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35. 형 사망 속내

무극인 2008. 9. 7. 11:30

* 형 사망 속내

현필네는 나의 양(養)엄마이시다.

장남 현필의 이름에서 비롯되어 할머니께서 현필네라 불렀다.

 가정살림살이 가난한 편은 아니었지만 우리 집에 드나들면서

일손을 도와주시는 대가로 곡식들을 가져다가 생활에 보탤 만큼 알뜰한 여인이었다.

우리 할머니께서는 가정 경제사정에 개의치 않고 현필네를 손자들의 양모로 모셨는데

 그 이유는 우리 집안에 자식이 귀하기 때문이다.

튼튼한 아들 삼형제를 낳아 기르면서 착실하게 살아가는 현필네를

손자들과 가깝게 인연(因緣) 줄로 맺어줌으로써 후손 대대로

수복다남(壽福多男)을 성취하겠다는 할머니의 염원이 담겨있는 것이다.

내가 열 댓살 되었을 무렵에 현필네 양엄마 일가는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로 이주한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동경 홍고구 긴수깨�(本鄕區金助町)에서 하숙할 때인

 1943년도 어느 날 전보가 날아왔는데

그 내용은 “형 사망 속내 ”이었다.

너무 놀라서 앞이 보이질 않으면서도 내 숙소를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부랴부랴 낯선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여 주소를 들고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조선 땅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시장동네였는데 한복차림의 장사꾼들이 전을 펼치고 있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집 앞 넓은 마당에 들어섰을 때 양모께서 맨발로 뛰어 나와 반가이 맞아주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상심(傷心)한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하고 있는 가운데 양엄마와 현필형

그리고 식구 모두가 둘러앉았다.

양엄마의 이야기를 들어 본 결과,

 당시 수산업을 하시던 형님께서 시모노세키에 있는

일인(日人)이 경영하는 거래처에 가끔 수금(收金)관계로 오시는데,

이번에 와서도 일을 무사히 잘 마치고 수익금 일부를

고향 방어진에 송금하고 나머지 돈은 보자기에 싸 허리에 감아 메었다.

밤 11시에 출항하는 관부연락선 공고마루(關釜連絡船金剛丸)를 타고 떠난다고

하직 인사차 다녀갔는데 마침 그 연락선이 기뢰(機雷)와 충돌하여

 폭침(爆浸)하였다는 소식이 신문 방송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지자

양모께서는 너무 놀라 비통한 심정을 안고 서둘러 나에게 전보를 친 것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양모님 가족들 앞에

어찌된 일인지 아침에 벙글벙글 웃으며 형님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어제 승선하기 전에 일인(日人) 업자들에게 인사하러 갔더니

술 한 잔 대접하겠다는 성의에 못 이겨서 대접받았고,

답례로 형이 한 잔 사는 바람에 승선(乘船)을 포기하였고,

아침 배를 탄다면서 떠났다는 것이다.

양모(養母)께서는 놀라기는 하였지만

 “일동(一東)이와 재동(在東) 두 양(養)아들을 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 하시는 것이었다.

 1943년 11월 달 내가 귀국(歸國)한 당시 형님의 수산업 범위는 대단히 광범위하였다.

그 중 총독부에서 직접 조업(操業) 허가를 받아야하는 속칭 대구리배(底引網)가 있었다.

 선원(船員)들 말에 의하면 해저(海底)에 물고기 밭이 있는데

그 날 조류(潮流)에 따라 대구, 상어 같은

해저에 서식(棲息)하는 어류들을 샅샅이 끌어 잡아 올리는 것이

 대구리배인데 어족(魚族)의 씨를 말리기 때문에 당국(當局)으로부터 허가받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어군탐지기(魚群探知機) 등

조업에 필요한 기구(機具)들이 발달되어 편리하겠지만

과거에는 대구리배 선원들이 다년간의 경험을 통하여

조류(潮流)를 살펴가면서 조업(操業)에 임했다하니 크게 고생하였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어느 날 형님의 대구리배가 일찍 귀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경도 할 겸 어업조합 판장(販場)으로 나가 보았다.

속칭 ‘곱도리’ 혹은 ‘곱상어’ 라고 부르는 개상어를 많이 잡아온 것이었다.

 여기저기 넋을 잃고 구경하고 있자니 “ 니 재동이 아이가!” 하면서

 나의 손을 덥석 잡는 사람은 의형 현필이었다.

나 보다 먼저 귀국했다는 소문은 들은바가 있었지만

 이 곳에서 만날 줄이야 미처 생각 밖이었다.

어업(漁業) 판장(販場)에서 인부로 일하면서 살아간다고 하였다.

 다른 곳에 가지 말고 기다리게 해 놓고

같은 크기의 곱상어 서른 마리 가량을 새끼줄로 묶어들고 앞장서서 자기 집으로 안내하였다.

나의 생가가 있었고, 옛날 극장 대정관(大正館)이 있었던 자리에

 다닥다닥 들어선 함석지붕 집들 중 한 집에 들어서니

식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마당까지 나오신 현필네 양모(養母)님께서 반가이 맞이하여 주셨다.

현필형은 곱도리를 한 마리 한 마리를 냉수에 씻어

송판위에 나란히 놓고 쩔쩔 끓인 뜨거운 물을 부은 뒤

짚으로 문질러 곱도리 껍데기를 벗겨내었다.

반숙(半熟)이 된 살코기를 먹기 좋게 토막 내어

설탕을 넣어 버무린 고추장을 손가락으로 찍어 발라 씹어 먹었는데

그 맛이 정말 별미였다.

거기다 사제(私製) 생강주 한잔을 걸치니 그 맛 또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맛있었다.

어촌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에 다양한 물고기 요리를 먹어 보았지만

현필형의 요리법과 같은 방법으로 조리(調理)한 별미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재동아 내 니 한테 대접할 것은 이것뿐이다.” 하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내 귓전에서 감도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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