는 한국인을 구분해 내기가 어려울뿐더러
내색하지 않고 일본인 행세를 잘하니 알 수가 없었지만,
머지않아 두 사람을 찾아냈다.
모두들은 내가 쓰고 있는 유화용 백색 물감을 부럽게 여겼다.
대용품이 있었지만 저질인 관계로 효과를 내는데 충분하지 못하였다.
작업 도중에 간혹 “흰색 조금 빌릴 수 없습니까?” 아주 낮은 소리로 겸손하다.
“예, 쓸 만큼 쓰시오!”하면 그 사람은 필요할 만큼의 양을 짜 가는데,
내가 평소 눈여겨보아 온 사람은 나의 이해도 얻지 않고
“좃도식게이(조금실례)!”하고는 지나치게 많은 양을 불끈 짜는 것이다.
두 사람 다 그렇게 무례하였다.
·일본의 야구열풍
동경(東京)생활하던 중 먼 친척이 되는 이학수(李鶴洙) ,
동경도립공업고교(東京都立工業高校)를 졸업, 토목기사로 동경도청(東京都廳)에 근무하고 있는 한상조(韓相祚),
동경물리학교(東京物理學校) 재학 중인 김병희(金炳熙),
동양음악학교(東洋音樂學校) 작곡과(作曲科) 재학 중인 최덕해(崔德海),
그리고 김방우(金方佑)형제 등 동향(同鄕)인 외에는 아무도 교제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성공할 때 까지는 절대 금물 세 가지를 정하여 놓고 그를 멀리하면서 실천하고 있었다.
그 세 가지는 술과 담배 그리고 여자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아는 동향인 중에서 이학수, 김방우 외에는 모두 술, 담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천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어느 날 이학수가 찾아와서
자기 양모(養母)인 전촌(田村)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가운데
네가 야구도 잘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시합이 있을 때만 고용 선수로 채용할 수 없을까?
하고 알아보라는 심부름으로 왔다는 것이다.
양모 남편 되는 분은
동경도내(東京都內) 생명보험회사(生命保險會社) 연합회(聯合會)의
인쇄물(印刷物)을 전속 인쇄하는 활판인쇄공장(活版印刷工場) 사장의 동생이었다.
본 연합회(聯合會)에서는 회사끼리 친목 야구시합을 종종 개최하였다.
회사들 중 제일생명(第一生命)에는 투수가 없어 고심하던 중에
내가 야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청탁이 들어온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야구인지라 승낙하고,
궁성 앞에 자리 잡고 있는 백색 네모 반질한 고층건물 제일생명사옥을 찾아 갔다.
그날따라 몹시 무더워서 땀에 온통 젖은 몸으로 커다란 현관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순간
충격적인 한파(寒波)에 되돌아 나와서 잠시 마음을 추스른 연후에 다시 들어갔다.
훗날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에어컨 효력이었다.
면담 결과 합격이 되었는데 이를 연유로 하여 나의 하숙소를 이학수 양모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동경(東京) 후락원(後樂園) 유원지에는
정구(庭球), 야구 등의 운동장 시설이 잘 되어 있었는데
야구장만 해도 20개소나 된다 하니 당시 일본의 야구에 대한 열기는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구장을 한번 빌리려면 몇 달 전에 신청해야 한다고 하였다.
·담배선물
실기수업 도중 20분간 휴식하는 동안에
열일곱 학생들은 한자리에 모여 앉아 제작 중인 작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가면서 담배를 피운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는 외진 곳에 앉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본다.
연기는 서로 엉켜 한 덩어리가 되어 높은 유리 천정으로 뭉게뭉게 올라가는데
그 모양들이 기이한 자연현상처럼 변하여 나를 사로잡고,
저쪽에서는 천으로 나체를 감싸고 독서삼매에 빠져 미동도 않는 모델,
실내는 이 순간이 삼위일체가 아니라 삼인삼체로 기현상이다.
이렇게 매일 반복되는 가운데, 내 꼴을 가엾이 생각했는지
하교시에 꼭 한번 만나자는 한 동료학생의 청탁으로 그를 따라 간곳이『 라이온 생맥주홀』이었다.
두개의 업소 입구에는 이미 여러 계층의 남녀들이 줄을 지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학생은 건물 뒤로 돌아 한 문을 두드리니 조그마한 구멍문으로
누군가 내다보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더 없이 넓은 홀에는 자욱한 담배 연기와 맥주 냄새
그리고 주객들의 대화하는 소리들은 흡사 벽속에서 흘러나오는
귀신들의 속삭임으로 상상을 불러일으킬 만큼의 인상을 주었다.
잠시 후 액체로 가득 채워진 1000cc의 그라스 두개가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이윽고 학생은 한 갑의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놓으면서
지금부터 담배를 배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따로 준비한 담배를 채운 케이스를 나에게 내밀며 선물이라고 하였다.
일본 풍속으로서는 사나이 “하다찌(20세)”가 되면 부모 앞에서 피우게 되는데
당신은 담배를 못 피우고 외롭게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측은(惻隱)하여
담배 피우기를 권한다고 하였다.
담배에 불을 댕겨서 건네주면서 한 모금 빨고,들이 삼키라는 것이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분위기에 주눅이든 상태에서 한 모금, 한 잔에 그만
심한 생기침과 함께 숨이 차서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와 버린 것이다.
하여간 이 일로 해서 급기야는 애연가로 출발했는데
그 때 내 나이 26세. 결국은 신념 하나가 깨진 것이다.
·어느 날의 나들이
어느 일요일 점심을 먹고 바깥에 나가 포플러 가로수 밑에 숨어서
식후 담배를 몰래 피우다가 그만 이학수의 양모(養母)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여보 여보! 천(千)상이 건방지게 담배를 피워요!”해서 집안은 큰 소동이 일어났다.
야구로 인해, 이 전촌(田村)댁의 식객이 되어 한 식구처럼 대우를 받아온 것이다.
“천(千)상이 어른이 되었으니, 여보 한 잔 대접해 줘요.”하고
남편이 전촌(田村)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그날은 저녁을 먹은 후 새 옷으로 갈아입고 바깥주인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 나섰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맛있는 음식들을 맛보면서 11시경에 들린 곳이
창녀 가(街)에 당도하였다.
“오이 천군! 우리 술도 한잔하고 청루(靑樓)에 올라 놀다 가자!”
하기에 나는 질색을 하여 먼저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의 부인은 부인대로 놀라는 것이다.
“내일 아침에 올 것이지 왜 벌써 왔느냐?”면서 꾸짖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부인을 쳐다보면서
내심 우리들의 풍습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한 번 더 느꼈다,
다음 해를 맞이하면서 야구도 그만 두고,
나는 자취 생활을 해 볼 생각으로 그동안의 배려에 감사드리고 그 집을 떠났다.
·정을 주지 않으려고
1942년 강세를 부리던 일제(日帝)는 전세가 기울어져 가는 판이어서
모든 필수품은 배급제로 통제 되면서 일본(日本)전역이 암거래 세상이 되었다.
나는 판교구(板橋區) 임정(林町) 전셋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옮겨간 아담한 기와모옥(母屋)에 서남 방향으로 이어 지은 자옥(子屋)이 있었다.
자옥은 일용품 가게로 모녀(母女)가 경영하고 있었다,
남편 되는 주인은 어느 회사 수위로 상주(常住) 근무하고 있는 관계로
본채인 모옥은 텅텅 비워져 있는 상태여서 내가 전세 20원을 내고 독채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식량 배급은 어김없이 꼭꼭 정해진 날이면 배달되어 왔기 때문에
자취 생활에 아무 불편 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큰 사건(?)이 발생하였다.
아침밥을 가스 불에 안쳐 놓고 그만 잠이 들고 만 것인데,
잠결에 들리는 고함소리와 대청마루를 뛰어오는 소리에 잠을 깨어 정신 차려 보니,
모녀가 먼저 가스 불을 끄고, 코를 찌푸리며, 아이고 밥 타는 냄새야 한다.
사실은 냄새보다도 화재로 번지지 않은 것이 다행스런 일이었다.
손수 밥 지어 먹고 생활할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자취 생활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이 밥 짓고, 상 차리는 일은 우리가 같이 해 줄 테니 배급품은 우리에게 마껴라 해서,
그날부터 나는 편안한 식객(食客)이 되고 말았다.
귀가 해 보면 방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고,
간혹 가다가 사과 한 개가 책상 위에 놓여져 있지를 않은가,
한 개의 사과지만 그때는 매우 귀한 과일이었다.
부부 내외와 무남독녀인 딸 그리고 나 모두 네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한 상에 밥을 같이 먹고 하다보니 날이 갈수록 정이 들었는지
그들이 나에게 대하는 인간애의 도가 점차로 높아져 가기만 했다.
이러다간 나는 장차 일인(日人)이 되고 말 것이 아니냐고 생각이 들어서
이 집에도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집에서 멀지 않는 곳에 파출소가 있었는데
나이가 지긋한 한 경관은 평소 내가 등·하교 시에 자연스럽게 자주 얼굴을 마주치곤 하였는데
어느 날 그 경관은 나에게 하는 말씀이
“네 내 말을 귀담아 들어! 이 전쟁은 아국(我國)이 패한다.
요즘 동경에서는 10만 명의 징용자를 적발 중에 있어
자네같이 화구 박스를 어깨에 메고 다니면 위험하니까
조심하고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거다!” 라고
친절하게 일러 주었을 때 비로소 나는 이사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청루(靑樓) 구경
얼마 뒤에 나는 홍고구 긴수깨쬬(本鄕區金助町)로 방을 옮겼다.
고교(高橋)란 성(姓)을 가진 사람의 집이었는데
남편은 천엽포병현역(千葉砲兵現役)으로 본토 방위로 근무하는 관계로 집에는 없었다.
나와 동갑인 부인은 가내 양재업(洋裁業)을 하였고
국대(菊代)라는 미혼 여조카 아이와 심부름하는 어린 하녀 아이,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남자 식구가 없어서 그런지는 세 여자 모두가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이집 바로 앞에 유명한 「오짜노 미쯔바시 (ぉ茶の水橋)」란 다리가 있고
서북쪽 저 건너편에 니고리이탑(塔)의 거대한 초록색(草綠色)지붕이 보인다.
배급품 대신에 식권으로 교환 했다.
식권 한 장으로 하루 세끼씩 먹게 되어 있어,
한 장이라도 소홀히 취급하면 하루 끼니를 굶어야 한다.
한창 식욕이 왕성한 때인지라 사실은 배가 자주 고팠다.
당시에 배급제가 되자 가정집 식당업소가 많이 생겨,
온 식구가 종사원이 되었다.
내가 단골로 드나드는 식당 딸이 무슨 영문인지
구석 자리에 나를 앉히고는 밥과 반찬을 큰 그릇에 담아 주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이것을 알게 된 고교(高橋)부인은 나를 놀려댔다.
하루는 고교부인이 나에게「요시하라(吉原)」에 가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길원(吉原)이라면 강호시대(江戶時代)로부터 이어온 그 유명한 전통 유흥가로 알고 있던 나는
뜻밖의 물음에 흥미를 가졌었다.
오늘 하교 길에 천초지하도(淺草地下道) 남문 입구로 오라 했다.
그리고 당부하는 말이, 가보면 알지만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온단다.
청루(靑樓)마다 한두 명의 「규스께(牛助)」가 현관 입구에 서 있으니
한부로 쳐다보지도 말고, 말도 걸지 말아야 한다면서,
만일 그네들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을 때는 품속의 비수가 가만있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규스께(牛助)란 창녀가에서 안내와 질서를 유지시키는 역할이 주업이면서 호객도 하는 자들을 일컫는다.
말을 듣고 보면 목숨을 걸고 창녀를 구경해야 된다는 말 같아서 무섭기도 하였고,
또 일본은 성이 개방된 나라라고 하면서도 이럴 수가 있나?
하는 생각에서 나는 더욱 호기심을 가지고 하교하면서 약속된 장소로 갔다.
그런데 처녀인 국대(菊代)도 거기에 와 있는 데는 놀랐다.
요시하라(吉原)에 들어서서 첫인상은 「일본시대극(日本時代劇)」에서 본 그대로였다.
일본의 예복(禮服)인 「하오리하까마」차림의 우조(牛助)들이 선수(扇手)로 멋을 부리며,
예(禮)를 갖추어 구경꾼 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요사이 말하는 관광객이라 할 수 있는 구경꾼들은 주로 늙은 할머니들이 많았고
심지어 아이들 까지 섞인 말 그대로 남녀노소가 무리 지어
이 청루(靑樓), 저 청루(靑樓)를 들락날락 구경하느라 몹시 붐볐다.
나도 현관문을 들어서서 보니 왼쪽에는 창녀들이 그들 고유의 의상으로 갖추어 입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자신이 선택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듯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고,
오른쪽 벽에는 창녀 사진들이 게시되어 있었다.
·산제(山祭)
우리 특설 인체과 동료 몇몇이 북륙청삼현(北陸靑森縣)으로 사생 여행을 갔다.
주로 산음도(山陰道)란 동해(東海)로 접한 국도를 걸었다.
이 길은 옛날 성주(城主)인 대명(大名)들이 가마를 타고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세를 과시하며 행차한 길로써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고송(古松)들이 볼만했다.
홍전시(弘前市)를 중심으로 해서 며칠을 보내다가 대악(大鰐)온천장(溫泉場)에 들어서니
그곳 주민들이 축제 준비하노라고 한창이었다.
무슨 축제냐고 물어보니『산제(山祭)』라 했다.
메야마(할미산) 정상을 중심으로 산자락 둘레에 산재하고 있는 부락들이
해마다 할미를 위로 하는 뜻에서 베풀어지는 축제인 것이다.
고향 방어진에서도 일인(日人)측과 일생(日生)측에서
각각 형식이 다른 축제가 베풀어지는데 일생(日生)측의 축제는 정말 볼만하였다.
이곳 축제는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어서 나는 동료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가로지(唐牛)라는 마을 농가에 민박하여 다락에서 지내면서 축제일을 기다렸다.
이 지방의 사투리는 쯔~쯔변(辯)이라 해서 알아듣기가 몹시 어려웠는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와중에 우연히
대나무로 스키를 만든다는 북해도(北海島) 사람을 사귀게 되어 동행하면서
덕분에 주민들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히 해결되었고,
이 사람을 통해 축제에 참여할 의사를 주최측에 신청 하였더니
쾌히 승낙하면서 행사비 일금 오십 전을 지불 하라 하였다.
이 오십전은 내가 당일 사용 할 기구 만드는 재료를 구입하는데 드는 대금이었다.
축제날이 왔다.
빌려주는 의상으로 단장하고 회목(檜木)으로 곱게 깎아 만든 들것을 들고
대열 속에 한사람이 되었다.
축제는 일부 특정 사람들만이 치르는 것이 아니라 거부락적(巨部落的)으로,
모든 개인 사업은 문을 내리닫는 등 철시(撤市)해 가면서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심지어 전선(戰線)에 출정(出征)하고 없는 군인(軍人)은 사진(寫眞)을 참여시켜서까지
부락민 모두가 하루를, 말 그대로 대축제 속에서 먹고 마시고 춤춘다는 것이다.
들것을 든 젊은이들 사이사이에 처녀들도 끼어 있는데,
이들은 검은색 동전을 댄 하얀 웃옷에 검정색 몸배바지로 의상을 갖추고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콧대에 분을 칠하는 등으로 몸단장을 한 뒤
진지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산정을 향해 올라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사~에기 사에기 / 독고이 사에기 / 오야마니 가지다…….”
뜻은 알 수 없었지만 노래의 박자에 맞추어 들것을 흔들어 가면서
할미산을 향해 올라가는데, 이 마을, 저 마을의 행렬들이 모여드는 광경이 정말 장관이었다.
산정에는 여신(女神)을 모시는 신사(神祠)가 있어 모두 참배하고 음식연(飮食宴)이 벌어졌다.
음식연을 벌리면서부터 마음의 해방이 되어 즐거운 기분으로 하산하면서 또 다른 쇼가 있었다.
오늘을 위해 수개월 전부터 길러 잘 가꾼 머리와 의상은
흡사 중국 옛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동자의 모습과 닮았는데,
이렇게 분장을 한 연희자가 갈대를 담은 큼직한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소고삐를 잡고 놀아나는 동작은 실로 일품이었다.
소달구지에 탄 어린이 악대는 통수를 불고, 북, 바라를 치면서 놀아나고,
그 박자에 맞춰 모두들 열을 지어 손에 회목(檜木)가지를 잡고 춤추면서 행진한다.
밤 9시경 삼림(森林)의 신주(神主)를 모신 부락 신사(神祠)에 도착하면
오늘 행사의 끝을 고하고 해산하는데,
바로 그때 통역을 맡았던 북해도 사람이 날더러
“오이! 도래! 도래!(여보게! 잡아라! 잡아라!)”하는 것이 아닌가.
“뭘 잡으라는 것인가?” 물으니
“처녀를 잡아라”하는 것이다.
아무리 성 개방의 나라 일본이지만 이해가 안 되면서
한국과의 풍습을 충분히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는 되었다.
이날 행사가 끝나면, 남자는 여자를 잡을 수 있고,
잡힌 여자는 남자의 품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도회지에서 남자들이 원정도 오는데 이 기회에 한 여자를 잡아 여수(旅愁)를 풀어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일로 자식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지? 했더니,
시집을 갔다 할지라도 시가(媤家)에서는 신(神)이 점지한 자식이라 해서 소중히 키운다고 했다.
여인의 정조를 최고의 미덕으로 자랑하는 우리나라서는 이해가 가지지 않은 풍습이었다.
·무대인은 고구마를
어느 날 우연히 총독부(總督府) 주최 국민극 연구생(國民劇 硏究生) 모집이란 기사를 보았다.
나는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로 알고,
더블 양복 한 벌 맞춰 입고 일단 귀국하여 서울로 향했다.
관철동(貫徹洞) 조그마한 여관에 투숙하기로 하고
시험장인 휘문중학교(徽文中學校, 現:휘문고교)로 가보니
38명 선발인데 놀랍게도 무려 400명의 지원자가 응시한 것이 아닌가,
동경(東京)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큰맘 먹고 모처럼 서울까지 왔으니 시험이라도 치르는 것이 도리 같아서
시험에 응하기로 하였다.
연극인으로 선발된 사람은 연극 요인으로서
농어촌, 공장, 군대 등에 위문 공연하는 이동극단(移動劇團) 단원이 되는데
징용, 징병에서 제외되는 특혜를 준다는 것이다.
기중에는 순전히 그 특혜만을 노린 지원자가 다수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차 지필 시험에 무난하게 통과되었지만
면접시험이란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대문(南大門)뒤 태평로(太平路)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어학계(韓國語學界)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차례가 되어 강당 내로 들어가서 시험관 앞에 섰다.
일본 동경(東京)에서 맞춰 입은 양복에다
서울 명동(明洞: 당시는 本町이라 함)에서 30원(円) 60전(錢) 주고 사 신은 신조화(新造靴)의 차림인 나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 본 시험관은
“자네! 전공이 뭐냐?”고 첫 질문을 했다.
“예! 미술학교 재학 중 입니다”.
“왜 미술가가 되려고 하지 않고 무대인을 지원했지? ” .
“둘 다 하고 싶습니다. ”
사실은 400명 중 미술 전공은 나 혼자였다.
“그래?!자네 욕심이 많구나,
그러면 고구마 껍질을 먹을 줄 아느냐?”
상상 밖의 질문에 나는 당황해서 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설명을 조용히 해 주셨다.
“무대인은 가난뱅이거든, 오늘도 공연을 끝내고 하숙소로 가는 길에,
추운 겨울이라 외투 호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는 순간 잡히는 것이 있어,
집어내어 보니 10전짜리 돈이었다. 이 돈 10전으로 군고구마를 산다.
이불속에 들어가서 고구마를 맛있게 먹고 잠을 잤는데,
이튿날 아침잠에서 깨어 보니 머리맡에 간밤에 까서 버린 고구마 껍질이 있잖느냐 말이다,
자네 같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 .
”……먹……겠……”
당시는 연극인을 무대인이라 했다.
“좋아! 아침 끼니를 때우기 위해 먹는다 말이야! 죽을 때는 무대 위에서 죽어! 자네 그런 각오 하느냐?” .
“예……”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나가!”
나는 진땀을 흘리면서 돌아서 터벅터벅 나가는데
“잠깐! ”하기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는데
“좋아! 가!” 하였다.
최종 합격자 명단은 어학원(語學院) 담 벽에 붙었는데
맨 끝에서 두 번째에 내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 훗날 극작가 오세덕(吳世德) 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지만
더블 양복을 걸치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그렇게 멋이 있더라 하고
또 발을 멈추고 돌아서는 모습은 바로 연기적 이였다고 했다.
38명을 선발하는 이유는 크고 작고, 굵고 가늘고,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잘 웃기고, 잘 울리는 사람, 이 재주, 저 재주 등등
여러 형태와 재질로 구성되어야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는 극단 하나가 만들어 진다는 것이었다.
연극사(演劇史), 연극개론(演劇槪論), 극작(劇作), 연출(演出), 장치(裝置),
조명(照明), 효과(効果), 음악(音樂), 건축(建築), 연기(演技), 무용(舞踊), 야담(野談),
가극(歌劇), 기타 등등을 6개월간 소정(所定)의 교육을 받았다.
주최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주관 극단 현대극장(現代劇場),
소장(所長) 함대훈(咸大勳), 강사(講師) 진영(陣營)은 연극(演劇) 원로(元老) 여러 선생이 출강(出講)하셨는데,
기억할 수 있는 선생은 야담(野談)작가(作家) 윤백남(尹白南), 고고학자(考古學者) 주자후(朱子厚),
무용가(舞踊家) 조택원(趙澤元), 무대미술(舞臺美術) 강성범(姜聖範),
음악가(音樂家) 이종태(李鍾泰), 성악가(聲樂家) 임상희(任祥姬),
연출가(演出家) 주영섭(朱永燮), 극작가(劇作家) 오세덕(吳世德),
배우(俳優)로선 이해랑(李海浪), 김동원(金東園), 강홍식(姜弘植),
서대근(徐大根), 전옥(全玉), 유계선(劉桂仙), 김양춘(金陽春).......
교육장소는 휘문중학교, 나는 지금도 휘문중을 모교 같은 애정을 느낀다.
교육 도중에 청강생이라면서 한 20여명이 추가되어 왔다.
그 청강생 중에 비밀순사가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의심하였는데,
그렇게 의심을 받는 청강생이 접근해 오면 “워리워리”하며, 개 부르는 구호로 또는 손뼉을 쳐서
서로 간에 신호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민족애로 굳게 단결하였다.
·좋아, 그대로 해!
연구생은 A, B 두 반으로 나누었는데 나는 A반에 속했다.
동경일대(東京日大) 예술과 출신인 허집(許執)이 반장을 맡았다.
당시 연극에서는 사투리 사용은 절대 금했기 때문에
나는 배우 되기를 단념하고 무대미술과 연출에 힘을 기울였다.
연구생 중 평양 출신 하나, 충청도 하나, 경상도의 나, 이 세 사람 외에는 모두 경기도 출신이라 했다.
수료식을 앞두고 시연회(試演會)준비에 한참이었다.
A반은 연제가『전설(傳說)』이였고, B반은 번역극(翻譯劇) 『암상(暗箱)』이었는데,
우리 A반은 주영섭(朱永燮) 선생의 연출로 연습을 하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의 연습 중, 즉 어느 산골짝에 강물이 흐르는데,
가난한 소년 뱃사공이 산골 사람들을 건너 주는 대가로 곡식을 얻어 생활하던 중에,
어느 날 서울 사람으로부터 배 삯 10전짜리 돈 한 닢을 받았다.
소년 사공은 생전 처음으로 보는 조그마한 은전을 손에 쥐고
집으로 달려가 “어매 돈!” 하면서 어머니와의 주고받는 대화 장면이 뜻대로 되지를 않아,
연출 선생은 휴식을 선언하고 쉬는 동안에,
내가 나서서, 모자(母역―유계선, 子역―허집)두 분의 양해 밑에,
그 잘 되지 않은 장면을 내 나름대로 연출을 시도 했던 것이다.
먼저 극중 인물의 성격과 분장 등을 칠판에 그림으로 그려 설명하고 난 연후에
연출에 들어갔다.
연구생들은 물론 정배우(正俳優)인 유계선 선생도 참 잘 한다며 과찬하는 가운데
한참 열을 내어 연습을 반복하고 있을 때 벼락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누가 하라 했어!” 놀라서 돌아보니 연출가 주(朱) 선생이다.
모두가 꼼짝 못하고 움츠렸다. “제가 했습니다.” 하였더니
“이 자식!”하면서 똘똘 말아 쥔 대본으로 나를 칠 듯이 팔을 높이 들었지만 치지 않았다.
한참 만에 팔을 내리면서 “좋아, 그대로 해!” 하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박수와 환성을 올렸다.
그 후로 연구생들이 나를 부를 때는 “좋아, 그대로 해!”라 했고,
기쁜 일이나 좋은 일이 있을 때도 구호처럼 외쳤다.
내가 국민극 연구소에 남겨둔 것은 내가 고안(考案)한 뺏지와 “좋아, 그대로 해! ” 이 두 가지다.
시연회는 종로2가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성대히 개막되었다.
·동경(東京) 유락좌(遊樂座)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수료식을 마치고 이동극단(移動劇團)으로 발족하지 않았고,
모두가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다.
때 마침 오세덕(吳世德) 번역 백경정(白鯨亭)』이 부민관(府民舘)에서 공연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날더러 도와 달라는 요청에 응하여 일했다.
극단 측에서는 전차비밖에 되지 않는 월급이지만
준(準)좌원(座員) 자격으로 같이 계속 일하자는 당부였지만,
학적이 있는 몸으로 동경(東京)에 되돌아가야 한다 했더니,
그리면 유치진(柳致眞)작『흑룡강(黑龍江)』공연에 일을 봐 주고 가라고 했다.
서대문 부근 동양극장(東洋劇場)에서 막을 올렸는데
세트가 무대에 잘 맞지 않아 애써 맞게끔 손질 한다고 바쁜 와중에
임석경관(臨席警官)까지 무대에 올라와 공연을 방해하며 행패 부리던 일이 정말 잊을 수가 없다.
결국 동경(東京)으로 가게 되었는데 연극공부 더하라면서
극단 현대극장(現代劇場)과 자매 관계에 있는
동보영화사(東寶映畵社) 길본흥행(吉本興行) 『유락좌(遊樂座)』로 가라면서
소개장 까지 써서 건네주는 것이었다.
동경(東京)에 도착하여 유락좌(遊樂座)를 찾았더니
“조선(朝鮮)의 객(客)”이라면서 극장 관계자로부터『일동홍다(日東紅茶)』란
노천다방(露天茶房)에서 후하게 대접을 받았다.
나는 몇 개월간 유락좌에서 연구생 연장(延長)입장에서 공부한 것이다.
그 동안 일인합작(日印合作) 영화『나아가자 독립군』과
최승희(崔承姬) 세계일주 무용발표회를 동경(東京) 국제극장(國際劇場)에서 볼 수 있었고,
나아가 동경도내(東京都內) 수 십 소의 동보계(東寶系) 극장에는 물론,
동보소녀가극장(東寶少女歌劇場)에도 무상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특혜 속에서
연극에 대한 지식을 넓혀나갔다.
·8년 동경생활을 접고
1943년 11월이 되자 나는 귀국 할 준비하느라 서둘렀다.
출발 앞날 고교(高橋)부인께 그 동안의 고마움에 감사드리고
작별의 인사를 했더니, 부인은 내 손을 꼭 잡고 눈물 지우며 세 가지 소원을 받아 달라는 것이다.
첫째는 차(車)속에서 먹을 주먹밥이고,
둘째는 우리의 정성이 담긴 손수건,
셋째는 국대(菊代)양이 동경(東京)역까지 환송할것,
이상 세 가지 마음의 선물을 받아 달라는 것이었다.
감사히 받겠다고 했다.
그날 밤 부인과 국대는 보자기만큼 큰 회색 실크천의
가장자리 안쪽 실오라기를 정성을 다하여 빼고 또 뺀 그 실오라기로 다시
가장자리 틈새를 꿰매어 장식을 한 손수건을 만들었고
심부름하는 소녀가 한 되 병에 현미(玄米)를 넣어 손수 막대기로 찧은 백미(白米)로
가족들은 주먹밥을 만들면서 헤어짐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이튿날 아침 동경 역에서 국대(菊代)의 환송을 받으며,
8년간 생활 해온 동경(東京)을 떠나 고국에 가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실고 하관(下關)을 향해 달린 것이다.
하관 연락선 부두에는 승선하기 위해 자리를 깔고 몇 날 며칠을 기다리는
비참한 군상(群像)을 보았는데,
이 군상은 한(韓). 일(日) 양(兩) 국민(國民) 차별이 없었다.
패전을 눈앞에 둔 참상의 한 광경이었다.
나는 운 좋게 1주일 만에 경복호(慶福號)를 탈 수 있었다.
항해 중 방송을 통해, 본 선(船)의 입항지가 부산, 진해, 마산, 여수 중에
어느 항구에 입항할지 모르니 그리 알고 이해를 바란다고 하였다.
선실 바깥에는 일체 출입을 금했다.
나는 틈을 타서 나가 봤더니 연락선 전후에 순양함(巡洋艦)이 호위하고,
구축함(驅逐艦)이 당마(唐馬)처럼 돌아다녔으며
또한 공중에는 비행기가 선회하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구명옷을 착복한 나는 무시무시한 전쟁을 귀국하는 연락선 선상에서 실감하였다.
다행히 연락선은 부산항에 입항했다.
줄곧 승합자동차로 꿈에도 그리던 고향 방어진을 향했다.
경찰 주재소에 귀국 신고해야 한다기에 갔더니
종정(宗定, 무네사다)이란 경찰 부소장이 뜻밖에 환영하면서
중머리로 삭발 하라는 것이다.
“일본에선 경관도 하이칼라 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했더니
“강요하지는 않겠다. 대신, 쌀 배급은 없다!” 해서
쌀 배급 타기 위해 부득이 삭발한 것이다.
홍고구 긴수깨�(本鄕區金助町)를 하직하고 귀국하여 얼마가지 않아
편지가 왔는데 홍고구 일대는 미기(美機) 공습으로 잿더미가 되어버렸고
하숙집도 물론 불타 버리고 주인은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가족이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며,
기꾸요(菊代) 조카 년은 백의(白衣)의 천사로 지원해서 머지않아
만주로 파견되어 갈 것이란 내용이었다.
알맞게 귀국했다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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