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제국 일본의 항복
* 독립! 만세!
1945년에도 어김없이 아침 6시경이면 방어진 앞 바다 수평선 위로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미국 전투비행편대가 날아왔고,
명칭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색깔은 검고 큰 4기동폭격기(機動爆擊機) 2대가
때때로 날아와 항만(港灣) 상공을 선회하면서
선박이라면 모조리 무차별 폭격하여 수장시켰다.
천 톤급 상선이 침몰하는 장면을 몇 번이나 목격했는데,
해방 후에도 오랜 동안 방어진 항만 앞 시리섬 암초(暗礁)위에 얹혀 있던
길이 100미터 폐상선도 그날 격침되었던 것 중의 하나였다.
패색의 모습을 애써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일본인들의
초조함이 역력히 보였고, 방공훈련을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나 깨나 우리들을 끝까지 괴롭혔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이 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온 동네에 감돌면서
일황(日皇)의 중대 발표가 있다 면서 사람들은 라디오 있는 집으로 모여 들었다.
원자탄이 어쨌다니, 국민 안전을 위해 어쨌다니,
무조건 항복하느니 등 짐은 신(神)이 아니라면서
침통하고 떨리는 천황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동안에,
어디서 어떻게 이 방송을 듣고는 있는지 일인(日人)들의 모습은
그림자조차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박보언(朴寶彦) 선배가 천을 들고
우리 집으로 와서 태극기를 만들어 서진구(西津區)로 나가 보라 했다.
다섯 살 때 우리 집 지붕에 꽂힌 조그마한 깃발이 생각났다.
들은 대로, 생각나는 대로, 태극을 그려 넣고
사방에 괘(卦)는 아무렇게나 그린 태극기를 장대에 매달고
일인(日人) 상가 쪽으로 달려가 기쁨과 흥분으로 들뜬
군중을 발견하였는데그들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앞선 사람이 “독립!”하고 외치니 뒤 따른 군중은“만세!”하고 외친다.
“독립!” “만세!”……. 소리는 차츰 높아지고 속도가 빨라지면서
한 덩어리의 절규가 되어 지축을 흔들고,
기쁨이 급기야는 분노(憤怒)로 변하고,
여세(餘勢)를 몰아 와장창 하고 일인(日人) 상점의 잠겨진 문짝을 들이 받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처음 시작 할 때처럼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가슴속에 사무친 분노들이 하나 둘 속 시원히 풀어지는 쾌사(快事)라 하겠다.
앞서 선창하던 친구는 태극기를 받아 기수(旗手) 역할(役割)을 하고
나더러 선창(先唱)게 하니 군중들은 박수로 환영했다.
계속 진행 도중 노인네들이 와서
“이 모두가 이제부터 우리 재산이니 파괴 행위는 삼가라”하기에
그대로 따른 것이다. 군중들은 점차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을 되찾았다.
* 좌 · 우익의 대립
건국준비위원회가 설립되고, 주민들은 좌·우(左右)로 갈라지고,
서북청년단이 주재하면서 곽암(藿岩 : 미역돌) 이 몰수되고,
읍장이 민선되면서 방위대가 출현 하고,
일인(日人) 세화회(世話會)가 발족되어 일군대(日軍隊)가 재무장(再武裝)하고,
경찰은 간곳없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속출하였고
이러한 틈을 타서 좌익 계열에서는 죽창으로
양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등 것 잡을 수 없이 사회는 혼란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어업조합 건물을 접수하여 사무를 보기 시작하였는데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란 이름 그대로 막중한 이름이었지만
내부(內部)로는 좌우가 섞여서 밤낮 입씨름으로
시종 싸우는 가운데 나는 선전 부장 일을 맡았다.
선전부에서 하는 일은 위원회 결정에 의하여
보를 만들어서 곳곳에 붙이는 일이 전부였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 보면 선전부에서 붙여놓은 벽보위에
좌익계의 벽보가 덧붙여 있었다.
이렇게 사회의 여론이 통일되지 않고 혼란스런 분위기를
안정되게 하기위해서는 하루빨리 연합군(聯合軍)이 상륙하여
평정(平靜)해 줄 것을 당시 많은 사람들이 희망하고 있었다.
한편 재무장(再武裝)한 일군(日軍)들은
항구에 크고 작은 그들의 선박을 정박시킨 채
민간인을 싣고 귀국할 기회를 노리고 있으면서,
선상(船上)이나 뱃머리에 일인(日人)들이
군데군데 무리지어 쭈그리고 앉아서
이를 잡는 꼬락서니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읍장(邑長) 민선결과(民選結果) 좌익계의
거목이라 할 수 있는 박학규(朴學奎)가 당선되었는데
기고만장(氣高萬丈)해진 좌익계(左翼係) 사람들은
농악을 울리고 어깨에 죽창을 메고, 매일같이
시위 행렬이 계속되어 민심을 더욱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울산시 동구 화정리(華亭里) 월정산(月亭山)에는
월정사(月亭寺)라는 절이 있는데 월정산 중턱에
앞에서 기술한 독립투사 서진문(徐鎭文) 선생의 묘가 있다.
좌익계에서는 느닷없이 묘 주변을 성역화(聖域化)하였고
그네들의 훈련장으로 만들고 ‘위대한 공산주의 지도자’라 선전하고
주민들을 강제로 참배 시키는 등 좌익 사상을
고취 시키는 학습장으로 이용하였다.
“나는(서진문) 우리나라가 독립을 쟁취하자면
약소민족인 우리의 힘만으로는 부족함으로
공산주의란 이름을 이용해서 싸운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독립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라고
생전에 그의 소신을 미망인인 나의 장모(丈母)
윤상필(尹相必 1901∼1992 ) 여사를 통해서 밝혔으며,
여사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도 전하셨다.
“고종사촌인 김천해(金天海)는 일본인 처자를 두고
일본 땅에 살고 있고, 나(서진문)와는 사촌 간이지만
둘 사이는 아주 좋지 못해, 자주 언성을 높여 가면서 싸우는 것은,
서로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상이 다르지.” 하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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