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일본이 패전을 앞두고
* 징용, 그 죽음의 행렬
결혼한 지 달 반이나 지났을 무렵 징용의 대상에 해당되어 통지를 받고는
청천벽력(靑天霹靂)의 심정이었다.
이 징용은 새로운 이름으로 탄생한 것으로 ‘연령징용’이라고 했다.
울산 군내(郡內) 거주하는 1915년생이라면 모든 신체 이상 조건과 관계없이
무조건 징용에 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생소하게 들리는 연령징용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일제(日帝)는 또 무슨 흉계를 꾸미는 걸까?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중촌(中村)이란 젊은 일인(日人) 경찰관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제2차세계전쟁이 발발 했을 때 독일의 히틀러가 비밀리에 군국일본본토를 방문했단다.
그래서 일본군대 사열을 받았는데, 히틀러가 하는 말이
“여기 동아(東亞)의 많은 나라의 군대들이 있는데,
저편 새까만 눈동자가 불빛같이 빤짝이는 군대는 어느 나라 군대냐?”고 물었단다.
조선국이라고 일본군 장성이 대답했다.
히틀러는“그래 무서운 민족이야, 저 민족부터 먼저 잡아야 한다.”고 했단다.
그래서 일제(日帝)는 독일 히틀러가 자행한 유태인 학살 방법보다
더 좋은 새로운 방법을 창안했단다.
즉 인간 40대는 노후기에 들어가는 시기라 기력이 상실해 가는 연령이요,
20대 미만은 어려서 일본 신민(臣民) 만들기에 가장 알맞은 연령이요,
20 ~ 40사이의 왕성기 30대 청년들을 징발 시켜 탄광에 집어넣어 일을 시키고
폐광이 되면 광산을 폭발시켜 그대로 고스란히 묻어 버린다는
이 무시무시한 계획이 바로‘연령징용’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광도(廣島)를 제일 먼저 선정하여 원자폭탄을 투하 한 것처럼,
울산군을 선정한 것은 이미 면밀히 연구하여 계획된 것이라 하였다.
군민들은 이 ‘연령징용’이 ‘살인징용’인줄 모두가 피부로 느껴서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장으로 선발되면 갱도에 들어가지 않고 지상에 근무 하게 되어 있어,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소문에 피징용자 들은 다투어 대장되기 위해
나름대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노력들을 하였다.
그중 나도 한 사람이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다행히 내가 대장으로 선발되었다.
마지막 떠나기 전날에 2읍15면에서 선출된 분대장으로부터 인원 보고를 받아
합산한 인원수를 대장인 나는 군대식으로 담당 군인에게 보고하고 이상 무를 외치며 경례를 붙였다.
대장은 자택에서 자고 내일 새벽 5시까지 울산 역으로 나오라 했다.
그 때가 밤 11시 가까운 시각이었다.
숙소에 갔더니 애태우며 기다리던 형이 피마자기름을 주면서
무조건 마셔 두어라 하기에 마셨는데 아무런 이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 10분 뒤에 형이 들어와서 설사 했느냐고 묻기에 아무 기별이 없다 했더니
“너 위장은 쇠등어리냐!” 하면서 걱정되어 흥분된 어조로
다시 조그만 병에 든 기름을 마셔라 해서 마셨더니 설사기가 있어
변을 보기는 보았으나 엄지손가락 크기의 변이 새까맣게 기름이 올라
반질반질한 것뿐이었다.
새벽 4시30분경 형이 시키는 대로 대절(貸切) 자동차를 이용하여
하상면(下廂面) 병영(兵營)으로 피신가는 도중에
군경(軍警) 감시(監視)하에 기다란 죽음의 행렬이
가족들의 비통(悲痛)한 부르짖음과 울음바다 속에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얼마 가지 않아 광복이 되었으나 그때 30대 연령징용에 이끌려 간 사람은
한사람도 돌아 온 사람이 없다.
유가족들은 해마다 징용 떠나보낸 그날을 기해 합동 제를 올렸다.
그래서 울산 군내에서는 나와 동갑(同甲) 황병곤(黃秉坤)외에는 한 사람도 없다.
그 뒤 또 무슨 변을 당할까 하는 염려로 형의 주선으로 읍사무소 서기가 되어
농사계에 배치되었는데, 계장 김실근(金實根), 차석 박보언(朴寶彦), 이 두 사람은
학교 선배로서 초출(初出)배기 나를 동생같이 아껴 주었다.
아침 출근 전에 날인만 하고는 농촌 부락으로 출장 나가있는 것이 나의 일과(日課)였다.
* 천황 모독죄로 목숨을 건진 친구
패전이 얼마 남지 않은 1944년 방어진에 거주하는 일인(日人)들은
최후의 방어를 하는 듯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경(日警)은 항구에서 서북쪽 지대가 높은 곳에
거대한 일본 사찰 본관사(本觀寺) 가까운 밭둑에 비행기 감시전망대를 구축하고
망원경으로 쉴 사이 없이 팔방을 감시하였다.
망루에서 60미터 거리 지대가 조금 더 높은 곳에
철공소를 경영하는 친구 김영식(金永植)의 집이 있었다.
10월 어느 날 친구 영식이의 초대를 받아
전일본연식정구선수권소유자(全日本軟式庭球選手權所有者) 황병곤(黃秉坤)과 함께
세 사람이 술상을 차려 놓고 한 잔 마셔가며 일본패전,
조선독립을 희망 등등의 이야기며 화장실에서 천황 사진이 실린
신문지로 뒤를 닦았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너무나 통쾌하여
한바탕 박장대소(拍掌大笑)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저녁 늦게 헤어졌다.
다음 날 오전에 방어진 경찰주재소 순사가 찾아온 것이다.
영문도 모른 체 연행되어 주재소에 당도하니
황병곤과 김영식 두 친구도 와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표정으로 서로 주고받으며 잡혀온 연유를 대충 알았지만
어떻게 어제 밤에 있었던 이야기가 밀고(密告) 되었는지
너무 황당하고 궁금한 심정으로 묵묵히 신문하기만 가다렸다.
얼마 후 담당 순사의 인솔로 울산 본서(本署)에 이송(移送)되어 갔다.
본서에 당도하자 바로 구금(拘禁)되었다가 다음 날 불려나갔는데
고등계형사인 듯한 자가 던지는 첫 말은
“천황폐하 사진에 대하여 누가 말하였나?”였다.
우리는 가는데 까지 가 보자는 식으로 계속 답을 하지 않자
거꾸로 매달고 코 구멍에 물을 부어넣는다. 는 등
고문을 하겠다고 협박을 시작하였다.
점차로 분위기가 살벌할 기세를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황병곤이 자백을 하고 말았다.
황병곤은 바로 감옥으로 가고 우리는 반성의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다시 구금되었다가 3일 만에 석방되었다.
훗날 황병곤은 친구가 더 고생하기 전에 일찍 자백 못한데 대하여 사과하였다.
황병곤이 옥살이를 하는 동안에 1915년생 ‘연령징용’이 시행되어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오히려 천황을 모독한 황병곤은 하늘의 도움 없이 어떻게 감옥에 갔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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