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14. 방어진초등학교

무극인 2007. 12. 28. 14:51

 

 

*교사(敎師)의 길로

1945년 10월 경 사회 혼란이 계속되던 중 어느 날 군 학무과에서

 천종호(千鍾鎬), 천재동(千在東), 이율우(李律雨) 세 사람에게

3개월 동안 임시 교사가 되어 국민학교를 지켜 달라는 청탁이 온 것이다.

3개월이란 기간은 해방되기 전에 적색 교사란 딱지가 붙여져 면직 당한 사범계 정교사들이

 그 기간 내 교육 현장에 다시 설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나온 계산이다.

당시 우리 세 사람은 읍사무소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율우는 사양했지만

아제비와 조카뻘 되는 천종호와 천재동은 둘 다 쌀 한 가마 등 어떤 보수에도 여념(餘念)하지 않고

오직 애향심과 사명감으로 요청에 응하여 아동들을 가르치기로 한 것이다. 

일인(日人) 학교였던 심상고등소학교(尋常高等小學校)를 접수하여

교명(校名)을 방어진국민학교(方魚津國民學校)로 개명(改名)하고

우리를 배치하였는데, 우리 두 사람은 교정(校庭)을 둘러보고,

군 교육청으로부터 약간의 지원금으로 교실 안팎에 잔재한 일제(日帝)의 잔재를 정리하였고

나름대로 반일(反日) 및 우리정서에 알맞은 분위기로 가꾸어 나갔다.

 몇 개월 후부터 울산군내 여러 곳에서 차출 된 십 수 명의 남녀 교사들이

교사가 갖추어야 할 소양(素養)의 강습을 이수하고 찾아들었는데

 그들 중에는 부산(釜山)에서 온 여선생 두 사람도 있었다.

당시의 시대상으로 사상이 서로 양분되어 속사정은 달랐지만

우리는 한 군내(郡內)의 출신으로 모두가 교육자의 입장에서는 형제와 같은 정으로

 서로 도우며 열심히 교단을 지켜 나갔다.

이 무렵 방어진국민학교는 교장,교감 등 운영 책임자가 부재였고,

 직원들은 교육목표, 교육방침에 둔감함은 물론 전체적인 학교 운영 방침이 설정되지 않아

여러 가지로 교육 여건이 매우 난감한 상태였다.

첫째로 교육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계몽하는 일,

둘째로 학교 운영에 관여하여 동참할 수 있는

조직체를 구성하는 일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나는 교직원들과 상의하여 가까운 학부모를 대상으로

학부모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동분서주한 결과,

 다행히 나의 형수씨가 부형 모자 회장으로 나서 주셨고,

 부회장으로는 조여사(趙女史: 故 코미디언 쓰리보이 신선삼申善三의 母)로 결정이 되었으며

기타 여러분들께서 동참하여 주셨는데,

먼저 교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당시 월급 대신 지급되는 쌀로는 식생활 해결에 턱없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학부모회에서 십시일반으로 쌀을 거두어

교직원들의 부족한 식량 양을 보충하는 것으로 식량난이 다소 해결되었다.

그리고 직원들은 내가 나이도 위고 이곳 방어진 본토박이 출신이라 하여

 임시로 교직원의 대표로 추대하여 회전의자에 앉혔다.

이 시기에 아동 연극반을 조직하여 읍민(邑民)을 대상으로

순회공연을 하였는데 연제(演題)는 「박제인간(剝製人間)」이었다.

 내가 창작한 이 「박제인간」은 반일물(反日物)로 일제(日帝)의 잔악성을

연극을 통하여 알리고 민족 주최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극 중에 흉악한 일인(日人)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종이를 자르고, 붙이고, 채색하여 가면을 만든 것이 처음으로 만들어 본 창작 탈이었다.

 

 

 

*교사가 연행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정권을 잡게 되니

죽창을 쥔 좌익 시위 행렬이 점차로 사라지기는 했다지만

그들은 지하 세력으로 숨어 들어가 아직 기세는 당당했다.

울산경찰서 방어진 주재소에 박소장(朴所長)이 부임하여

 경찰력을 강화하고 좌익분자들은 모조리 잡아 들였다.

 어느 날 경찰 주재소 박소장(朴所長)이 이끄는 중무장(重武裝)을 한 경찰관들이

학교를 급습하여 직원들을 교실에 감금하고

불순분자를 색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박소장은 한차례 강설(講說)을 끝내고 “내가 호명하는 사람은 기립하시오!”하고는

 천재동(千在東), 양원오(梁元吾)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두 사람은 이것 야단났구나! 했더니

 “두 분은 바깥으로 나가시오!”하고는 나머지 남녀 십수 명 교사들은

경찰 감시 하에 주재소로 연행되어 간 것이다.

당시에는 일정한 국정교과서가 아직 문교부에서는

 발행되지 못하였던 시절인데다 공책 한권 없는 실정이었다.

종이라고는 밀양지(密陽紙)라는 이름의 구멍이 많이 나 있는

연한 갈색을 한 종이와 생선(生鮮)을 포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양초를 먹인 투명한 종이가 고작이었는데

이 종이를 이용하여 교과서 대용으로

 1920년대 방식 즉 직접 사물들을 그림으로 내가 그려서 이를 등사하여

책으로 엮어서 아동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또한 이 종이들을 공책 대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아동들은 소 그림을 보고 ‘소가 간다.’

말 그림을 보고 ‘말이 온다.’

 태극기를 보고 ‘태극기 만세’ 등으로

열심히, 즐겁게 수업을 하는 도중에

200여명의 아동들을 남겨 두고 교사들이

 연행되고 말았으니 앞일이 캄캄했다.

그렇지만 아동과 학부모에게 실망을 안겨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상품 없는 소운동회(小運動會), 학급별 학예회, 야외행진, 사생대회 등

 전교생이 한꺼번에 학습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두 교사가 책임감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아동들과 하나가 되어

이상 없이 학교를 운영을 한 것이다.

연행되어 간 교사들 모두가 경찰 조사 끝에 모두가 해임되었으나 구속된 사람은 없었다.

두 달이 지나서야 군내에서 선발된 교사들이 부임하여 왔다. 

 

 

*노래 「인사」「손뼉을 칩시다」

  울산에서의 중심 학교인 태화국민학교(太和國民學校, 현: 울산초등학교)를 비롯해서

각 면에서 선발된 교사들이, 지원하는 차원에서

파견되어 온 후 얼마 가지 않아서 정식으로 교장, 교감, 교사들이 부임하여

그동안 어수선하던 학교에 학무가 수립되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게 되었지만

식민지 생활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미풍양속은 퇴색되고

이러한 사회 여건 속의 민심은 각박해질대로 각박해져

 어른 아이 모두가 먹고 살기에 급급하여 허덕이는 혼란기에

노래라고는 고작 「봉선화」「별 삼형제」「일편단심」「학도가」「근학가」같은

옛 노래 뿐이어서 좀더 아동들에게 정서적으로 안정을 줄 수 있고

 믿음과 사랑이 담긴 현실에 맞는 인성 교육 차원의

 새로운 노래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부모, 선생님, 동무(당시에는 친구를 동무라 불렀음)에 대한

 인사예절을 중점적으로 주제로 한「인사」라는 제목의 노래를

 내 나름대로 작사, 작곡하여 내 놓았다.

수업에는 물론 평소 학교생활에서 노래하면서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기 위해서

먼저 아동들 간에 서로 친숙하고, 도우며

 가정과 학교간의 밀접한 관계를 인식시키고

이에 걸맞은 지도안을 작성함과 동시에 학부모와 상의한 결과

교육환경 차원의 시설로 큼직한 대문을 만들어 교실 출입구에 세웠다.

이 대문은 아동들 각자 자기 집 대문으로 생각하면서

 평소 이『인사예절 문』을 드나들며 현장감(現場感) 있게 활용되는 것이다. 

학급학생 모두가 교과서에 등장하는 철수와 영희

그리고 바둑이 등 주인공이 되어서 내가 작사 작곡한「인사」노래를 부르면서, 

아침 수업이 시작된다.

    

『아버지께 인사를 / 공손히 하자

     아버지 안녕히 / 주무셨습니까?

     어머니께 인사를 / 공손히 하자

     어머니 안녕히 / 주무셨습니까? 』

 

노래를 부르면서 인사하는 동작을 유희로 표현하면서

 대문(교실문을 나가 복도로)을 나간다.

영희는 바둑이와 교단(敎壇)위에서 재미있게 놀다가 하단(下壇)하면

철수가 교실에 들어오면서 인사한다.

이 장면을 정해진 순서에 따라 반복하여 매일 실제 수업과 연결하여 실시하였다.

수업 시작과 함께 내가 교실에 들어서면 아동 전원이 일어서서 합창으로

    

『선생님께 인사를 / 공손히 하자

     선생님 안녕히 / 주무셨습니까?

(노래와 유희로 일제히 선생님께 인사를 한다)

    우리들도 서로서로 / 인사를 하자 

    여러 동무 안녕안녕 / 반갑습니다. 』

 

서로서로 마주보고 인사한 다음 본 수업에 들어간다.

시간이 되어 수업이 끝나면 일어서서 인사하고 마치는 것이 아니라,

철수가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면서(복도에서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아버지, 어머니 학교에서 돌아 왔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영희와 바둑이가 나타나면서 서로 반가워하는 장면이 연출되면서 수업은 끝난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극화(劇化)하여 학습하는 것이다.

꾸준히 실천하였더니 아동들의 표정이 밝아지고

반응이 좋아 큰 효과를 얻었고

그 후 국정교과서가 발행되어 국어독본에 실린 철수, 영희, 바둑이 과정에

꼭 들어맞아 국내외인 앞에서 연구수업 발표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현재 60세 내외 초로의 인사 중에 50년 전

 나에게 수업을 받은 제자가 간혹 있어서 만나면

 서로가 반가워「인사」노래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같이 불렀다.

얼마 전에도 어느 미술전시장에서 현직 목사인 옛 제자의 인사를 받고

노래이야기가 나와 감회가 깊었다.

그 후 다시 또 다른 노래를 구상하고 있던 중에

동료 서 형주(徐瑩珠: 2005년 현재 부산에 거주) 여교사가 일본(日本 ?)노래지만

‘손뼉을 손뼉을 칩시다’가 어떻겠냐고 의견을 내 놓았다.

나는 고심한 끝에 하는 수 없이 아동들 교육에 도움이 된다면

국적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일본노래지만 노랫말을 번역하고 이 노래에 맞춰

유희는 서형주 교사와 함께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가르치게 되었다.

 

     『손뼉을 손뼉을 칩시다 / 모두 다 모두 다

     피아노 소리에 맞춰서 / 손뼉을 칩시다

     웃습시다 하하하 / 하하하 하하하

     아~ 재미가 있어요.

 

    『손뼉을 손뼉을 칩시다 / 모두 다 모두 다

     피아노 소리에 맞춰서 / 손뼉을 칩시다

     울읍시다 응응응 / 응응응 응응응

     아~ 재미가 있어요.

 

     『손뼉을 손뼉을 칩시다 / 모두 다 모두 다

     피아노 소리에 맞춰서 / 손뼉을 칩시다

     성냅시다 욱욱욱 / 욱욱욱 욱욱욱

     아~ 재미가 있어요.

 

위와 같은 내용으로 노래하면서 손뼉을 치고,

 팔을 들어 좌우로 흔들어 가면서 한 바퀴 돌고.

피아노 치는 흉내를 내고,

 양손을 옆구리에 얹고는 하하하 웃는 얼굴로

뽐내듯이 고개를 앞으로 내 밀고는

양손을 높이 들어 크게 원을 그리면서

‘아 재미가 있어요.’로 일절이 끝나면

이절에 ‘울읍시다’ 와 삼절 ‘성냅시다’

노랫말 그대로 유희로 표현하는 것인데

 이 노래와 유희가 대성황을 이루게 되어

이웃 학교는 물론 부산에서 이소이, 서복희 두 여교사가

 이를 연수받아 가서 부산에 널리 보급 시킨 것인데,

결국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현재 60세 이상 고령층에서는

기억하는 이가 있으리라 생각이 된다.

도장학관 자신이 과거 교사 시절 1학년 담임교사로

종사했던 경험을 통해 볼 때에 국어 수업에는 배울 점이 많았으나

산술과에 있어서는 더욱 연구와 노력을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이 부탁의 한 말씀에 자극을 받아 훗날

내가 고안한 1학년 산수과 입체 쾌도를 창작해 낸 동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