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다이쇼깡(大正舘)
일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시바이고야(芝居小舍)”란
옛날 거지들이 하는 일이 없고 심심한 나머지 모여서 연극을 하게 되었는데
점차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자 잔디밭에 적당하게 집을 만들어 놓고
좀더 조직적으로 연극을 하게 된 데에서 이 집을 “시바이고야라 한다.”고 하였다.
“ 시바이”란 단어는 그 뜻이 연극이 되고 “고야 ”는 극장이란 뜻으로 오늘날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남사당(男寺黨)의 기원(起源)과 흡사하다.
대정관은 시바이고야 형식(形式)의 극장으로써
급하게 날림 공사로 지은 나머지 출입구가 있는
정면을 제외한 3면의 벽이 불에 까맣게 타서
간솔 구멍이 송송 나 있는 판자(板子)를 붙여서 만든 것이다.
공연(公演)이 있을 때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 구멍을 통해 무대 공연을 보려고 서로 다투기도 하였는데
모두들 얼굴에 까맣게 숯가루가 묻어 서로 마주보고 놀려주면서 즐기기도 하였다.
대정관은 우리 집에서 방앗간을 지나 50~60미터 거리에 있었는데
내가 출생한 1915년은 일본년도로 대정(大正) 4년이니까,
대정관 극장 건립은 내가 태어나기 3~4년 전의 일이다.
그 맞은편에는 양식(洋式) 목조건물(木造建物)인 세관(稅關)이 있었다.
서너살 철도 모르는 어린애이었지만 서사(書士) 김서방 등에 업혀
몇 차례 공연을 관람하였는데 휘황찬란(輝煌燦爛)한 불빛아래서
칼싸움하는 것이 신기하였고 “효시끼(拍子木) ”라고 하는
두 개의 나무토막을 부딪쳐서 소리를 내면
그 소리의 빠르고 느린 속도에 따라 우스꽝스런 몸짓과 함께
막을 열고 닫는 담당자의 모습이 재미있고 아주 인상적이었다.
9) 극장 “도끼와깡(常盤舘)”
여섯 살 서당강아지 무렵일 때 극장 도끼와깡이 건립되었다.
서당 강아지들은 공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건축 현장을 구경할 겸 진전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두들 궁금하여
건축 현장에 가까이 가보곤 하였고
우리 집에서는 100미터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던 관계로
공사 현장이 평소 우리들의 놀이터이기도 하였다.
외부에서 볼 때 건물 양식은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지마는
내부는 완전히 일본 시바이고야 형식(形式)이였고
특이한 것은 넓은 무대 좌측 하단(下壇)에는 하나미찌(花道)라고 하는
골마루 형식의 무대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가다(花形) 즉
으뜸가는 배우만이 등·퇴장할 수 있도록 만든 일본만의 특수 무대인 것이다.
2층 객석은 다다미를 깔아놓았고 아래 1층 객석은
네 사람씩 앉을 수 있도록 칸을 질러 벽을 쌓아두었다.
입장표를 사서 극장 내에 들어서면
신발을 담당하는 사람 즉 게속구(下馱)에게 신발을 벗어 맡기고
좌석 번호표를 받아서 지정된 좌석을 찾아 앉는다.
가족단위나 친구들과 입장했을 경우에는
한 칸을 모두 차지하게 되는데
따로 대가를 지불하고 방석과 화로(火爐)는 물론
간단한 술과 안주도 제공받는다.
화로 불에 청주를 따뜻하게 데워 마셔가면서
관람하는 분위기는 정말로 진지하고 정겹다할 수 있다.
음식물을 판매하는 이동(移動)여인들을 “우리꼬(賣子)”라고 부르데
이 여인들이 객석에 질러놓은 칸 위로 숙련된 재주로
줄타기하듯이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광경도 볼거리 중의 하나였다.
하나미찌(花道)에 하나가다(花形)가 등장하면
관객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환영하였고,
연극 中 사이사이에 “ 미에오 기루 ” 즉 극적인 동작과 표정
그리고 특이한 자세를 취하는 등 희노애락(喜怒哀樂) 장면이
극명(克明)한 경우에는 관중들이 환성(喚聲)과 함께
휴지에 돈을 싸서 무대를 향해 던지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때는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극장 도끼와깡은
연극공연과 영화상영 두 가지를 할 수 있도록 시설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 극장에서
나운규(羅雲奎)의 아리랑, 임자 없는 나룻배, 세 동무, 낙화유수와 같은 방화(邦畵)를 보았고
연극인 김소랑(金小浪), 윤백남(尹白南) 등등 그리고 오양극단(五洋劇團)은 물론
일본, 미국, 불국(佛國) 영화도 보았다.
영화 개봉 때는 주연급 영화배우들의 무대 인사를 받을 정도로
고급 연예인들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특히 일본의 분라구(文樂), 가부기(歌舞技)
그리고 우리 고장의 시로도개끼(素人劇), 학생극도 이곳에서 관람하였고
당시 16세인 내가 만든 극
“ 부대장(部隊長)”이 여기 도끼와깡(常盤舘)에서 공연되어
천재동(千在東)을 天才童으로 부르게 된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10) 동맹휴학(同盟休學)
네 살 때 기미년 만세운동이 지축을 흔들었으니까
한해 전인 1918년으로 기억되는데,
방어진에는 일인들의 어업기지(漁業基地)인 관계로
자연이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였고 타지방과는 여건이 달랐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전함이 순항하면서 은근히 위협하였고
육지에는 어깨에 장총을 메고 긴 칼을 찬 수비대(守備隊) 소속인
2인의 기마병(騎馬兵)이 때때로 순시하였다.
우리 한인들은 기마병이 온다는 소리만 들으면 곧잘 뒷산으로 피신하곤 하였다.
1926年 6月 10日 조선 제27대 순종(純宗)임금 국상일(國喪日)에
우리는 정상 등교하여 수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 날의 경로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 전국 각급 학교는 일주일 간 동맹휴교 하라!”는
비밀지령(秘密指令)이 접수되었고,
배부해준 공책에 “ 만세” 혹은 “ 독립” 같은 각자 생각나는 대로의
구호를 기재(記載)하고선 책보자기를 어깨에 매고
전교생 모두가 학교 뒷산으로 도망을 친 것이다.
당시 남목보통학교(南牧普通學校) 상급생인 6학년에는
어른들이 많았는데 어린 하급생인 우리들에게
동맹휴학 동안에는 학교에 가지 말 것을 수차례 당부하였지만
3~4日이 지난 즈음에 순진한 마음에 학교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방어진 아이들은 네댓 살 위인 김부윤(金富潤)의 주동 하에 놀러갔었다.
학교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이 적막하기만 하여
우리들은 그대로 되돌아 온 것이다.
동맹휴학 일주일을 모두 채우고 전교생은
일단 낙화암(落花岩)에 총집결 하라는 연락을 받고
정해진 시간에 낙화암으로 갔더니 상급생 어른들이
어린 우리들을 한사람 한사람 호명하여 전교생 앞에 세우더니
준엄한 모습으로 약속을 배반하고 학교에 간데 대하여 꾸짖고 문책하였다.
겁에 질린 우리는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김부윤이 주동하여 따라만 갔다고 대답하였더니
김부윤을 엎드리게 해놓고 몽둥이로 궁둥이를 마구 때려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일장 연설을 하는 가운데에
일제의 간악(奸惡)함을 맹렬이 비난하고
김부윤의 어리석은 행위에 대하여 크게 꾸짖는 것이었다.
이곳의 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김종국(宋鍾國), 김재근(金在根) 외 여러 선생님들이
두 대의 하이야(택시)를 타고 오시더니
엄숙하게 전교생을 향하여 훈계하시는 가운데
참 잘했다는 암시도 주시면서 끝으로 내일부터 등교하라고 명한 것이었다.
낙화암이란 오랜 옛날 바다와 접해 있을 때
선비들이 기생과 더불어 노닐던 송림이 울창한 경치 좋은 유원지였다는데,
전설에 의하면 어느 날 선비와 함께 놀던 꽃처럼 예쁜 기생이
실족(失足)하여 바위에서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하여
낙화암(落花岩)이라 하고,
그 기생의 녹색 저고리가 떠내려 온 해변(海邊)의 마을 이름을 녹수(綠水)라고 전하여 온다.
11) 어린 날의 낚시
4월이 가고 5월이 되면 우리 소년들이 모여서 낚시 갈 계획을 세운다,
필요한 도구 및 용구들을 각각 분담을 정한 후에
준비품을 완비하여 상진(上津)마을 앞 바다로 간다.
물 속 무릎 높이까지 들어가서 삽으로 모래를 떠서
소쿠리에 담으면 소쿠리 담당아이는 물 속에서 흔들어 거르면
10센티 이상 길이의 “ 거(바다지렁이)”가 소복이 남는다.
또 다른 아이가 거를 집어 옆구리에 차고 있는 나무상자에 넣어 모은다.
거는 바다고기들이 제일로 좋아하는 먹이로서 두 종류가 있는데
바다 물 속에서 건져내는 것을 “ 참거”라 하고
바닷가 모래 속에서 파낸 것은 “갈거 ”라 한다.
갈거는 2등품인데 그 가치성이 떨어진다.
참거는 1등품이다.
우리는 건져낸 참거를 뭍의 양지바른 황토 속에 묻어두었다가
이튿날 손수 만든 낚시 대와 줄 등 준비품을 갖추어 매고 최종 목적지로 떠나기에 앞서
참거를 묻어둔 곳에 가는데 주둥이를 흙 위로 내 밀고 있는 참거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을 공평하게 서로 나누어 가지고 삼섬(三島里)으로 간다.
우리는 먹으려고 낚시하는 것이 아니고 재미가 있어서 하는데
보통 노래미를 20~30마리 낚으면 이웃 집 돼지우리에 가서 돼지 먹이로 제공하면서 즐겼다.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삼섬에 낚시하러 갔을 때
하얀 상투 머리를 한 장(張) 할배가 먼저 와서
바지를 동동 걷어붙이고 물 속 바위에 올라서서 연신 노래미를 낚아 올리고 있었다.
우리들도 바지를 동동 걷어붙이고 저만치 떨어져서
낚시를 던졌지만 웬일인지 오늘따라 피라미 새끼 하나 입질하지 않았다.
우리는 할배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할배는 몸 방향을 바른쪽으로 돌려 낚다가,
왼쪽으로, 다시 바른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바쁘게 낚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들 쪽으로 바라보더니
몇 개뿐인 이빨을 내어 웃으면서
“ 예 이놈들아! 거기는 내가 다 낚아 올려서 한 마리도 없어!
내가 이야기 해 줄께, 저 백사장에 나가서 모여!” 하시고
또 “ 야 이놈들아! 너거는 장난으로 노래미를 잡지만 나는 묵기위해 잡는 거야,
너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 그것 봐라 노래미는 그렇게 잡는 것 아니야,
7년 가뭄으로 굶어 죽은 사람도 많았지만
우리 식구는 노래미를 잡아 묵고 살아남은 거야,
너거들이 그 당시에 태어났다면
노래미 한 마리 잡지 못해 굶어 죽고 말았을 것이 뻔하다.
노래미 낚는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 잘 들어라” 하시면서
이어서 자세하게 말씀하셨다.
“먼저 아랫도리를 동동 걷어 올리고 나서 물 속 바위를 징검다리로 하여
깊숙이 들어가서 노래미가 모여들만한 장소 서너 곳을 선정하여
참거를 봇돌에 붙여 낚시 바늘이 달린 노끈으로 칭칭 감아
꾹꾹 눌러 고정시킨 것을 정한 장소에 풀어놓는다.
이것을 〈푸름〉이라고 하는데 냄새를 맡은
노래미들이 모여들 것이 뻔한 일이 아닌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차례차례 모두 낚아 올리는 거야,
내가 그런 푸름을 했기 때문에 너희들 한 마리도 낚지 못한 거야,
너희들 앞으로 그런 방법을 쓰되 가까이 한곳에 몰려 낚시질하면 안 돼!” 하시던
장(張) 할배의 모습이 추억이 되어 눈앞에 아른거린다.
12) 꿈은 환쟁이
내 사촌 누님이 돌석 너머 김씨 댁으로 시집가고
그의 시동생 김부윤(金富潤)은 나보다 4~5세 많은 나이였지만 한 학년 상급생이었다.
부윤형의 희망은 사범학교 진학이었다.
학교에서는 우등생이요 집안에서는 셋째 아들로서 사랑을 받았다.
우리 집에서 생활하기로 이야기가 잘 되어
내 방에서 침식을 함께 하면서
철 부족한 보통이라는 별명이 붙은 나의 든든한 후견자가 되었다.
형은 밤중에 냉수를 뒤집어써가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였는데
그만 불합격하고 말았다.
그렇게 알뜰하게 공부하던 부윤 형이 희망했던 상급학교에 붙지 못한 것을 보고
나는 상급학교 진학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뿐더러
상급학교란 이름조차도 듣기 싫었다.
그림만 잘 그리게 되면 환쟁이로서 성공할 수 있잖으냐는 어리석은 생각밖에 없었다.
13) 수염이 있어야 동권(同權)이지
동진의 촌장 김 촌장 아저씨는 뛰어나게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우리 집 마당에 사람들이 모여들면
나무 자루바가지에 검정 숯으로 전래인형극에 등장하는
박첨지, 홍동지의 얼굴처럼 표정을 그려놓고
노래를 불러가면서 박첨지놀음을 멋지게 하기도 하였다.
오늘도 우리 할머니께서 노란 참외 한 지게를 30전 주고 몽땅 사서
집에 놀러온 사람들에게 나누어 먹도록 하였다.
김 촌장 아저씨가 대중 앞에 나서서
“ 엄마요 고맙게 잘 먹겠습니다 마는, 엄마부터 먼저 잡수셔야 우리들이 먹지요,
맛있게 먹을 꺼요? 배부르게 먹을 꺼요?”
“ 그게 무슨 말고?”
“예, 맛있게 먹으려면 껍데기를 두텁게 깎고, 배부르게 먹으려면 얇게 깎고요 ” 등
이렇게 즉석에서 말과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어느 날 오후 김 촌장 아저씨가 오늘도 우리 집에 와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는데
아저씨의 부인이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 헐레벌떡 우리 집 마당에 들어섰다.
몹시 놀랜 할머니는 식구들에 명하여 장독간에서 된장을 떠오게 하고
상처부위에 바르고 헝겊으로 동여매주었다.
아주머니는 대단히 흥분한 어조로
“ 남자가 해야 할 일을 여자가 왜 해야 하노! 천날 만날 술만 처먹고 집안일은 하지도 않고 …
니가 할 일을 내가 하다가 그만 대가리 깬거 아이가!
니가 자꾸만 그라모 나도 술 먹고 놀러 다니겠다. 어무이요 나 술 한잔 주소!”
“안들년이 미쳤나! 이거 무슨 꼴고! ”
“와! 남녀동권아이가? 여자는 사람아이가!? ”
“ 뭐! 남녀동권!?”
“ 그래, 남녀동권이다! 어짤라노!”
“ 좋다! 남녀동권하자, 수염만 붙여 오너라!”
“ 그거 무슨 말고?”
“수염 없이는 동권이 안 된다,
동권을 찾으려면 수염만 붙여오면
언제라도 동권해주지마는 수염 없이는 동권자격이 없어!!”
주변 사람 모두가 웃기만 하였다.
부부간에 이렇게 긴박한 분위기에 처하여서도
화를 내지 않고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여유로운 김 촌장 아저씨였다.
14) 두 춘화(春華)
우리 집과 담을 사이에 두고 부자(富者) 장춘화(張春華)씨가 살았는데
장씨는 자식을 낳지 못하여 호화스런 새 살림과 집을 장만 하여
소실(小室)을 두었지만 소실마저도 자식을 갖지 못하자 하는 수 없이
가형(家兄)의 장남(長男) 장덕수(張德守)를 양자(養子)로 입적(入籍)시켰다.
그런데 뜻밖에도 본처(本妻)가 덕기(德基)를 출산(出産)하고
이어서 딸 덕순(德順)이 까지도 얻게 되었다.
내보다 몇 개월 후에 태어난 덕순이와 나는 어린 날을 형매(兄妹)같이 친하게 보냈다.
덕기(德基)는 경성제2고보(京城第二高普)에 다녔다.
양자(養子)인 덕수(德守)는 양부(養父)로부터 담배 사 피우라며 받은 용돈 1원(圓)으로
담배 “ 마꼬”를 1갑사고 거스름돈 95전(錢)을 양부 장춘화(張春華)께 드렸는데
“ 이 융통성이 없는 놈아 언제 사람이 될라노!”
양부가 크게 호통을 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방어진 항 방파제에는 각처(各處)에서 낚시 애호가(愛好家)들이 모여들어
밤낚시로 도미를 낚으며 즐겼다.
덕수는 4미터 정도 길이의 낚시 대(竹)를 장만하여
밤낚시로 방파제에서 즐기다 실수로 물에 빠져 불행하게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춘화(李春華씨는 제주도(濟州道) 출신(出身) 이면서도
출신지(出身地)를 의도적으로 숨기려하였다.
제주인(濟州人)들은 단결심이 강하고 길·흉사를 자기일 같이 도우며 상부상조(相扶相助)하였는데
이춘화씨는 협조하지 않는 등 자식 넷 모두를 육지(陸地) 처녀에게 장가보냈다.
제주(濟州)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자 외로움을 크게 느끼고,
후회하여 잔치를 베풀고 사과하였다.
셋째 아들인 이광삼(李光三)은 서울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다녔는데
퉁소를 잘 불어 유학생(留學生) 소인극(素人劇)에서는 연출(演出)을 담당했으며
퉁소로 음악효과(音樂効果)를 내는 명수(名手)이기도 하였다.
넷째 광호(光浩)는 나와는 동갑(同甲)인데 축구 수비수(守備手)로 활약했으며
형을 닮아서인지 서양악기(西洋樂器) 클라리넷을 잘 불었는데
선원(船員)이 되면서 “마도로스파이프 ”가 아닌 “마도로스클라리 ”란 별명으로 불렸다.
직접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청진항(淸津港) 정박(碇泊) 중에,
달 밝은 밤 선상(船上)에서 클라리넷을 불며 향수(鄕愁)를 달래고 있는데,
갑자기 박수갈채 소리에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정박 중인 다른 배 선원들과 남녀 주민(住民)들이 모여 있었다는 것이었다.
15) 양(梁)접장 일가(一家)
남향한 우리 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방앗간이 있었고
, 마당 동편에 대문이 있었다.
대문 앞에 남북(南北)으로 뻗은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두 갈레에서 서편으로 난 길이 남편으로 호(弧)를 그리며 이어지는 도로 양쪽에
우리네 집들이 마주보며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그 집들 중 큰집과 셋집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서당(書堂) 양(梁)접장의 형(兄)되는 사람이다.
학자이면서 아들 둘과 딸 셋을 두었는데
아쉽게도 오래 살지 못하고 일찍 타계하고 말았다.
큰 아들인 양○○은 일본(日本) 시모노세끼(下關) 오프셋인쇄소(offset印刷所) 직공(職工) 이었고
그 동생인 양조복(梁曹福)은 내보다 네 살 연상(年上)이었지만
우리또래 아이들을 좋아하며 잘 어울렸다.
만들기, 그리기를 잘 하면서 과학 발명 분야에도 재능이 뛰어나
어묵 만드는 분쇄기(粉碎機)를 만들고,
두 목판(木板)에 음각(陰刻)하여 납(鑞)으로 주조(鑄造)한 양면(兩面)무늬 메달을 만들어
우리들 허리띠에 달아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리에 그린 그림을 비춰보여 주는 환등기를 만들었고,
30센티 쇠파이프 두 곳에 구멍을 뚫고 그 곳으로 성냥 황을 가득 채우고
심지로 발화(發火)시켜 폭발시키는 등 여러 가지로 우리들을 즐겁게 하여
우리들이 소년축구단을 조직하였을 때 단장(團長)으로 모셨다.
보통학교졸업 후 형(兄)을 따라 시모노세끼에서 오프셋인쇄 술을 습득(習得)하여
「송본(松本) 오프셋정공사(精工舍)」간판을 내걸고 독립(獨立) 개점(開店)하여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하(下)에 통제(統制) 정비(整備)대상이면서도 용케 벗어나
유일(唯一)의 인쇄소(印刷所)로 남았다가 광복(光復)이 되기 전(前)에 정리하고 귀국(歸國)하였다.
광복축하기념삼인전(光復祝賀記念三人展)의 한 사람이기도한 양조복(梁曹福)은
누이동생 양남선(梁南先)이 있었는데,
남선 누나는 내가 보통학교 1·2학년 2년 동안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일찍 집에 와서 비대(肥大)하고, 행동이 둔한 나를 도와
손을 꼭 붙잡고 15 리(里) 등(登)·하교(下校) 길을 다녀 준 잊을 수 없는 누나이다.
16) 갓집
양조복(梁曹福)의 집에서 한·두 집 건너 길가에
“ 갓집”이 있었다.
갓집 어른은 잠 잘 때와 식사 때 외에는 항상 갓을 쓰고 생활하였기 때문에
남녀노소 주민 모두가 갓집이라 불렀다.
갓집 어른의 외동아들 이봉은(李鳳恩)은 나와 동갑이면서
이웃에서 같이 성장하여 친형제처럼 지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재동 재동 天才童(천재동)!, 방어진에 天才童! ” 하며
노래조로 처음 외친 이가 이봉은 이었다.
이봉은이 4촌형인 이대길(李大吉) 소유(所有) 발동선(發動船) 발동기(發動機)에
한 쪽 다리가 절단되는 불행한 사고를 당하게 되고 말았다.
생명은 건져 다행이었지만 끝까지 불행을 극복하지 못하고
비관 끝에 결국 자살(自殺)로 아까운 청춘을 마감하였다.
17) “도라 네 ”
이봉은(李鳳恩) 집 뒤편 서쪽으로 둘째 집이 도라네 집이다.
일본(日本) 사람들이 한인호(韓寅浩)의 이름자 중에
부르기 좋게 인(寅) 자(字)만으로 일본말로 “도라(とら) ”라고 호칭(呼稱)한데서 비롯되어
모든 사람들이 인호(寅浩)를 “도라 ”라고 불렀다.
한인호(韓寅浩)는 방어진(方魚津) 소인극단(素人劇團) 단원(團員)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면서
“ 나까무라” 역(役)을 맡아 일약 유명해졌는데,
이 연극은 나까무라(中村)라는 한 남자가 기생(妓生)에게 반해
생사(生死) 분별을 못하고 어리석게 구는 것으로,
어리석은 일본인(日本人) 풍자한 극(劇)이다.
한인호(韓寅浩)보다 더 유명한 분은 그의 부친 한(韓)어른이시다.
신장(身長)이 늘씬하게 큰 모친(母親)에 비해
작달막한 키에 카이젤 코수염에다 이마 높은데 까지 면도를 하였고
곱슬머리위에 중절모(中折帽) 쓰고, 두루마기 차림에, 빨간색 구두를 신고, 벚나무 지팡이를 짚었다.
그 벚나무 지팡이를 그냥 멋지게 짚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1미터 앞 땅바닥을 지팡이로 견주고 다닌다.
혹 빨강 구두에 상처가 생길까 봐 돌이나 나무막대기 같은
장애물들을 지팡이 끝으로 제거한 후에야 비로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첫눈에 카이젤수염 끝이 위로 치켜 올라간 엄숙한 표정,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차림세에서 누구나 호감(好感)이 가는 어른이지만,
몸차림 외에는 아무 할일이 없는 몸치장 꾼일 뿐이었다.
18) “오끼아이(沖合)”
오끼아이란 전술한 봐와 같이 고등어 잡이 건착선(巾着船) 망대(望臺)에 올라
고기떼를 탐지하는 임무를 띤 선장(船長) 보다 상위(上位)에 있는 선원(船員)이다.
도라네 집에서 조금 더 골목으로 들어가면
큰 대문에 머리카락을 곤두세우고 칼을 든 무서운 신장상(神將像)이 그려진 집이 오끼아이 집이다.
대문의 그림은 잡귀(雜鬼) 잡신(雜神)의 침범(侵犯)을 막기 위해 그린 것이라 하였다.
오끼아이 부인은 알슴알슴 마마자국이 있는 얼굴이지만
미녀(美女)로 소문 난 기생(妓生) 출신이다.
가정주부(家庭主婦)로서 손색이 없고 고상(高尙)하여
우리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양어머니 중의 한 분이시다.
오끼아이는 직업상 해양생활(海洋生活)을 하고 있는 관계로
부인(婦人)이 그녀의 석수와 석○ 두 남동생과 함께 그 넓은 집을 관리하고 있었다.
형(兄)되는 석수는 연(鳶) 만들기와 날리기를 잘 하였는데
설날을 전·후하여 우리 형제에게 연 만들기를 도와주었고,
날리는 방법으로 후리치기, 탱금주기(통줄주기), 끊어먹기 등 여러 가지 재주를 가르쳐주었다.
석수는 파란 하늘색을 칠한 방패연(방구연)을 창공 높이 멀리 날려서
다른 연들의 연실을 모조리 끊어먹었지만
우리형제가 날리는 연에는 해를 끼치지 않았다.
19) 지리(上津) 최씨
육헌(六憲)이네 집 가까이에 히나세(日生人)골목이 있었다.
골목 길 양쪽으로 목조 2층 건물이 마주보며 빽빽이 들어서 있었는데
대부분이 고등어 잡이 건착선(巾着船) 선원들의 집이었고 몇몇 곳에 가게도 있었다.
히나세 골목에서 한참 가다가
윤준이(尹俊伊) 집 왼쪽 담을 따라 올라가는 돌계단이 고야산(高野山) 절(寺) 입구이다.
고야산 절은 일인(日人)들이 사자(死者)를 모시는 곳으로
납골당(納骨堂) 역할(役割)을 하는 것인데,
일본(日本) 본사의 위상(位相)이 대단한 것 같이 느껴졌다.
일본(日本) 본토(本土)에서 고야산의 승려(僧侶)를 양성(養成)하는 기관(機關)이 있었는지,
우리나라와 같은 스님 머리가 아닌데다
일식(日式) 평복(平服)에 가사(袈裟)만 둘린 젊은이들 2~30명이 실습 차 오기도하였다.
고야산 계단을 따라 내려와 서쪽으로 나아가면
히나세 인들의 큰 주택들이 틈틈이 보이면서,
제주도(濟州道) 출신 시찬(詩讚)이란 사람의 넓은 주택이 있었다.
지리(上津) 바닷가에서 복지불을 향해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모퉁이에,
디딜방앗간이 있고 넓은 마당과 큰 초가집은
어업조합에 근무하면서 호농가(豪農家)인 최익호(崔益浩)의 주택이었다.
최익호 맏형은 나의 이모부이셨고 돛배 어선(漁船) 어부(漁夫)였는데,
이모(姨母)께서 임신(姙娠) 중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풍파(風波)를 만나 불행하게도 익사(溺死)하자 동생들이 달려와서
그 배를 때려 부셔버렸던 것이다.
이모는 아기가 젖이 떨어지자 바로 불국사(佛國寺) 부근 어느 댁으로 재가(再嫁)하고
내보다 5개월 늦게 태어난 유복자(遺腹子) 최임철(崔任哲)은
부모의 얼굴도 모르는 채 삼촌들의 보살핌으로 자랐다.
최익호는 유식자(有識者)로 방어진의 유지(有志)였으며
아래로 쌍둥이가 있었는데 외모가 너무 닮아서 그냥 보아서는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쌍둥이 형은 말 수가 적고 내성적이었으나 아우는 유머가 풍부하였고
특히 사람이나 동물, 자연의 소리 등의 성대모사에는 귀재(鬼才)여서
동내 청년 소인극단(素人劇團)에서 음악외의 모든 음향효과(音響效果)를 담당하면서 단원으로 활약하였다.
최임철은 일본에 건너가 장가도 들고 행복하게 살다가
불행하게도 뜻하지 않은 국제매독에 걸려 아내와는 이혼을 하고,
치병(治病)에 전력을 다하며 지내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6·25가 발발하자 기왕 죽은 목숨, 애국의 정신으로
공산군(共産軍)과 싸우다 전사(戰死)하는 것이 도리(道理)라 생각하고
30여세에 지원(志願) 입대(入隊)하여 최일선(最一線)에서 토이기(터키)부대와 합류하여 싸웠는데
“토이기 부대 병사들은 군복(軍服) 오바코우트를 걸친 채
총탄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데도 뻣뻣이 선 자세로 싸웠고,
총탄에 맞아 쓰러질 때도 비명(悲鳴) 한 마디 없더라 ”하였다.
죽어 넘어진 병사(兵士) 자리에서면 틀림없이 총탄에 맞아 죽어지리라 생각하고
그 자리에 써 봤지만 총알이 피해 가드라는 것이었다.
결국 부상(負傷) 당한 곳 없이 훈장까지 타고 제대하여
병(病)의 악화(惡化)로 신음하다 70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20) 대문(大門)집
최익호(崔益浩) 집에서 서남쪽 백사장 부근에 히나세(日生人) 집이 몇 채 있었고,
모래톱을 따라 조금 동진(東進)하여 가고시마조선소(碌兒島造船所)를 지나서
더 가면 백양산(白陽山) 서쪽 기슭에 닿게 되는데
최고 양질의 미역이 생산되는 작고 큰 곽암(藿岩: 미역 돌)들이
수면(水面)에 얼굴을 자랑스럽게 내 밀고 있었다.
해저 모래밭에 서식(棲息)하고 있는 지렁이를 떠내느라
낚시꾼들이 발가벗고 삽질하는 광경을 볼 수가 있었고
미역 돌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는 노래미 낚시에 더 좋은 장소여서 낚시꾼들이 모여들었다.
곽암에서 또 서향(西向)하면 미나리 밭과 공동우물이 있었고
우물 서편에 초가삼간도 크거니와 유별나게 대문이 큰 집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집을 “대문 집”으로 불렀다.
대문 집 할아버지는 기세(氣勢)가 매우 당당한 분이었다.
어느 날 우리 아이들을 불러놓고 이가 없는 입을 크게 벌려 너털웃음도 지어가면서 하시는 말씀이
“ 이놈들아 너거 일본 말 잘하지 응? 오도레 키사마가 무었인지 아나?”하였다.
“오도레”란 히나세 방언(方言)으로 “ 너, 이 자식아!”의 뜻인데
상대방을 욕되게 부르는 용어이고,
“키사마(貴樣) ”은 본래 고귀한 어른, 귀하 등으로 쓰이는 존대어(尊待語)인데,
지금은 절친한 사이나 손아랫사람을 얕잡아 부르거나 욕하는 말로 쓰인다.
“너거들은 모리끼다(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오도레는 5월 달이고
키사마는 기(게)를 삶는 다는 말이다.
에헴, 5월 달에 잡은 기를 삶아 묵우모(먹으면) 맛있다는 말이다. 허-허허 ” 이런 식으로
어른이나 아이들에게 농담을 하시면서 모두를 웃기는 어른이었다.
이 대문 집은 면장(面長) 김두헌(金斗憲)의 처가였고
외동아들 이규장(李圭丈)은 아형(我兄)과는 절친하게 지내는 사이로
필체(筆體)가 빼어나 글 받으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21) “ 긴도깨이 ”
대문(大門)집 사위되는 면장(面長) 김두헌(金斗憲)의 집안을
“ 백원네”라 불렀고 부친(父親) 되는 어른을 우리 아이들은 “ 백원네 할배”로 호칭(呼稱)하였다.
당시 돈 백원(百圓)은 엄청난 액수였는데,
부자(富者)여서인지 아니면 할배의 인품이 훌륭하여 비유적인 표현해서인지
또는 성함(姓銜)의 발음에서 유래 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백원네로 불렸다.
백원네 할배의 아들인 김두헌은 면장 직에 있으면서도
일인(日人)들에게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일인 측에서는 솔선수범(率先垂範) 창씨개명(創氏改名)할 것으로 믿었지만
의사(意思)가 보이지 않자,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하여 협박까지 하였다.
끝까지 창씨개명에 불복하자 오히려 존경하는 뜻으로 “ 긴도깨이(金時計)”라 불렀다.
金斗憲을 일본 발음으로 “ 긴도-깽”이 되는데 일본인 그들만은 긴도깨이라 부르면서 그들의 자존심을 지켰다.
22) 변(邊) 감찰(監察)네 굴뚝
공적(公的)이나 사적(私的) 어느 경우에도 예상치 못하였던 큰 일이 발생하였을 때
사람들은 입을 모아 “ 야! 변 감찰네 굴뚝같구나”로 표현하였다.
누군가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소문을 듣게 되면 즉시 “ 야! 변 감찰네 굴뚝같은 사건이로구나!” 하였고
뜻밖에 좋은 일이 생기면 “ ”야! 변 감찰네 굴뚝같이 기쁜 일이구나! 등으로 말들을 하였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변씨(邊氏) 집안 조상(祖上)되는 분 중에
감찰(監察) 벼슬을 하였다하여 감찰(監察)네라 불렀는데,
감찰네의 어른 되는 변씨는 품위가 있고 신임도 두터워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넓은 주택에다 특히 함석으로 만들어 세운 굴뚝이 놀라울 만큼 엄청 커서,
놀라움을 표현할 때 “변 감찰네 굴뚝 ”을 끌어들여 최상의 감탄사(感歎詞)로 사용한 것이었다.
23) 걸부(乞富)네
방어진이 활발히 개척될 당시에
“ 방어진에는 개가 십 원짜리 돈을 물고 다닌다” 는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내륙(內陸) 멀리 경북 지방의 머슴살이꾼,
거제도(巨濟島)를 비롯한 도서지방(島嶼地方) 어부(漁夫)들도 모여들어
매축, 토목공사 등 여러 공사에 인부(人夫)로 종사하였다.
팔도에서 모여든 각설이꾼, 거지들도 거리나 공사장 부근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당시에
큰 기와집을 짓고 2남 1녀를 둔 부자(富者)집을 사람들은 공공연히 “걸부네 ”라고 불렀다.
“ 거지부자 집” 이란 뜻인데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아이를 업은 여자와 초석거적을 어깨에 맨 남자, 거지부부가
방어진에 흘러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집을 짓고 살림을 장만하고,
말쑥한 옷차림에, 남자는 머리에 탕건(宕巾)까지 쓰고 긴 담뱃대를 물고 부유함을 과시하는데,
걸식하러 거리와 가가호호(家家戶戶)를 다니다가 거액(巨額)의 돈뭉치를 주웠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추측하여 꾸며낸 얘기겠지만 거지로 흘러들어온 것만은 틀림이 없다고들 하였다.
장남(長男)인 이경술(李庚述)은 “오-꾸시공의병원(大串公醫病院) ” 의생(醫生)으로 종사(從事)하면서
성장하여 장가들고 자식까지 봤지만 끝끝내 “걸부네 아들 ”로 불려졌었다.
24) 문재(門嶺洞) 박씨
우리 집 앞 신작로(新作路)에서 서행(西行)하여 내리막길 끝에 다다르면
왼쪽은 선창(船艙) 상가(商街)로 가는 길이요,
오른쪽 넓은 길은 청루(靑樓)골목 길이다.
그리고 정면에 보면 금융조합이 있는 네거리 왼편 길은 경찰주제소로 가는 길이요,
서행(西行)하면 지리(上津), 오른쪽으로 북상(北上)하면
흙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서있는 곳이 바로 “문재동네 ”이다.
문재동네에 도달하기 전에 탱자나무 울타리에
폐허된 과수원의 반대쪽 남측 조금 낮은 지대에 있었던 연지(蓮池)와 장수(長壽)나무는 유명하였는데
이를 보살펴온 문재의 덕성가(德聖家) 박시종(朴時宗)씨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죽림(竹林)에 둘러싸인 대농가(大農家)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
동생 되는 분은 상투를 매고, 명주 천으로 전통적인 양식의 머리띠를 둘러,
농부답지 않게 항상 깨끗한 차림으로 생활했으며,
사람들은 “ 빰대롱(밤道令)” 이라 불렀다.
둘째 동생인 시하(時夏)는 명주 바지 저고리위에 조끼를 걸친 멋쟁이 중에 멋쟁이였으며
축구도 하였고 연극 패에 어울려 무대에 서기도하였는데,
도박판에 들면 “유장(悠長)꾼 ”이 되기도하여 풍운아(風雲兒)였고,
사람들은 박 노랭이라 불렀다.
막네 운종(云宗)은 울산농림학교 출신으로 현대교육을 받은 인텔리였다
. 이마가 눈에 띌 정도로 삐뚤어져 “ 삐뚝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후보 축구단원이었고 육상선수로도 활약하였으며,
통도사학원(通度寺學園)이 주최(主催)한 축구대회에
내가 언양축구단(彦陽蹴球團)의 초빙(招聘) 선수로 가면서 대리고 간적이 있었다.
1980년대 운종의 며느리라면서 시원한 여름 모시옷 한 벌을 선물로 가지고 온 적이 있었는데,
“남편(운종의 아들)을 통해 선생의 고마움을 듣고 보답하기위해 손수 장만하여 왔다 ”고 하였다.
며칠 뒤 한복점을 경영한다는 광안리(廣安里)에 집사람과 함께 인사차 찾아갔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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