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작
【경남도립미술관 소장(1971년)】
11. 결혼
* 서진문 선생의 무남독녀
나는 꾸준히 선착장, 어판장 등으로 사생(寫生)하러 다녔다.
일인들은 날더러 거지 화가라니, 이 비상시(非常時)에 그림이 다 뭐냐 하였고,
초등학생들은 “스파이! 스파이!”하고 소리치면서 따라다녔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일인들은 평화스럽게 야구를 하며 즐겼는데
내가 야구를 한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어느 날 찾아와 입단을 권유하였고
야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투수와 일루수 자리에 설 것을 약속받고
유일하게 한국인 선수로 입단하여 그들 앞에 나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활약하였다.
하루는 먼저 귀국한 김방우(金方佑)친구는 날더러 결혼하라고 권한다.
좋은 처녀가 있느냐 했더니 처제 벌 되는 처녀라 한다.
어떤 가문이냐 물으니 뜻밖에도 서진문(徐鎭文) 선생의
무남독녀 서정자(徐湞子)라 하였다.
정말이지 나는 놀랐다.
서진문 선생이라면 민족교육의 장 일산사립보성학교(日山私立普成學校) 교사(敎師)였고
동경대지진(東京大地震)때 일본의 만행에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났으며,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 심사위원(審査委員)과
집행위원(執行委員) 그리고 1928년에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제4회 대회에서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총괄하는
지휘부라 할 수 있는 신중앙위원으로 선임되는 등
20대 불굴의 투지로 항상 재일동포(在日同胞) 노동자(勞動者)들의
권익을 위하여 일제(日帝)에 저항(抵抗)하였으며,
1928년(昭和元年) 천황(天皇)이 소위(所謂) 어대전(御大典) 축제 식장에
꽃전차로 참석한다는 정보를 탐지하여,
단독으로 천황을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한을 가슴에 품고
이슬같이 사라져간 위대한 독립투사인 그분의 외동 따님이라 길래
나는 놀라면서 “그 처녀가 코찡찡이라도 좋으니 부탁하네!” 라고 하였다.
전 육사 교수였고 전 동국대학교 학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이사장을 지낸 김병희(金昞熙 1918〜 동구 일산동)는
“서진문 선생은 보성학교 1학년 담임이었는데
수업 중에 일경에 체포되어 갈 때 따라가며 나는 울었다.
동경 수가모(巢鴨)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으로
불귀의 객이 되어 고향에 운구 해온 시신을 우리들이 장례식을 지낸 기억이 난다.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잊을 수가 없다.”고
그의 자서전(自敍傳)인 회고록(回顧錄)에서 언급하고 있다.
공립보통학교는 방어진에서 15리나 떨어진 동축산(東竺山) 밑
옛날의 동면 사무소 소재인 남목동네에 있었고
일산리에는 항일 운동가이자 서진문 선생의 매형인
성세빈(成世斌 1893~1938)선생이 사재(私財)로
1922년에 설립한 일산보성사립학교가 있었다.
성세빈(成世斌) 선생의 공덕비가 지금 고향인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리에 세워져 있으며
두 선생은 교과서 「국어독본」의 국어 국자(國字)를 일자(日字)로 고쳐
「일어(日語)독본」이라 고쳐 쓰기도하는 등으로 후배들에게
항일 정신을 심어준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오며
결국 1929년 3월 1천 5백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일제(日帝)의 탄압으로 강제 폐교되고 말았다.
1997년 9월 22일 한울 신문에 실린 기사를 대충 요약해서 보면은 서진문은
1928년 10월 25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일왕(日王) 히로히토 천황의 대관식에 참여해
암살을 기도하던 중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다고 밝혔다.
“선생은 이날 히로히토 천황이 꽃전차 3대로 위장해
가두 행진을 벌리는 바람에 암살에 실패해 현장에서 체포 되어
모진 고문 끝에 11월 16일 빈사 상태로 석방됐으나
휴우증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선생의 장례는 11월 17일 일본에서 노동조합장으로 치러졌으며
서선생은 항일운동에 열성적으로 일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울산시 동구 일산동이 고향인 서선생의 시신은
당시 일본 구보산(久保山)에 묻혔으나 일경(日警)들의 감시 때문에
가족들이 그 해 동구 화정동 월정산 서씨 문중산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안치되고 있다.
울산 향토사연구회는 서선생의 항일 운동 내력을 밝혀 국가보훈처 등에
서훈을 인정받기 위해 당시 구속 수감 되었던 일본의
고도부기경찰서(壽警署) 등지에 수사일지 기록 등의 협조를 요청해 놓고 있는 상태이다
일본 본토에서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는 사건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엄청나고 어마어마한 사건이라
그들은 수치라 생각하고 처음부터 쉬쉬하고 사건을 은폐(隱蔽)하기 위해서
살인적 고문을 하였던 것으로 유족은 말한다.
생존시에 특별 감시 대상 인물이라 지목하여 자택 대문 앞에
감시소를 설치해 놓고 일거일동을 감시했으며 사후에도
유족들이 귀국할 때 까지 감시소는 유지되고 있었다 한다.
* 예배당에서 승려가
친구 김방우는 내 사생활을 누구보다도 너무나 잘 아는 터라
신랑감으로 나를 선택한 것이다.
양가의 양해로 선을 봤다.
장모될 윤상필(尹相必) 여사는 고인의 유지를 받아
가난한 생활을 고생으로 생각지 않은 아주 겸손한 어머니로서
부군의 유녀인 정자(湞子)를 꽃같이 나비같이 키워 온 것이라 한다.
당년21세 일본(日本) 대판부(大阪府) 지전시(池田市) 모 양장 기능학교 출신이다.
모녀 단 둘이 사는데 당시의 혈통으로는 지인어장(地引漁場) 주인인
큰 삼촌 서진화(徐鎭華)씨, 둘째 삼촌 진택(鎭澤)씨, 셋째 진규(鎭圭)씨,
넷째 진호(鎭昊)씨, 셋째와 둘째 삼촌 이 두 분은 치과의로
진규씨는 서울 종로2가 대성치과병원을 경영하였고,
진호씨는 울산시 성남동에서 울산치과의원을 경영하였으며 막내로 고모 한분 서끝매이다.
이 서씨 집안은 우리 선친 때부터 교제가 있었고 진규씨는 모교의 선배요,
진호는 나와 동갑이고 친면도 있는 사이로 양가 간에
서로 불편한 점 없고 순조롭게 혼사가 진행되어 결혼 날짜까지 정해졌다.
당시 결혼식이라면 비참했다.
신랑은 국민복이라 해서 군복(軍服) 비슷한 차림이고,
신부는 가장 화려한 차림으로 장엄한 식장에서, 하객의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몸베라는 것을 입고 우리 민족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본 신사 앞에 서서,
신주(神主)가 흰 종이를 붙인 대나무를 두 사람의 머리 위에 휘휘 저어 흔들며
무언가 중얼거리면서 결혼을 성사 시키는 것이다.
장인 될 사람은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비밀 속에 모진 고문으로 살해당했다.
내 어찌 그분의 유녀(遺女)를 일본(日本) 신사(神社) 앞에 내 세우랴.
이런 생각에서 신식 결혼식을 계획하고,
신랑을 보좌하는 우인 대표 김방우(金方佑), 김주호(金周昊),
정세기(鄭世基), 우해용(禹海龍)들과 상의해서 착착 준비에 분주했다.
먼저 결혼식장이 문제인데 부득불 기독교 예배당을 빌리기로 하였다.
당시 일본 경찰은 예배당 정면에 일장기(日章旗)를 게양하여 놓고
먼저 예를 올린 후에 예배하라는 것이었는데,
교회 측에서 응할 수 없다, 하여 예배당을 폐문하고 있었다.
다행히 관리인으로 있던 집사 권한봉(權漢奉)은 내 친구였기에 뜻을 전하니
대찬성으로 마음껏 사용하라면서 열쇠 꾸러미를 통째로 건네주는 것이다.
다음은 연미복이다. 예복 여섯 벌은 빌릴 수 있었지만,
더욱 큰 문제는 주례다. 몇 분들에게 부탁을 했지만
신변의 위협을 예상해서 안타깝지만 거절했다.
결혼 날은 임박한 데도, 오늘도 예정대로 야구 연습하러 나갔다.
마침 코치인 고야산(高野山) 주지승려(主持僧侶)가
“어이 천군 자네 결혼 한다던데?”
“예 내일 모렙니다”
“우리들 축하 가야 겠군”
“그런데 아무도 주례 서줄 사람이 없어 어찌될지 모르겠어요!”
“뭐 주례가 없어? 그렇다면 내가 서지”
그 승려 코치가 주례 서겠다는 말에 번개같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예감!
오라! 고야산 이라면 명사(名士)중의 명사다.
일인들 신임의 제일인자(第一人者)다.
고야산만 주례서준다면 어떤 놈도 방해할 수 없으니 말이다.
신사 앞이 아니라는 이유로, 어떤 희생이 따를지라도
일인(日人) 명사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다.
주례를 정식으로 부탁하여 승낙을 받아 낸 것이다.
경남자동차부에서 승용차 두 대도 대절 계약했다.
1944년 음력 정월 25일 결혼하는 날이다.
신부는 손수 만든 드레스, 연미복의 신랑과 6명의 우인 대표들은
두 대의 승용차에 몸을 나누어 실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서 식장으로 가는 길에.
아니나 다를까 일인들은
“이 비상시에…….”
“……비국민…….”하면서
손가락질과 함께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
깨끗이 청소가 된 예배당에서 일인(日人) 승려(僧侶) 주례(主禮)하에
신랑 천재동과 신부 서정자의 결혼식이 하객들의 축복 속에 무사히 식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한 참 찍은 중인데
소녀 하나가 달려와서 하는 말이
“권한봉(權漢奉) 집사가 몽둥이를 들고 신랑 때려죽이려고 온다.” 면서
빨리 피하라 한다. 과연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한 처사다.
기독교 교회에 승려를……. 그것도 일인 승려를…….
교회당을 욕되게 한 것 같아 죄송스러웠다.
교회를 빌려준 집사의 입장에서는 당연 처사다.
집사 권한봉은 본래 깡패 근성 때문에 그 못된 심보를 고치기 위해 신자가 되었는데,
한번 흥분하면 근성이 나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는 터라
혹시 분위기를 해칠까 봐 촬영도 중단하고 일행들은 급히 해산하도록 하였다.
신랑과 신부는 목장리(牧場里) 친척집으로 피신하여 결혼 첫날밤을 보냈다.
훗날 권한봉은 “내가 어이 자네를 치겠나, 딸아이를 시켜
빨리 교회당을 비우게 하기 위해 그런 방법을 쓴 거지”하면서
속 시원히 웃는 것이었다.
나는 모녀 둘만 살고 있는 비록 조그마한 집이었지만 처가살이를 하는 것만이,
나이 드신 외로운 장모님을 돕는 길이라고 판단을 해서,
형님께서 마련 해주는 2층집을 마다하고 처가살이로 들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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