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18. 어릴 때의 꿈을 이루려

무극인 2008. 1. 24. 16:47
 

* 어릴 때의 꿈을 이루려

남천동 청년들의 환영회 좌중에서

그 청년들이 의상을 제대로 갖추지는 않았지만

법구놀음(小鼓놀이)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 놀이 형태가〔동래지신(東萊地神)밟기〕에서 노는 소고놀이와 흡사 하였다.

 당시에는 남천동(南川洞) 포구(浦口)를 중심으로

밀수(密輸)가 호기로 성행했었는데

그들 청년 중 어느 누구는 화물차에 돈을 싣고

해운대(海雲臺)까지 달리면서 “내 돈 먹어라!”  소리치며

돈을 뿌렸다는 농담처럼 들리는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할 정도로

청년들의 호주머니 속에서 뭉치 돈이 들쑥날쑥 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날이 갈수록 초조해져 갔다.

얼마 후에는 제 자리에서 교감이 되고, 교감 자리에 앉게 되면

 그림도, 가면도, 토우(土偶) 연구 제작도 할 수 없게 된다.

교감이라면 학교를 내 집같이 드나들면서

학교 내외의 청소 및 환경정리 등등과

교직원 관리에 따른 여러 가지 교무 행정 일들이…….

나는 그 당시에 교감들만 쳐다보아도 고리타분하게 생각되었다.

나는 장차 미술가나 연극인으로 나아가야 되잖은가?

왜 내가 교감 질을 할 소냐! 여러 각도로 고심한 끝에 교육청을 찾아갔다.

 인사담당자를 만나서 내 개인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렇게 해 주기를 간청하였더니

상상밖에도 내 뜻을 좋게 받아 주는 한편

나의 장래 희망에 대해서 걱정도 해주었다.

‘다른 학교로 갈 것이냐? 어느 학교로 가고 싶으냐?’ 면서 정답게 대해주었다.

 1962년도 국민학교 야구대회(野球大會)가 끝나는 날까지만

남천국민학교에 근무하기로 약속도 받아 내었다.

희망하는 학교를 묻기에 동광국민학교(東光國民學校)라 했더니,

그곳은 문교부지정연구학교(文敎部指定硏究學校)인 관계로 일이 많으니

토성국민학교(土城國民學校) 허교장(許校長) 밑으로 가서

‘천선생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편안히 근무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면서

전근(轉勤) 갈 학교까지 미리 결정하여 주었다.    

 

* 천재동이 야구를 해!?

남천교에 부임 하여 아동들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내 눈에 돋보이는 것은 야구(野球) 글러브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었는데, 그 수는 많았다.

아동들의 거주지와 환경을 조사해 보니

학구(學區)인 남천동(南川洞), 광안리(廣安里) 곳곳에는 고아원(孤兒院)이 많이 있었고,

고아원에서 통학하는 많은 아동들은 대개가 야구 글러브, 배트는 물론 야구공은 무진장 많았다.

그래서 자질이 있어 보이는 아동들을 불러 모아 선발하고

남천야구부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1루수(一壘手)와 포수(捕手)는 기본 기량을 갖춘 아동이었다. 

모두 불러 모아 보니 완벽하게 갖출 수 있었다.

그 당시 부산 시내 야구부를 둔 학교 중에는 토성(土城),

동광(東光), 대신(大新), 대연(大硯)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었다.

 대회 날이 가까워 왔는데 야구복이 없는 것이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학교장과 변전소 소장, 세 사람이 남천주조장(南川酒造場) 박사장(朴社長)을 찾아뵙고

 야구복 15벌을 기증할 것을 권유하였더니

단번에 승낙하고 격려의 말씀도 아끼지 않았고

 선수들이 마실 음료수 까지도 제공하여 주었다.

시합 날이 다가왔는데 공교롭게도 작년도 우승팀인

 대연교와 첫 게임을 대연교 교정에서 붙게 되었는데,

결과는 보기 좋게 패전의 고배(苦杯)를 마시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부산시 국민학교 내에 토픽 뉴스 한 가지가 퍼져 나갔다.

“뭐! 천재동이 야구 한다 고요?!…….

청년 시절에 야구에 대한 애정이 너무 컸던 탓인지 패배의 쓴맛은 뚜렷이 기억난다.

 

* 활동 영역을 넓히다

남천국교에서 9개월 근무하는 동안 좋아했던

야구부를 아쉽지만 남겨 두고 서구(西區) 토성동(土城洞) 소재

부산시의 초등계 3대 학교의 하나로 손꼽히는

소위 대 토성국민학교(土城國民學校)로 전보 되어 갔다.

정말 허립(許立)교장께서는 환영해 주셨다.

4년 동안의 재임(在任) 교(校)인 토성에서

나의 판도는 비로소 변화해 가기 시작했다.

당시 부산의 예술계는 아직 빈약했다.

김목운(金木雲) 부산예총 사무국장의 권유로 미술협회에 가입했는데

그때부터 예술계, 언론계, 기타 관계되는 많은 인사들의 접촉이 이루어 졌다.

광복동(光復洞), 남포동(南浦洞)거리 등,

나는 부산이라는 큰 사회에 눈을 뜸과 동시에

사회의 매력을 하나씩 느끼기 시작하였다.

대학촌(大學村), 갓집, 여러 통술집과 다방을 드나들게 되었고,

결국은 나의 활동 영역의 중심은 광복동(光復洞)이 되어 버렸다.

이곳 광복동(光復洞) 거리에서 과거 교육자치제(敎育自治制) 축하 행사 때

 길놀이 연출을 맡아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고,

이를 만세 동작으로 조정하여 관계자들은 물론

시민들을 놀라게 한 일이, 엊그제 일 같았고,

동극(童劇) 경연 대회에서는『시골 쥐와 도시 쥐 』,

『노래 주머니』등을 발표해서

 당시 심사위원(審査委員) 먼구름 한형석(韓亨錫) 교수와

조유로(曺有路) 선생으로부터 찬사와 함께 호평을 받은 일이며

특히, 한(韓)교수께서 나를 아우같이 아껴 준 것도 그때부터였다.

한국아동극연합(회장 주평)이 주최한《전국 아동극 경연대회》에서

 내가 지도한 가면(假面) 무언(無言)무극(舞劇)『두 마리의 당나귀』가

문교부장관상(文敎部長官賞)을 수상(受賞)하고

세 차례의 앙코르 공연으로 서울 연극계 친구들을 놀라게 하였다.

 

* 최초 아동극단 창단

1963년 10월 부산에서는 최초로

아동극단(兒童劇團)【갈매기】를 정식으로 창단 하였다.

 시내 각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협조 하에 아동들을 모집하였는데

 백 명이 넘는 아동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이 아동 자신의 의사보다도 학부모의 적극적인 관심에 이끌려 참여하였다.

동광동(東光洞)에 위치한 남일초등학교 강당에 첫 소집을 갖고

간단한 리허설을 거쳐 삼십 명의 단원을 선발하였다.

곧바로 연습에 들어갔는데 연습 장소가 마땅치 않아

수소문 끝에 충무동(忠武洞)에 사용하지 않는

허름한 상가 건물 주인의 배려로

상가 건물을 연습 장소로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2개월간의 연습을 거쳐 12월에 주평(朱泙)작 천재동 연출(演出)로

『파랑새의 꿈』을 광복동 미화당(美花堂)홀에서 막을 올려 아동,

학부모, 교사 등 관람객이 공연장을 빈틈없이 가득 메운 가운데

나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찬사를 받았다

파랑새의 꿈』은 본래

유치진(柳致鎭 1905~1974)의 작품인 성인(成人) 극『까치의 죽음』인데

주평이 아동극 물로 각색한 것이다.

당시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와 민족상잔(民族相殘)인 6.25를 거치면서

국민 정서는 메마르고 사회가 어수선한 때인지라

『까치의 죽음』은 나라의 꿈나무들인 아동들에게는

부적절한 연제(演題)라고 생각되어

나는 주평에게 양해를 구하여

 ‘까치’  를 ‘파랑새’ 로 그리고  ‘죽음’ 을  ‘꿈’ 으로 바꾸어

연제를『파랑새의 꿈』으로 새롭게 정하는 한편

시나리오도 부분적으로 손봐서 각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