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 고구마 껍질을 먹기로

무극인 2008. 2. 14. 12:11
 

20. 고구마 껍질을 먹기로...


* 성인극단 창단

 아동극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차원을 한 단계 높여서 가족극 성격을 띤

 성인 극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1970년 9월【드라마 센터 부산극회】를 창립하고,

 서울『드라마 센터』출신인 최철(崔徹), 김청(金淸) 등 동지를 영입하였다.

 제 1탄 공연은 [붉은 카네이션], 제 2탄 [위협],

 제 3탄 앙코르 [위협], 제 4탄 [흥부의 가족] 등으로

시내 다방, 샤롱 같은 대서『샤롱 드라마』형식으로 무료 공연하면서

가족연극 연구소로 명분을 세운 것인데

이와 같은 운동은 내가 젊은 시절에

공부 해 온 분야들을 어느 정도 발휘한 셈이 된다.

 교사라는 직업을 다소 망각하고,

 내 개인의 활동이 계속되는 동안에

두 분의 교장이 정년퇴임 하게 되었으며,

 세 번째 학교장이 부임하였다.

 직장에서 교재 연구 등 교사로서 본업에는 무관하고,

수업을 게을리 하며, 하지 않아도 되는 연극을 가르치고,

 틈만 있으면 교재 연구보다 그림을 그리고,

 탈을 만들고, 토우를 매만지고,

외부 사람을 불러 드려 연극에 관한 계획만 세우고

 전시회를 여는 등,

월사금 징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미 징수 금액은 다달이 월급에서 제하는 등

 천재동은 태만 교사로 이미 낙인이 찍혀 가고 있었다.

네 번째 부임해 오신 학교장은 전임 학교장으로부터

 나에 대해서 철저하게 인수를 받은 인상을 주었는데

 부임 초기부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노골적이었다.

 당시에 일류 상급학교에 진학 많이 시키는 교사,

월사금 징수 잘하는 교사,

 과외수업 열심히 잘하는 등등의 교사는 유능한 교사로 인정받았고,

그렇지 않으면 무능 교사로 찍히는 등등으로

 나는 교사로서 진퇴양난(進退兩難)의 귀로에 처한 나머지

 나의 입지(立志)를 결정해야할 시기에 다다른 것임을 깨달았다.

 

* 고구마 껍질을 먹기로

 토성국민학교에는 더 있을 곳이 못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교장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 뿐더러

전출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교육청에 전출을 희망하였더니

 거주지를 참고하여, 배려로 내 집과 가까운

 연지국민학교(蓮池國民學校)로 전보발령을 내주었다.

부산진구(釜山鎭區) 연지동(蓮池洞)에 소재한

연지교(蓮池校) 교장은 바로 학교와 이웃한 초읍동(草邑洞) 토박이

 손씨(孫氏)였는데 가문의 문중을 둔 분으로

주위로부터 덕망이 높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면서 부임을 대 환영으로 맞이해 주었다.

하루는 교장이 점심을 같이 하자면서 자택 채전 밭에서

손수 채취한 겨울 초를 권하면서 하는 말이

“초읍동은 공기 좋고, 조용하고, 교통 좋고,

어린이 대공원이 있어 앞으로도 기대되는 곳이며,

인민군(人民軍) 비행기가 공습하기 어렵기 때문에

미(美) 하야리아 부대(部隊)도 여기에 있지” 하면서

 또 “천선생 어때, 내 이 밭 한 조각 줄 테니

 집은 자네 돈으로 짓고 평생 나하고 같이 살아 보자구나”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전포국민학교 시절부터 나를 눈여겨보아 온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 초읍동에 살고 있는 이유는

 손 교장의 정다운 말씀을 받아들인 이유도 있는 것이다.

 나는 이 학교에 부임한 후로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 이사의 한 사람으로서

모든 정성을 쏟고 있을 때라 교육자로서의

사명감은 완전히 상실되고 만 것이다.

교육계에서 조금만 더 고생하면 퇴직금으로

여생을 쉬면서 조용히 보낼 것이냐?

 아니면 광대 꾼이 되어 평생 고구마 껍질만 먹을 것이냐?

자문자답으로 고심 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내가 어릴 때부터 하고자 결심하여 왔던

 미술과 연극, 이것을 이루는 것이야 말로 내 꿈을 현실화시키는 것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고구마 껍질 먹는 것을 택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 교육감과 작별하고

 학교장에게 사직서를 제출 할 때마다

“정신 차려 다시 한번 생각 해봐!” 하면서 받아 주지를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교육청에 달려가서 사직서를 제출하였으나,

마찬가지로 받아 주질 않고

“동래야류가 지게목발놀이보다 재미없는 것인데 뭐할라고 할라하노!” 하면서

교육감은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어느 날 교육청으로 갔더니 마침 교육청 현관 앞길에

전 직원들이 두 줄로 서서 있기에 그 분위기를 알아보니

 이윤근(李潤根) 교육감의 행차 때문이라 하기에 잘 됐다고 생각하여

교육감이 차를 타고 떠나는 순간 자동차 속으로

사직서를 집어 던져 넣어 버렸으니,

 나의 교직 생활의 찬란한 막이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 날이 바로 25년 전 사령 받은 일자와 꼭 같은

 만 25년 되는 1969년 10월30일 이었다.

 그 뒤로부터 나는

커다란 도구 가방을 메고 출근하는 곳은 교문 아닌

 주소도 번지도 없는 한 민간단체,

전통 민속놀이를 한다는 탈놀이 광대를 찾아다니는 것이

 나의 하루 일과였다.

내 나이 54세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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