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에 첫발을
울산국교에서 2년을 보낸 1956년 이른 봄, 어느 날 한 통의 전보가 날아왔다.
‘부산결정속내’ 라는 내용이다.
나는 그 까닭을 몰라 동료 직원들에게 보였더니
입을 모아 부산으로 전근되었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 아니겠나.
젠장! 우리는 가고 싶어도 오라는 사람이 없다면서 부러워들하였다.
언젠가 도(道) 민간(民間) 장학사(獎學師) 자격(資格)으로
연구수업 발표회에 참석하였던 부산 세종치과원장(世宗齒科院長) 말씀이
“천선생, 부산으로 와야겠다”고 말 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세종치과원장이 전보를 친 장본인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훗날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동아대학교(東亞大學校) 학장직을 맡고 있던
친구 김병희(金炳熙)교수였다.
울산을 떠나기 싫은 아쉬움을 가슴에 간직한 채 도교육청(당시 부산시 동광동 소재)을 찾았다.
김모(金某) 장학관은 나를 처다 보지도 않고도 음성만 듣고
나를 안다는 듯이 “왜 인제사 오느냐?” 면서 비로소 쳐다보았다.
부산으로 전입할 형편이 안 된다고 사정했으나
들어주지를 않았을 뿐더러 오지 않으면 6개월 간 정직(停職)처분을 받는다니,
7개월만 근무하면 부산사범대(釜山師範大) 부속국민학교(附屬國民學校)로
가게 되어 있다는 등 엄포를 놓았다가 달래었다가,
나를 설득시키느라 혼신(渾身)의 노력을 다하는 와중에
부산으로 전입할 것을 결심한 것이다.
《 1956년 3월 31일부로 부산시내 국민학교 근무를 명함. 10급 1호. 대통령 》
장학관에게 나의 근무지가 어디냐고 물으니,
신설 부산(釜山) 전포국민학교(田浦國民學校)라면서
서면(西面)에 위치하고 있으나 정확한 장소는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리 신설교(新設校)라 해도 상급기관에서 소재지(所在地)를 모른다 해서야 될 일인가?
* 부임교의 인상
묻고 물어 고생 끝에 찾아 낸 곳이 전포동(田浦洞) 산 밑
언덕 밭둑에 두 동의 천막과 깡통을 펴서 지붕을 이은 판잣집 하나,
훗날 알았지만 부산에서 가장 작고 가난한 국민학교였다.
두 동의 천막 중 하나는 1,2학년 합동 교실이요,
다른 하나는 3․4학년의 합동 교실이다.
아무렇게 만든 방 한 칸 판잣집은 숙직실 겸 소사 거처(居處)였다.
성지국민학교(聖智國民學校)와 부산진국민학교(釜山鎭國民學校)에 다니는
아동 중에 전포동(田浦洞)에 거주하는 4학년 이하의 아동들을
학구상(學區上) 전포천막교(田浦天幕校)로 보내게 됐다는 얘기다.
석은 판자로 두드려 만든 울타리에 손바닥만한 나무판에
「부산전포국민학교」라고 서툰 솜씨로 쓴 간판,
겨우 찾아서 찌그러진 문을 밀치고 들어 간 곳이 바로 교무실이다.
맨 흙바닥에 책상 몇 개, 컴컴하고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르는
한 칸 방이었는데 창고를 임시로 빌린 것이라 하였다.
앞서 온 교사들이 나를 교장 인줄 착각하고 인사가 공손했다.
나도 누가 교장일까 하고 두리두리 살피고 있는 찰라
나보다 서너 살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한 사람이 들어오더니
줄곧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교장이 오는가 보다 하고 그 쪽으로 다가갔다.
나뿐이랴, 거기에 있던 직원 모두가 그렇게 한 것이다.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인사를 통하여 다 같은 입장의 평교사임을 알게 되었는데
그야 말로 진풍경의 한 토막 연극 이였다.
우리들 중 황득출(黃得出)교사는
평양에서 중학교장 이였지만 남하하여 과거의 경력은 모두 무시당하고
국민학교 평교사로 감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주례교회당(周禮敎會堂) 장로이기도했다.
뒤늦게야 교장 이진우(李鎭雨), 교감 이만호(李晩鎬),
교무 이응우(李應雨)가 오고 모두 십 명이 안 되는 직원들로 구성되었는데
아무리 학구제를 엄수하라고 하지만
학부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면 여태까지 통학하던
큰 학교를 그만 두고 보잘 것 없고 누추한 이곳 전포국교로 자녀를 누가 보내랴,
불과 50명도 안되는 학생들 울퉁불퉁 땅바닥 천막 안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오전, 오후 2부제 수업이다.
바쁜 와중에 울산에서 다짐하였던 교과서 내의
삽화들을 모두 조사하여 내 나름으로 내용에 맞게
삽화를 새로 그려서 보관하고 있던 중 타도(他道)교사에게
삽화 뭉치를 건너 준 일이 있었다.
누구인지는 기억은 나지 않으나 그 사람이
그 삽화를 문교부 국정교과서 출판 관계 부서에 제출하였는데
관계 당국을 모독하였다 하여 면직 당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다.
* 부임과 동시에 아동극으로
부임한 1956년 당시에는 교육지자체 제도하였는데
마침 교육청이 주관하는 『축하행사』가 성대히 거행되게 되어있었다.
학교대항 육상, 야구, 배구 등 체육대회와
음악, 무용, 웅변, 가장행렬 등 학예 대회가 거행될 예정이었다.
본교 전포국민학교도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고 생각되어
교육청 담당자에게 접수 상황을 확인해 본 결과
연극분야는 애당초 제외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연극(演劇)분야는 지도할 만한 교사가 없어
처음부터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라 했다.
전포국민학교(田浦國民學校)에서
아동극 한마당을 펼쳐 보이겠다는 의사를 표명(表明) 하였더니
특별공연 명분을 붙여서 참여할 것을 쾌히 허락을 받아 내었다.
나는 곧『병아리와 바둑이』연제로 대본을 완성하여
천막교실 옆 조그마한 공지(空地)를 이용해서 연습에 들어갔다.
연습 과정에 염려도하였지만 아동들이 예상외로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지시에 잘 따라주었다.
이웃 모 제조공장 여공(女工)들이 서로 다투어 연습광경을 구경하려다
송판(松板) 울타리를 자빠뜨리는 웃지 못 할 사건도 있었다.
발표 당일이 왔다. 범일동(凡一洞) 삼일극장(三一劇場)무대에
대형 암탉을 만들어 장치하였다.
노랑색 의복을 입은 병아리들이 춤추고 놀이하는 판에
심술궂은 바둑이가 등장하여 훼방을 노니
병아리들은 암탉의 날갯죽지 속으로, 등위로 오르기도,
내려오기도 하면서, 이번에는 바둑이를 놀려대는 등
무용극으로 전개시켰는데,
대단한 반응과 호평 속에서 무대의 막을 내렸다.
노래와 춤, 그리고 입체적인 극의 구성이 조화롭게 잘 되었다고
큰 화제 꺼리가 되었던 것이다.
얼마 후 서면(西面) 중심지 로터리에서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
미군 부대 보급 창고 자리가 부산 전포국민학교 교사(校舍) 부지(敷地)로 결정되어,
비록 임시 조치로 목조 가교사(假校舍) 건물이였지만
넓은 부지에 학교 건물이 세워진다는 데는 어느 누구보다 환성과 환호를 올린
사람들은 다름 아닌 그 동안 고생했던 본교 직원 들이었다.
* 귀족학교의 기틀을
새로 이전 할 학교 부지는 본래 논바닥을 다져서 만든 땅이다.
운동장을 한가운데 두고 사방에 새 교사가 들어섰다.
기쁘면서도 내 할일은 많았다.
환경 정리 하노라고 밤, 낮을 몰랐다.
학급도 늘고 직원 수도 늘어 갔다.
하지만 아직도 학구(學區)내의 많은 아동들은 여전히 타교로 흘러갔다.
그래서 교장 이하 전 직원들은 아침마다 일찍이 도로변에 출동하여
타 학교로 흘러가는 아동들을 적발하여 본교 등교를 권유하는 것이 일이였다.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학부형들은 학교에 모여와
항의 시위를 하였는데 심지어는 저쪽 학구로 방을 빌려
어머니와 이사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나는 생각 끝에 전임 교인 울산국민학교에서 체험한 학예 행사를
본교 전포에서도 실현했으면 싶어 학교장에게 건의하였더니
교장은 지난번 교육 자치제 축하 행사 때에서 얻은 효과를 감안했는지
오히려 앞장서서 서두르는 기세였다.
모든 계획은 수립되었다.
노래와 유희, 그리고 대화 내용 등을 총괄한 대본을 완성하고
연제를『모든 윤희』라고 정하였다.
내용은《윤희》의 지혜를 아동들에게 심어 주자는 뜻에서 각색하였다.
직원들은 내 일처럼 생각하고 행사 준비에 그 열기는 대단했다.
더더욱 모자회원(母姊會員)중에 “니홍가에리(일본에서 돌아 온 이들)”라 해서
일본에서 고생하고 귀국한 한 열 사람의 부인들이 있었다.
나 역시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교사라 해서 평소부터 나의 펜이었는데
물심양면으로 돕겠노라고 나서기도 했다.
서면 동보극장(東寶劇場) 전신(前身)인 통일극장(統一劇場)이
전포동(田浦洞) 시장 건너편 콩밭 자리에 대형 군용 콘센트 건물로 세워져 있었다.
그 통일극장에서 부산 전포국민학교 대 학예회가 성대히 막을 올렸다.
“실력있는 선생밑에 공부 잘하는 생도들, 환경 좋은 신축 교사로 모여라‼” 는 슬로건이 맞아 떨어져,
학부형 모자들은 학교를 신임하게 되었고,
아동들은 자진해서 학교를 찾아오는 등 날로 안정되어 갔다.
장차 서면의 귀족학교란 이름이 붙을 기틀을 잡은 것이요,
당시의 동료들이 훗날 전포국민학교에 재 부임되어 가면
천재동 냄새가 난다고 들 하였다.
학예회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뒤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9시,
학교장은 위로의 술 한 잔씩 하자는 직원들을 강제로 귀가 시키고,
사친회 간부, 모자회 간부 그리고 학교 측은 교장, 교감
그들은 서면 로터리 어느 요정에서 대판으로 먹고 마시고 했다는
소문이 교사들 간에 번지면서,
위로를 받을 사람은 고생한 교사들이었는데
교사들은 오히려 허탈감을 맛보게 되었다고들 불만을 표하였다.
그래서 이튿날 말하기를 “재주는 곰이 하고 돈은 땐놈이 먹었다” 고 떠들어 댔다.
그래서 그런지 오후 교내에서 쇠고기 국을 끓이고
정종 술이 데워지고 참말로 산해진미의 위로연이 벌어졌다.
한 교실을 비워 연회석을 만들었는데 정면에 교장,
오른쪽에 천재동, 그 다음이 사친 회장,
교장 왼쪽이 교감, 모자 회장, 이러고 보니
나를 상석에 모시는 격이 되었는데,
나는 술 한잔, 안주 한점 마시거나 먹지를 않았었다.
* 샤토리 교수의 충고
어느 날 정정봉(丁○○), 김영길(金英吉) 두 장학사가
나를 만나려고 일부러 학교에 왔다.
45세 이상의 고령 교사는 노후 교사로 단정하고
군․면으로 모두 전출시키기로 방침을 세웠는데
천재동 교사는 제외하기로 되어 있으니
혹시나 염려 할까 봐 미리 알려주기 위하여 왔으니 아무 걱정 말라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듣고 얼마 가지 않아 황(黃)교사는 양산(梁山)으로,
강(姜)교사는 고향인 고성(固城)으로 각각 전출 되었지만
나는 두 장학사 말대로 제자리에 남게 되었다.
부산에 오길 싫어하던 나를 강제로 대리고 와서,
7개월만 고생하면 사범대학교(師範大學校) 부속국민학교((附屬國民學校)로
보내 준다는 약속을 이것으로 때워 버리는 구나 생각하고 코웃음을 지었다.
나는 부산 시내에서 국민학교 최고령 평교사로서 자랑(?) 거리가 된 셈이다.
당시 선진국교육사절단의 방문이 잦았는데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미국 피바디 대학교의
샤토리 교수가 나에게 해준 말이 있었다.
“무엇을 만들려면 남보다 크게 만들고 그렇지
않으면 손가락 보다 작은 것을 만들어라” 하면서
“당신은 다방면으로 잘하지만 한국화는그리지
않으니 한국화도 그려라” 며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만(臺灣)에서 샀다는 모필 한 자루를 선물로 주는 것이었다.
옆에 동석하고 있던 김봉진(金奉鎭) 화백이
“한국화를 그리자면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붓이 사용(使用)된다” 고 하였더니
샤토리 교수는 “내가 미처 몰랐으니 다음 기회에 드리겠다” 하면서,
붙여서 “미국에서는
노(老) 교사가 많아 본인은 아주 자랑스럽게
느끼며 그분들이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으니
선생도 딴 생각 말고 노 평교사로 지내는 것을 권하고 싶다” 하였다.
나는 “좋은 말씀이지만 한국은 미국과는 크게 다르다.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당국에서는 노후 교사라 하여
불신하고, 일반 학부모들로부터 무능 교사로
천대 받는 것으로 상례가 되어 있다” 고 하였다.
* 공개 시범 수업은 도맡아
부산에는 찾아오는 외국교육시찰단의 방문이 잦았다.
그때마다 교육청에서는 천재동을
지명해서 공개수업을 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명이 떨어지면 마다 않고 내 나름대로의
극화(劇化) 수업, 꼭두각시놀이 수업,
내가 고안하여 창작한 산술괘도 활용 등으로 수업을 하였는데,
국내외 참관자들을 놀라게 했다.
한 외국인은 즉석에서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제시 하였는데,
사진에는 꼭두각시놀이를 시청하는 아동들이
입을 벌린 채 눈을 부릅뜨고 일제히 자아를 잃어버린 것
같은 모습으로 모든 시선이 교사를 주시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 외국인은 사진을 제시하면서
교사가 멋진 수업을 하기에 아동들의 표정이 이럴까?
보라! 한곳을 주시하고 있는 저 눈빛을!” 수업은 대 성공이었다.
대체로 이러한 호평으로 박수갈채를 받곤 하였다.
오늘 날 교실의 붕괴니, 열린 교육의 문제, 수행 평가의 문제,
입시 제도의 문제, 청소년들의 탈선, 사제 간의 갈등,
교사들 간의 갈등, 사학 재단과 교사와의 갈등 등
교육 전반에 걸쳐 문제점들이 산적되어 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내가 교직에 몸담고 있었던 과거의 교육 현장과 비교하여 볼 때,
현실의 교육이 지식 쪽 교육은 엄청난 발전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고,
교육 환경 또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좋아 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인 교육적 측면에서 본다면 교육의 부재라 아니할 수 없다.
아무리 과학적 첨단 교육용 기기들을 교육 현장에 도입했다 하더라도,
교사와 학생 간에 눈을 맞추고 서로 피부를 맛닿아 가면서,
서로 숨소리도 들으면서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행동할 때
올바른 교육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 날 같이 학생이나 교사가 주시하는 눈길이 컴퓨터 등
교육용 첨단 기기(器機)들에 만 집중하는 한
밝은 미래는 요원(遙遠)하리라 생각된다.
* 열정으로 불태우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향 방어진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해서
울산(蔚山)을 거쳐 부산(釜山)에 까지 와서,
열정으로 불태웠던 그 힘은 어디에서 솟아났을까!?
하고 자문(自問)도 해 본다.
하여간 25년간의 평교사 생활 중
부산전포국민학교에만 8년간을 근무하면서
마지막 교육에 대한 나의 열정을 다 쏟아 부은 곳임을
당시의 교육감을 위시하여 많은 교육계 인사들은 알고 있다.
이 무렵 나의 욕망은 따로 또 있었는데
토우(土偶) 만들기와 꼭두각시놀음을 연구하고 있었다.
내 가정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변변찮은 셋집에서
여덟 식구가 월급(月給) 대신 받는 쌀 한 가마니로는 살아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포 2동 정(鄭)동장(洞長)께서 자기 땅을 줄테니
집을 지어 살라면서 보여주는 집터란 곳은
지금은 주택가가 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논과 소나무가 있고
그리고 한 쌍의 묘(墓)도 있었다.
목재는 외상으로 얻어 주겠다면서 왕자목재상(王子木材商)까지 갔지만
그 날은 첫째 일요일로 휴업이었다.
그러던 중 내가 맡은 학급 박영호 아동의 아버지 박씨가
우선 여기에서 생활하라면서 새로 지은 집 한 채를 제공해 주었다.
이집에서 생활 중에 막내 딸 미순(美順)을 출산하였다.
여기는 전포2동 산 허리에 빈민촌이지만
오순도순 살고 있는 이웃들 모두가 다 잘 대해 주었다.
그러던 중 이웃 아래쪽에 마당도 담도 없지만
조그만 다락과 두 칸짜리 집을 싼 값으로 사 들여 이사했다.
그래도 내 집이라 마음이 편했다.
여덟 식구가 두개조로 나누어 한방씩 차지했지만
내가 차지한 방은 내 작업실(?)로 겸했는데 밤이면
식구 모두가 잠들고 나서야 나는 토우와 학습 자료들을 제작하였던 것이다.
집사람은 살림살이에 지친 몸에도 불구하고 내 작업에 힘이 되어
언젠가 월급이 쌀 아닌 현금으로 받게 되었고,
8년이란 긴 세월 전포국민학교 한 학교를 마다 않고 근무했다.
근무하는 동안 내가 하고 싶은 연극도 했고
꿈에도 놓치고 싶지 않는 붓으로 그림도 그리고,
외국인 앞에서 그 어려운 수업도 했고,
나아가 나는 1학년 담임이 전부였지만
여느 교사에 못지않게 교육계에서 우대를 받았다.
* 실력은 인정받았지만
【1955년 12월 28일 부로, 자격 국민학교 교감,
우는 교육공무원 법 근정서 자격 기준에 의거하여,
두서의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고 증서를 수여함
(제㉵ 三六二四호) 문교부】
마흔 살인 나는 내 실력을 정당하게 인정받고 당당히 받아낸 자격의 소유자다.
시 교육청에서 몇 차례나 현직 교감으로 나가라고 권유를 했다.
그럴 때 마다 사양했다,
모 교육감은
“어느 누구는 현금700만환을 보자기로 싸와서 울며불며
교감을 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도 있는데
너는 어이된 사람이기에 공짜로
교감을 하라 해도 싫다 하니 영문을 모르겠구나!?” 했다.
한번은 아동 사생대회가
구덕운동장(九德運動場)에서 개최되어
나도 아동들을 인솔하여 대회에 참가했다.
그날은 바람이 몹시 불어 작업에는 지장이 많았다.
감독관으로 나온 김(金)장학사가
나를 찾아와 장학 과장이 나를 보자 한단다,
그래서 따라가 보았더니
장학 과장은 수영장 탈의장 건물 남향 벽을 등지고 앉아
이젤(畵架)을 세워 놓고 사생하고 있었다.
“자네 어이할 셈 이냐?
이번에는 나도 가만있지를 않겠다.” 등으로 교감 진출을 권유 하였다.
1961年 11月 22日 부로 남천국민학교(南川國民學校) 근무를 명함.
이란 내용으로 사령이 내려왔다.
당시 남천동(南川洞)은 조그마한 어촌으로
6학급 반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였는데
제도상으로는 7학급 이상이 되어야 만 교감이 배치됨으로
내년 신학기에는 한 학급 반이 늘 계획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천재동 고집불통이지만 꼼짝없이
앉은 제자리에서 교감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해서
남천국민학교로 사령 내린 것이다.
남천 황(黃)교장은 직원 사택까지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네 청년들로부터 학교 뒤 송림 잔디밭에서
베풀어준 성대한 환영회는 지금도 고마운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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