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어린 날의 기억들
방어진은 동, 서, 남, 북, 중앙 5구(區)로 구분하여 동쪽은 김씨가 촌장으로 김동촌(金東村)이라 불렀고, 서쪽은 황씨가 동장으로 황서동(黃西洞)이라 부르고, 남동네, 북동네 그리고 중앙은『천중리(千中里)』라 하였는데, 우리 아버지가 천중리네로 다섯동을 모두 통솔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우리 집은 서동 구역에 속하여 있었지만 중앙의 중리(中里)를 맡은 것은 위 조상님께서 1640년경 이곳 방어진에 정착한 이후부터 그만한 덕망을 쌓아왔기 때문이란다. 깊은 뜻은 알 수 없으나 할아버지 때부터 “천(千)호방네” 라는 존경의 호칭(呼稱)으로 불리는 자랑스러운 가문이었다.
1915년 음(陰) 2월 그믐 늦저녁에 3대 독자로 내려오던 “천호방네” 댁에 일대 경사가 벌어졌다. 4대째 왔어야 비로소 “ 천호방네” 댁에서는 둘째 손자(孫子)가 탄생한 것이다. 아버지는 영양(潁陽) 천씨(千氏) 군수파(郡守波) 15대손으로 수(壽)자(字) 복(福)자(字)요, 어머니는 경주(慶州) 김씨로 두(斗)자 남(南)자다, 아버지 16세 어머니 18세 때 결혼하시어 16대손 장남 일동(一東), 장녀 귀미(貴美), 어머니께서 세 번째 임신하였을 때 남아냐? 여아냐? 알아보고 싶어 용하다는 점쟁이를 팔방으로 찾아 점쳐 보았을 쪽쪽 남아(男兒)라는 점괘에 집안 어른들은 기뻐하여 산모에게 보약을 많이 먹게 하고 건강한 손자를 낳게 해 달라고 대왕암 수중릉과 직결되는 월봉사(月峰寺)에 참배하면서 소원한 덕택으로 난산이라는 어려움 끝에 남아를 낳았다. 태어난 아기는 보약 기운으로 인해서인지, 팔 다리가 붙은 고무풍선 같았고 동네 사람들은 출산을 축하 하려고 왔다지만 실상은 산아(産兒) 구경하러 온 것이다. 여러 축하객 중에 태주네 아주머니는 자기 집 바로 앞에 있는 우리 밭 한 마지기를 붙여 먹고살았는데 산아를 보고 “아이가 아니라 호박 동이를 낳았다” 하였는데 이 말을 전해들은 아버지께서는 노발대발 남의 귀한 자식을 모욕했다고 야단을 치는 판에 태주 네는 남편인 박생원과 함께 와서 마당에 꿇어앉아 사과했는데 심성이 착하다 해서 즉석에서 집 앞 한 마지기 밭을 무상으로 줬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본성이 본래 이렇기 때문에 돈을 빌려 간 사람에게 차용증서(借用證書)만 받았지 돌려주면 받고 안줘도 독촉 한번 한 일이 없다 한다. 2녀 기화(奇花), 3녀 기봉(奇奉) 우리 형자(兄姉 )는 2남 3녀로 무엇 하나 어려움 없이 항상 즐겁고 행복하였다.
우리 집은 이웃과 다름없는 전통적인 농가였다. 마당이 넓은 초가집 이였는데 집 둘레는 소나무 가지로 엮어 만든 울타리, 대나무로 엮어 만든 삽짝문, 울타리 바깥에는 디딜방앗간이 있었고 타작마당에는 몇 동의 볏가리가 철이 되면 쌓아졌고 그곳은 우리 꼬마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이 집에서 누이동생 기화가 태어났고 막내 누이 기봉은 딴 집으로 이사해서 출생하였다.
경주(慶州)지역에 있는 우리 집 소유 전답(田畓)은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고 경주 교동 외가(外家)에서 관리하기로 하고, 화암(花岩)의 우리 선산 기슭에 있는 전답과 문전옥답으로 불리는 삼밭 골 전답은 머슴 황서방이 가꾸었다. 가을 추수 때가 되면 소작인들은 당나귀 말발에 실어온 볏섬들을 풀어 마당에 차곡차곡 쌓아올렸고 수확량을 접수 기록하느라고 제주(濟州) 출신 김생원이 그의 보좌 허(許)도령과 함께 분주히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일인(日人)의 정착과 왁싸개
우리 집 앞 도로 건너편에는 판자로 울타리를 친 8헌(八軒) 장옥(長屋)이라 해서 여덟 세대(八世帶)가 살고 있는 큼직한 일본(日本) 가옥(家屋)이 있었는데, 이 여덟 세대는 동양(東洋)의 수산왕이라 하는 임겸회사(林兼會社) 사택으로 포착선 책임자중 여덟 세대(八世帶)가 입주하고 있는 건물로, 한 세대의 재산이 2천석이라 하니, 모두 합해서 일만육천석(壹萬六千石)의 거부가 우리 집 바로 앞에 살고 있는 셈이 된다. 이 건물 좌측은 일인(日人) 주택가요, 비탈길로 조금 내려가면 울산(蔚山) 경찰서(警察署) 방어진(方魚津) 주재소(駐在所)가 있다. 앞쪽으로는 한눈에 항구를 바라볼 수 있었으며, 우측은 소위 말하는 ‘시바이고야(芝居小屋)’ 라 해서 목조 극장(劇場) 「다이쇼깡(大正舘)」이 있었는데 밤낮 없이 깃발이 펄럭이고 음악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일본(日本) 전통극인『문악(文樂)』,『가부기(歌舞技)』와 일반 구극(旧劇)들이 공연되었다. 불과 우리 집과 40미터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집안 일군들의 등에 업혀서 공연도 보고, 깃발 아래에서 놀기도 하였다. 극장이 있는 쪽은 일인(日人) 가옥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내등치과(內滕齒科), 대관공의(大串公醫), 세관(稅官) 당구장(撞球場)등 문화시설이 운집하여 나날이 번성(繁盛)하였다. 내가 3살 박이 유아(幼兒)였지만 주변 어른들에 이끌려 다이쇼깡(大正舘)을 드나들었던 추억들은 잊혀지지 않는다. 특히 ‘왁싸개’ 의 죽음은 어린 나에게 인상 깊게 각인되었다. ‘왁싸개’ 라고 불리는 늙은 여자 거지는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다가 한번씩 우리 집에 찾아오는데 마당에 들어서면 양팔을 활짝 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천호방네 떡 벌어졌다” 라고 노래하면서 마당을 빙글빙글 돌아다니곤 하였다. 그 ‘왁싸개’ 거지가 우리 방앗간에서 죽은 것이다. 매우추운 겨울밤 방앗간에서 잠자던 ‘왁싸개’ 는 추워서 불을 피워 놓고 잤지만 동사했는데 방앗간 지붕이 불에 다 타 버린 것이다. 우리 집에서 음식을 충분하게 장만해서 초상을 치르고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이웃 간에 서로 위로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동시에 방앗간을 허물어 폐쇄하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
․ 일본인(日本人)과 일생인(日生人)
우리 집 부근에는 일본인(日本人)과 일생인(日生人: 히나세진) 두 집단이 살고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께서는 히나세호갱(日生方言)을 잘 하셨다. 일생인 이란 일본(日本) 강산현(岡山縣) 히나세(日生) 지방의 사람들로 다 같은 일본(日本)사람이면서도 그들은 타 일인들로부터 천대(賤待)를 받았다. 우리도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 사람이다 해서 일생인(日生人)이라 불렀고, 일생(日生)을 방언으로 ‘히나세’ 라 불렀다. 두 집단 일인들의 축제행사 시에는 각각의 단체를 상징하는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행사에 임하였다. 일본 강산현(岡山縣) 일생(日生)이란 부락에서 도래한 집단인 『일본일생청년단』깃발과 기타 일본 각지에서 도래한 사람들로 결성 된 『대일본청년단』의 깃발인데 日生人(히나세진)들의 말을 히나세변(辯)이라고도 하여 심하게 방언을 사용하는 것으로 언어 소통에 있어서 어려울 때가 많았다.
연간 그들의 축제가 한 두 번씩 같은 날 전개되는데 양 단체 구별 없이 모든 집집마다의 처마 밑에는 조화를 줄줄이 엮어 달아 놓은 데서부터 고조된 축제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두 단체의 행사 내용은 달랐다. 『대일본청년단』측에서는 화려하게 장식한 대문을 청년들이 양쪽에서 들고 선두를 지키고, 그 뒤로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조화를 꽂은 삿갓을 쓴 기녀로 분장한 여인들 그리고 일반인들이 그 뒤를 따른다. 기녀로 분장한 여인들이 북과 샤미센(三味線)을 울리면서 전진하다가 요소마다 설치해 놓은 가설무대에 당도하면 한바탕 장기를 자랑하며 놀아나다가 다시 행진하는 등 반복을 거듭하며 진행하는 반면에 『일본일생청년단』측에서는 건장한 청년들이 양편에서 로프로 연결된 큼직한 모조 배 구조물에 화려하게 치장한 어린이들이 가득타고 북, 바라, 통수 등 악기를 요란스럽게 연주하고, 그 뒤로 치장한 남녀노소 일생 인들이 색색이 여러 갈래의 긴 천 가닥을 종대(縱隊)로 이어 잡고 파도를 상징하는 동작을 하며 각자 나름대로의 가무(歌舞) 등으로 놀아나다가 어느 구절이 되면 청년들이 로프를 당겨 배를 전진시켜는 등으로 반복하면서 동네 한복판 도로를 누비며 나아간다. 이러한 일인들의 축제 광경은 어린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평생 예인의 길로 가게 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 번창하는 중리(中里)
머지않아 우리 집은 중리로 이사를 했는데, 곧바로 동편과 남편에 ㄱ자식(기역字式)의 새로운 아래채를 짓고 큼직한 대문도 세웠다. 그때 내 나이 4살, 기미년 3월 1일 “대한 독립 만세 ” 소리가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질 때에도 우리 집 대문 바깥 좌우에 항상 놓여진, 즉 오른쪽은 음료수(飮料水), 왼쪽은 우마수(牛馬水)로 평소에 가득히 채워진 커다란 독 속의 물이 길가는 사람이나 소, 말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남향한 우리 집 큰 채의 서쪽에 있는 아래 채와 새로 지은 함석집 방이 모두 일곱이요, 그리고 큰 채와 서쪽 아래채와의 사이에는 부엌이 있었는데, 약 20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사할 수 있었고, 또한 큰 채와 새로 증축한 아래 채와의 사이에는 창고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번호를 써 붙인 대형 독 속에 여러 가지 곡식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우리 할머니는 쌀독에 팔을 찔러 보시고 쌀의 변질 정도에 따라 이 쌀은 술을 담그라, 이 쌀은 떡을 해라 등으로 술은 문네 할매, 떡은 기와네 아지매의 솜씨로 빚어내면 이웃들과 나누어 먹으면서 즐거워하였으며, 이른 봄이면 과수원이 있는 산성 골의 처자들을 시켜 채취한 산나물을 학출네 솜씨로 물김치를 담아 물에 채워 함석 아래 채 마루 위에 내 놓고 누구 든 떠먹도록 했다. 술과 떡이 있고 안주도 먹을 수 있어서 그런지 우리 집 마당에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놀았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모두가 긴장된 생활을 하였는데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만세 소식을 알고 싶어 했다. 통메우는 통장이, 솥 때우는 땜장이, 등금쟁이, 박물장수 등, 이들을 마당에다 불러들여 일을 맡기면서 만세 소식을 듣기도하고 또는 찾아 들어오는 나그네들에게도 바깥 세상에 대하여 묻기도 하였다.
우리 집 대문 앞 한길은 동서로 길게 뻗었는데 우리 집과 나란히 해서 동편은 동해병원(東海病院), 우체국, 그리고 경남승합자동차(慶南乘合自動車) 정류소, 그 뒤편에 면사무소(面事務所), 그 옆에 공동 우물이 있었으며, 서쪽으로는 합전청주조장(合田淸酒造場), 사진관(寫眞館), 중국요리(中國料理)집, 은행원(銀行員) 사택(社宅), 극장(劇場) 상반관(常盤舘), 비탈길로 내려가면 십자로(十字路), 십자로에서 서쪽 오르막으로 직행하면 금융조합(金融組合)을 지나서 서진구(西津區)에 이르게 된다. 십자로 남으로 내려가면 상가(商街)와 해안(海岸) 통으로 연결되고, 북으로 가면은 넓은 길이 나타나는데 그 길 한 복판 개천에 물이 흐르고, 이 일대가 세칭 청루(靑樓)골목이라 하여 홍등가(紅燈街)로 2층 3층 목조(木造) 건물이 즐비하여 밤낮 없이 북 소리와 샤미센(三味線: 日本絃樂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극장 도끼와깡(常盤舘)은 일본(日本) 신흥(新興) 키네마 영화사(映畵社) 개봉관(開封舘)으로 연극 공연도 겸하도록 무대가 설비되어 있었다. 내가 16세 때 자작극(自作劇)『부대장(部隊長)』을 연출(演出), 주연(主演)하여 일본인(日本人)에게는 겁쟁이 부대장으로 평을 받았지만 우리 측에서는 천재동(天才童)이란 별명과 동시에 재동(才童)재동(才童) 천재동(天才童), 방어진(方魚津)의 천재동(天才童)노래 조(調)의 구호(口號)로 환대(歡待)를 받았다. 이 극장 상반관(常盤舘) 이야말로 나의 재능을 키워 준 터전으로 평생 잊을 수가 없다.
․ 처음 본 태극기
기미년(己未年: 1919년) 대한 독립 만세가 세상을 들끓게 하였을 때쯤 하루는 소녀 한 사람이 대문에 급히 들어서더니 큰 목소리로 “수비대(守備隊)가 옵니더!!” 소리치고는 서쪽 길로 달려가면서 또 외쳤다. 오늘도 우리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러자 누구인가 우리 집 큰 채 지붕에 올라가 용마름에 꽂인 조그마한 깃발을 뽑아 똘똘 말아 처마 참새 집 구멍에 꽂아 넣고 짚 부스러기로 그 구멍을 막았다. 다른 한 사람은 나를 등에 업고 뒷산 솔밭 속으로 피신을 갔는데 그곳에는 할머니께서 이미 와 계셨고 천양궤(千兩櫃: 藥材, 문서, 현금 등을 넣는 큰 함 )도 지게에 받힌 채로 그곳에 있었다.
내가 그때까지『태극기』란 말을 들은 적도, 태극기를 본 바도 없었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어 태극기를 알게 되고부터 그때 지붕 위의 조그마한 깃발이 태극기가 분명하다고 자신하게 되니 나는 다섯 살 때 이미 태극기를 보았노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본다.
․ 과객(過客)들
걸음마 할 시기가 되었어도 제대로 걸음걸이를 못하였던 당시의 일들이 토막토막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그림 그리는 사람, 글 쓰는 사람 등 뭐 한다는 나그네들이 우리 집에 와서 3~4일간 묵으면서 꼭꼭 보답을 해주고 떠났는데, 서화가(書畵家)들은 손수 도배(塗褙)를 하고 그 위에 글을 쓰고 또 그림을 그려 붙여 주기도 하였으며, 정성(精誠)으로 제작한 작품을 다음 해에 도배하면 붙여라면서 돌돌 말아 주기도 하는가 하면 어떤 과객은 향목(香木)을 깎아서 장기(將棋) 말을 만들어 남겨 두기도 하였다, 게가 벼 잎을 물고 있는 그림, 깊은 산중 비탈길로 바랑을 멘 스님이 지팡이를 짚고 올라가는 그림, 꽃과 병 그리고 책을 그린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 등 어릴 때부터 나는 화가(畵家)들이 그림 그리는 장면은 물론, 그림을 수없이 많이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환쟁이가 되리라고 마음으로부터 다짐하였던 것이다. 집안사람들이 때로는 과객(過客)의 옷을 깨끗이 세탁하여 풀을 먹이고 다림질하여 주기도 하고, 새로 지은 옷을 선물하여 먼 장도(長途)를 진심으로 환송(歡送)하였다.
․ 양(梁)접장 서당
나는 유아(乳兒)때부터 비대(肥大)하여 앉아야 할 시기에도 앉을 수가 없어 두더기(아기를 등에 업을 때 사용하는 이불로 경상도 방언)로 똬리를 틀어 그 위에 앉혀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이리 저리 쓰러졌기 때문에 항상 내 옆에는 누군가가 지키고 있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요강 또한 내 곁에 놓아두어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언제 코피가 흘러내릴지 몰라서이다. 잠자다가도 코피로 이불을 적시는 등 쉴 사이 없이 코피를 자주 흘렸다.
여섯 살 때 큰 머슴 황서방 등에 업혀 양(梁)접장 서당에 다녔다. 양접장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옷고름을 풀어 제치고 앞뒤로 흔들면서 글을 읽는 시늉을 하였다. 나는 글을 못 읽었지만 서당 형들이 그렇게 행동을 하니까 나도 따라 한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서당까지(강아지)라고 불렸다. 서당강아지들은 천자문 혹은 통감 책을 옆에 끼고 다녔는데 솔밭을 지나 저쪽 산길을 한참 걸어서 가노라면 또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서 합전(合田)이란 일인의 밤나무 과수원에 닿게 되는데 다시 과수원 옆 비탈길을 내려가면 논이 펼쳐진다. 논두렁을 거쳐 묘가 있는 오르막을 올라가면 거기에 외로이 집 한 채가 있는데 이 집이 바로 양접장의 서당인 것이다. 일본 아이들은 자기네 일본 옷을 입고,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큼지막한 책가방을 매고 고등심상소학교에 다니면서 서구에서 들여온 신학문을 배웠다. 또한 그네 어른들은 통통 소리를 내는 기름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였으며, 큰 길을 내고 바다를 메우고, 집을 짓고 쌀밥을 먹었다. 소나무 산을 지나다니며 흔히 볼 수 있었던 특이한 광경은 소나무마다 볏짚으로 만든 사람과 말 모습을 한 허수아비를 매어 달아 놓고 그 밑에 짚신과 밥 그리고 몇 푼의 동전이었다. 이는 하나의 민속 신앙의 일종으로서 손님병(천연두)을 퍼트린 신명(神明)께서 잘 잡수시고, 신발 신고 노잣돈으로 말을 타고 마을에서 멀리 떠나기를 기원하는 우리네의 순박한 믿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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