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16. 정든 고향 방어진을 떠나다

무극인 2008. 1. 8. 13:37
 

16. 정든 고향 방어진을 떠나다


* 경주예술학교 부임길에

어느 날 방어진 동부국민학교(東部國民學校) 장두만(張斗萬)교장이 나를 찾았다.

 이유는 추천했다면서 신설(新設) 경주예술학교(慶州藝術學校)로 부임하라는 것이다

적성(適性)에 맞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응하지 못하였는데몇 차례 권유를 받았다.

이력서는 장교장 손수 써서 제출해 두었으니

 미술교원 자격으로 일단 경주에 가서

학교 최고경영자와 인사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반강제로 이끌려 울산역에서 경주행 기차를 타고 가면서

 곰곰이 생각하여 보니 갈 입장이 도저히 못 되었다.

 정든 고향을 훌쩍 떠나자니 고향에 대한 배신자(背信者) 같기도 하고,

내가 꿈꾸어 왔던 예술가의 길을 버리고

 영원히 교육자가 될 것 같아 걱정이 되기도 하고,

또 이사해 갈 사정도 되지 않았다.

이런저런 사정 등으로 고민하는 사이에

 기차는 어느 듯 호계역(虎溪驛)에 정차하게 되었다.

이 역에서는 군용물(軍用物) 운수(運輸) 관계로 7분간 정차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불현듯 탈출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이 들면서,

 장(張) 교장께 화장실에 갔다 오겠노라고 해 놓고

곧바로 하차하여 줄행랑치고 말았던 것이다.

 

* 울산 태화국민학교로

얼마 가지 않아 이번에는 울산군 중심 학교인

 울산 태화국민학교(太和國民學校) 윤진일(尹晋日)교장에게서

 방어진국민학교 김정호(金正昊)교장에게 청탁이 날아 들어왔는데

 그 내용인 즉,

 태화국민학교 전(全) 교사(校舍)가

제23육군병원(第二十三陸軍病院)으로 되어 있는데

 멀지 않아 교사(校舍)를 되찾아 학교로 복귀하게 되어 있으니

중심 학교의 면목을 세우려면 귀교의 교사 천재동이 필요하니

 태화국교에 양보해 달라는 것이었다.

김정호 교장의 권유에 이 핑계 저 핑계,

형의 사업을 도와야 한다는 등등으로 어렵게 피해 왔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형님이 오히려 교장의 편을 들어 권유 하지를 않는가?

나는 다시 주택을 문제 삼아 핑계로 내 세웠더니,

교장은 교장사택을 통째로 제공하겠다는 데는 꼼짝없이 승낙하고 만 것이다.

울산에는 사친회장(師親會長) 박태윤(朴泰倫),

문화원장(文化院長) 박영출(朴榮出),

수필작가(隨筆作家) 김태근(金兌根),

예총지부장(藝總支部長) 김규현(金 ○ ○),

사진작가 서진길(徐鎭吉),

연극계(演劇界)의 일인자(一人者) 손진상(孫晋庠),

 당구(撞球) 200점 오흥조(吳興祚),

야구(野球) 명포수(名捕手) 손사찬(孫四燦),

멋쟁이 박진수(朴振守) 등등

죽마고우(竹馬故友)나 다름없는 친 형지(親兄知)들이 환영 해 주었다.

울산 내 젊은이들은「해변(海邊) 놈」이라 해서

해변 마을 출신들을 업신여기고 싫어하는 풍조가 있었는데

천재동은 피부색이 희고 얼굴이 훤하다 해서 해변 놈으로 취급하지 않고 잘 대해 준 것이다.

 

*시작된 타향살이

1954년 봄 우리 식구는 꼭 필요한 가재도구들만 정리하여

 짐을 꾸려 정든 고향 산천과 이웃 그리고 친지들을 뒤로한 채

울산 태화국민학교 교장사택으로 이사를 했다.

울산(蔚山)으로 이사하는 날 교정에서

교직원과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송별 인사를 하고 교문을 나설 때

교문에서부터 도로 양편에 길게 도열한 동료직원과

이웃 주민들 그리고 사랑스런 어린 제자들의 아쉬운 송별 인사는

평생을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다.

특히 고사리 같은 손으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흔들면서

환송해 주던 어린 제자들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데 충분하였다.

울산으로의 이사가 결국 고향 방어진을 떠나,

오늘 날 까지 반세기 동안 객지 생활의 시작이 되리라고

당시에는 상상조차 못해봤다. 

입주한 사택은 학교 운동장 동편 강당 앞쪽에 있으면서

제23육군병원(第二十三陸軍病院)과의 사이는

 판목(板木)울타리로 경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 목욕탕, 실내화장실, 다다미가 깔린 넓은 접견실 겸 서재(書齋)에는

대형 피아노도 있었고 가옥(家屋) 뒤에는 창고와 넓은 채전밭이 있었다.

사택에 거주하면서 육군병원의 사정을 하나하나 보고 듣기도 하였는데

입원 군인 환자들의 생활은 참으로 비참하였다.

전쟁 직후라서 나라 형편이 말 못하게 어려웠겠지만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원장인 김윤근(金潤根)장군은

많은 입원군(入院軍) 환자를 굶주리게 하고

의약품 부족으로 사상자도 많이 내는 등 비리에 연루되어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끝내 처형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이 해에 넷째 딸 미명(美明)을 출산하였다.

 

* 울산 최초의 아동극

육군병원은 폐지되고 되찾은 교사(校舍)는 대 수리를 하고

교명(校名)도 태화(太和)로부터 울산(蔚山)으로 개명(改名)하여

『울산국민학교』로 부르게 되었다.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은 환경 정리였다.

『페스탈로치(PESTALOZZI, 1746―1827, 스위스의 교육자)』초상을

15호 크기 유화로 그려서 교무실에 걸고,

 다음으로는 한국의 위인 초상을 그려서 교내 골마루 곳곳에 걸었다.

 천명에 가까운 아동과, 백여 명의 교직원들이

그 동안 오랜 기간을 가교사(假校舍), 향교(鄕校) 등지에서

분산 수업을 하여 온 까닭에 아동은 물론

교직원들까지도 만나면 생소하여 서로들 서먹서먹하였다.

 빠른 시간에 학교를 정상화로 일으켜 세우려면

먼저 일체단합, 교풍확립이 선결 문제가 아닐까 해서

 전 식구가 화합하는 장을 만드는 방안을 고심한 끝에 모색하였는데,

그것은 뭐니 뭐니 해도 학예회 개최가 상책이라고 생각되어

 일대(一大) 연극제(演劇祭)를 개최하여 교풍의 회복,

사제간의 단합, 학부모로부터의 신뢰

그리고 군민들에게 학교의 건전함을

 실력으로 바로 보여 줄 수 있다고 학교장에게 건의하게 되었다.

 학교장은 쾌히 승낙 했으나 교감 외 일부 교사 간에서는

 ‘지가 뭐 안다고!?’ 하면서 반대 의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장의 단호한 의지는 나를 믿고 밀어 주었던 것이다.

윤진일 교장은 과거 부산 시내 국민학교 5대 교장 중의 한 사람 이였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마지막 퇴임은

고향 울산에서 맞이할 생각으로

고향에 자신의 모교인 울산국민학교에 부임 해 온 것이다.

서둘러 연극제 준비에 들어갔다.

우리 아동들에 알맞은 소재를 여러 방향으로 생각하던 중

1학년에서 6학년까지의 국어 교과의 내용을 분석해 보니

「병원 놀이」란 단원을 선택하고

 이「병원 놀이」를 골격으로 하여 여기에 관련성이 있는

과목과 단원들에서 내용을 추려내고 삽입하고

참고하는 등 총망라하여 묶어서 각색했다.

교사들 중에는 나도 한 막(幕) 하겠다면서 나서는 동료 교사도 있는가 하면

 마땅치 않다고 노골적으로 백안시(白眼視)하는 교사도 없지는 않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각색, 연출, 소품, 장치 등 나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공연에 차질 없이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드디어 학교에 마련된 넓은 강당을 마다하고

울산극장을 공연장소로 택하여

울산 최초의 아동극 「병원 놀이」가 화려하게 막을 올렸다.

그리고 큰 호평과 함께 많은 찬사를 받으면서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우리 각시 다리 다쳐 걱정이 된다.

   실로 꿰매 줄까 풀 붙여 줄까’ ……. 로 시작하여

   ‘전화를 겁니다. 딸딸딸…

   여보세요. 거기가 병원입니까?

   김영길 병원요 딸딸딸’

 

이렇게 노래를 불러 가며 오페레타(operetta) 형식으로 연출한 것이다.

 교내에서는 ‘전화를 겁니다. 딸딸딸’ 노래가 제법 유행되었고,

 한길에서 나를 발견한 뭇 남녀 중 ? 고등학생들 까지도

‘전화가 왔습니다. 딸딸딸’ 노래하며

“선생님!” 부르면서 잘 아는 척 반가이 대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