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36. 또 다른 회상(回想)

무극인 2008. 9. 11. 21:52

 * 45도 소주(燒酒)

어느 해 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방어진 체육회가 주최하는 남선축구대회를 앞두고

귀빈 격으로 초청한 부산 선수는 화가(畵家) 우신출(禹新出), 목탁 최학수(崔學守),

영도 김(影島 金), 다마고 김(卵 金) 또 한 사람은 박(朴○○)였다.

우리측 선수로는 이기용(李基容), 김임득(金任得), 이광호(李光浩), 호미발 이(李○○), 사팔이 김(金○○),

삐�이 박운종(朴云宗), 나머지 분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여하튼 십 사오 명이 금산식당(金山食堂) 2층에서 합숙에 들어간 것이다.

서진 매축지운동장(西津 埋築地運動場)에서 종일 연습 운동하기로 하고

비상용(非常用) 구급약품(救急藥品) 옥시풀, 머큐럼, 소독용 45도 소주 한 됫병이 모두였다.

여느 날과 같이 오늘도 연습을 마치고 숙소인 금산식당 합숙소에 갔었다.

계단을 올라 2층 출입문을 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골마루에

뚝뚝 흘린 핏자국이 저쪽 화장실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놀란 우리 일행이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 보니 부산 박○○ 선수가

창백한 안색을 하고 누워있는 것이었다.

연습 도중에 몸이 좋지 않다 하여 일찍 들어 온 것인데

이렇게 상태가 좋지 않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사실 박 선수는 애주가이었는데 술이 마시고 싶어서

몸이 아프다는 거짓 핑계로 들어와서는 혼자 소독용으로 준비해둔 45도 소주를 양껏 마셨다는 것이다.

평소 심한 치질 병 환자이면서도 참지 못하고

들이마신 술이 원인이 되어 이렇게 하혈(下血)을 하고 만 것이라며 후회하였다.

시합 때까지 규약으로 금기(禁忌)된 금주, 목욕, 여자, 개인행동 중에

한 가지를 어긴 데다 건강상태까지 좋지 않아,

본인 스스로 이번 시합에 불출전할 의사를 보였고.

우리 팀 전체의 사기 문제도 있고 해서 안타깝지만 부산으로 돌려보냈다.

 

* 야학교(夜學校)

일제치하(日帝治下)에서 우리 서민들은

교육의 혜택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문맹자가 많았다.

배워야 산다는 범국민적 운동으로 교육 열의가 고조되면서

광복과 함께 각처에서 문맹퇴치 운동이 일기 시작하여

 배움터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곳 방어진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43년도로 기억되는 해에 북진구(北津區) 사 구장(史 區長)의 아들 사덕선(史德先)과

화진구(花津區) 집일하는 대목(大木)의 아들 이문규(李文圭)

그리고 나 세 사람이 의논하여 과거에 민족정신을 일깨우겠다는

뜻 깊은 분들에 의해 야학을 운영하다가 일경(日警)의 탄압으로 폐쇄되었던

화진구(花津區) 동사(洞舍)를 빌려서 야학교를 재(再) 개설한 것이다.

마을 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져 외딴 곳에 마당도 없는 방 두 칸 초가집이었고

보잘 것 없는 이 동사를 오갈 데 없는 노부부(老夫婦)가 쓸쓸히 지키고 있었는데

시설이라고는 과거에 쓰던 낡은 칠판 한 개가 고작이었다.

이문규는 조선어를 가르치고 사덕선은 산수를 나는 조선어와 미술을 가르치기로 하고

개학하였는데 첫날부터 어린 아이에서 어른까지 연령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동사라면 주민들이 모여서 협의하기도하고 공동 물자를 보관해 두었다가 필요시에 이용도하는 곳인데도

사람들이 모여 회의한 바도 없고 기물(器物)이라고는 칠판 하나에 불과하였다.

어느 날 오후에 출근하였을 때 노부부가 긴장된 표정을 지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 선생들 어젯밤 야학을 끝내고 모두들 귀가한 후에

형사(刑事) 둘이 와서 구석구석 다 뒤지고,

버려진 휴지마저도 펼쳐 보고 무엇을 찾는 것 같더라 ” 하면서 걱정하는 것이었다.

야학도 허가를 받는 등 신고 절차를 밟아야 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별생각 없이 오직 문맹퇴치(文盲退治)하겠다는 일념(一念)으로 시작한 것인데,

오히려 노부부께 걱정을 끼치는 것이 죄스러워서 “걱정 마십시오,

두 형사라면 이우택(李佑澤)과 이마이 (今井) 형사 입니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두 형사와 내가 평소에 친분이 있는 것처럼 하여

우리 세 사람 때문에 걱정하시는 노부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여 드리고 싶은 생각에서 한 말이었다.

당시 이우택과 이마이 두 사람은 일조(一組)가 되어 마을을 순회하며 동포를 감찰(監察)하는 악질 형사였다.

 

* 야만국으로부터 독립

광복 전에 어른들께서 철없이 어린 우리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는

“소자본 국가가 대자본 국가에게 덤비는 것은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과 같다. 

높은 계단을 마음대로 오르내리고. 논길 산길을 마음대로 달릴 수 있는 자동차

그리고 항공모함에 실린 그 수많은 비행기들이 날개를 폈다, 접었다 하는

 2기동항공기(二機動航空機)들이 있는 줄을 꿈에도 몰랐던 야만국 일본!.

 

”일본이란 나라의 민족은 자연스럽게 자라는 나무들을 자르고,

휘어잡아 기형수(畸形樹)를 만들어 즐기는, 그러한 분재방법(盆栽方法)으로

사람도 병신으로 만들어 인간분재전시장을 마련해서 만국 인에게 구경시키고,

그래서 일본도국(日本島國)을 황폐화 시키고 있다 ”는 등등의 말들을 많이 듣고 자랐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태극기가 나부끼고 만세소리는 하늘을 찌르고

땅이 꺼져라 발을 굴리던 그 날은 오고야 말았다.

내 손으로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 앞에 서서

“독립”이라고 선창하며 기뻐하던 내 모습은 생애 속에 기념탑이 되리라.

 

* 광복 축하 3인전(人展)

일제(日帝) 강점기(强占期)에 태어나서

일찍부터 만연(蔓延)된 왜색(倭色) 풍조(風潮)속에서 자라면서 본

우리 어른들이 그러한 왜색(倭色)에 쉽게 동화(同化)되지 않고 자존을 지킨 것이라 생각된다.

그 영향으로 나는 서울에서 동경에서 새로운 것들을 보기도하고 배워서 신지식(新知識)을 익혔다.

전세(戰勢)가 기울자 신경질적인 일본인 눈앞에서 신식 결혼식을 올린일,

결혼 3개월 만에 연령징용에 징발되어 고민했던 일,

읍사무소 서기로 들어가서 직장 일들을 처음 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것이다.

나는 새로운 우리 것을 배우려는 자세로 교육계에 입문했다.

여기서부터 또 좌․우익계로 나뉘어 서로 싸운 일, 좌익계에 납치되어 공갈과 위협을 받은 일 등

대혼란 속에서도 특히 극(劇)을 통해 부락순회 계몽운동에 나선일,

야구를 통해 동지들을 규합한 일 결국 광복축하로 연 「세 사람전」은

우리 겨레의 염원이던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벅찬 감격의 몸부림이었다고 자부(自負)하고 싶다.

양조복형, 최용규군과의 세 사람전이란 이름으로 고향방어진 중심지인 중진 삼거리 모서리에 있는 건물에서

광복 경축축하 세 사람 미술전을 1945년 10월에 개최한 것이다.

양형은 일본 하관에서 정공사 �셋트 인쇄 회사를 직접 경영한 인사로 그림에 능숙하였고,

최군은 기초지식은 없었으나 즐겨 그림을 그린 독학자요.

나는 귀국할 때 가지고 온 작품과 그 동안 그린 것들을 출품 한 것이다. (『울산예총 20년사』에)

 

* 선원이 되어서

그러다 보니 내 나이 벌써 30대,

 지금부터 인생의 갈 길을 개척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우선 형님이 운영하는 운반선 선원이 되어 회계와 통역 일을 맡아서 승선하였다.

 우리 배는 남해도, 거제도, 거문도로 드나들며 생선을 구입해서

일본 하관(下關)에 가서 팔고 돌아오는 것이 사명이었다.

섬을 돌면서 나는 스켓치 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번은 거문도(巨文島혹은 三島)에서 돌아오는 항해 중

라디오 방송을 통해 태풍이 오고 있으니 항해중의 선박은 가까운 항구로 피하라는 것이다.

해도를 펴 살펴보니 가까이 매섬이 있어 그리로 뱃머리를 돌려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산도 숲도 없고 항만시설도 없는 자연 그대로 평범한 섬으로

바다 한 복판에 외로이 하나밖에 없는 무인도 같은 느낌이었다.

자연그대로의 원시 섬, 마침 석양시(夕陽時)라 잔디로 덮인 언덕위에는

백의 차림의 섬 주민들의 모습이 석양에 반사되어 신비스런 광경에

우리 선원 일동은 넋을 잃어버릴 뻔 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값싼 인조 천에 염색도 하지 않고 그대로 옷을 지어 입고 있었다.

드물게 볼 수 있는 큰 배가 들어오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언덕에 올랐는데

 그들이 마침 강한 석양의 역광을 받았기 때문에

눈이 부시도록 반사되어 우리 일행의 시선에 신비스럽게 작용되었던 것이다.

태풍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적당한 곳에 닻을 내리고 한 숨 쉬려는데 난데없이 뻥 하는 소리와 함께

복어 한 마리가 커다란 배때기를 풍선같이 부풀려 수면으로 떠오르는 소리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뻥뻥 소리와 함께 값진 참복 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선원들은 이게 왠 떡이냐 환성을 지르며 두 척의 전마선을 내려 띄워 복어를 건져 올리다 보니

주위에 있는 바위에는 겹겹이 붙어있는 홍합을 발견하고

꿩 먹고 알 먹는 격으로 홍합도 마구 따기도 하였다.

한창 작업 중 섬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두 척의 어선이 노를 저어 다급한 속도로 다가왔다.

홍합은 섬 주민의 양식(養殖)으로 일년 농사인데 수확한 홍합은

여수에 가서 팔아 그 수익금을 섬 주민들이 나누어 갖는 주 생산물이라면서 항변하였다.

 복어는 독어(毒魚)로 먹으면 죽으니 내 버리라는 것이다.

도민(島民)들은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복어는 모조리 때려 죽여

물속에 내버린 것인데 죽지 않고 살아남은 놈은 공기를 마셔 배가 풍선같이 불러 오르니

수면위에 뜰 수밖에 없다고 섬사람은 말하였다.

홍합은 우리가 그런 사정인줄 몰라서 채취한 것이라 사과하였고

복어는 오늘 저녁 반찬으로 요리 할 것이다 하였더니 질색을 하면서 말리는 것이었다.

섬사람들은 선내에서 복어 요리를 끝까지 지켜보고는

아무 탈 없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조리사에게서 복어의 그 가치성을

듣기도 하고 또한 요리법도 배우는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내가 오늘 밤은 섬에서 자고 싶다고 하였더니

섬사람들은 사장님께서 우리 섬에서 주무신다면 영광이라면서

그들의 작은 배로 섬까지 안내하고 친절하게 방까지 제공해 주었다.

방바닥에는 부드러운 금잔디로 깔려져있었는데

노인 한분이 잘 엮어서 만든 자리를 가지고 와서 바닥에 깔면서

귀한 손님을 풀밭에 주무시게 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

또 다른 노인 한 사람은 특별한 일 외에는 켜지 않는다는 석유기름 호롱불까지 밝혀주었다.

노인들 몇 사람이 오셔서 육지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였고

섬 주민은 약 30호가 살고 있었으나 뭍으로 떠나고

지금은 한 20호 밖에 살지 않는다면서

자식의 자식 손자손녀들 특히 손녀들은 뭍에서 살게 하는 것을 소원하였다.

 

* 주재소(駐在所) 사수(死守)

해방은 되었으나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따라서 사람들은 처신의 기준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언제 어디서 본의 아니게 무슨 망신이나 변을 당하지 않을까 근심하면서 우왕좌왕 하였다.

우선 살고 보자는 심정으로 대중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쏠리면서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고 말 그대로 세상은 바로 무법천지였다.

치안을 책임져 줄 사람도, 경관이라곤 그림자도 찾을 수 없이 주재소는 주인 없는 빈집으로 텅 비어 있었다.

어느 날 유지인 장만극(張萬極)씨가 찾아와서

“이 사람아 아무리 혼란기라 하더라도 주재소만은 누가 지켜야 될게 아니냐? 어떠냐?

내 아들 상오와 사위 김호발을 자네에게 붙여 줄 테니

경관이 올 때까지 주재소를 지켜 주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아들과 사위를 몽땅 붙여 주겠다는 말에는 별 도리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이지만 실천에 옮기기로 하고 우선 평소에 나와 뜻을 같이 하고 있는 친구들을 모아서

빈손으로 주재소 빈집을 사수했다.

얼마 후 미군이 들어와서 주둔하기 시작하였지만

정식으로 경관들이 주재하러올 때까지는 여러 명의 미군 병사와 지냈는데

그들과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우리는 영어 사전을 동원하여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가운데

그 백인들이 글을 판독하지 못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그들로부터 듣고 알게 된 사실은 최전선(最前線)에 먼저 투입된 병사 중에는

다수가 죄수들이었고, 소년시절부터 죄수로 성장하느라 무학자(無學者)라는 것이었다.

 

*  ‘으와 스’ 를 읽어 보라!?

광복이 되어 읍(邑) 행정(行政)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맡은 업무에 열심히 종사하고 있던 어느 날,

 읍사무소에 군(郡) 학무과(學務課) 직원이 방문하였다.

 방어진 심상학교(尋常學校)를 곧 접수하게 되는데

교육을 맡을 교사를 선발해야 된다면서 읍사무소 직원인 천종호(千鍾鎬)와 천재동,

그리고 이율우(李律雨) 세분은 대기하고 있어라 하였다.

천종호와 나는 승낙하였지만 왠지 이율우는 거절하였다.

방어진고등심상소학교라면 평옥 3동(棟)의 교사(校舍)로 넓은 운동장에서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면서 시설 면에 있어서

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 못지않게 호화교(豪華校)로 그 명성이 높은 학교였다.

해방이 되자 혼란한 틈바구니에서 좌익계(左翼系)인 『민주청년연맹』단체가

이 학교를 점거(占據)하여 귀엽고 유망한 어린 청소년들의 집결소로 이용하고 있었다.

학무과(學務課)에서 연락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동네에서 여느 청소년과 다를 바 없이 귀염을 받고 있는

청소년 문치환(文致煥)이 심부름 온 것이다.

K○○ 선생이 나를 보고 싶다면서 모시고 오라하여 왔다 하였다.

아이를 따라 교무실에 들어서니

서가(書架)와 비품장들로 좌우에 세워 담을 만든 좁고 꼬불꼬불

 마치 미로와 같은 통로를 따라 들어가 막다른 곳에 닿으니

 비로소 K가 큰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나에게는 보통학교 후배이면서 죽마고우이다.

 

“ 자네하고 손만 잡으면 우리 천지가 되니 나 하고 일할 생각이 없느냐?” 고 물었다.

“나는 곧 이 학교를 맡아야 할 몸으로 딴 일을 할 틈이 없다. ” 했더니

“ 더욱 좋잖으냐? 인민 교육도 시켜야 되니까.”한다.

“󰡒��인민 교육은 나는 모른다. 문맹퇴치(文盲退治)를 위해

우선 어린이들에게 우리 한글부터 먼저 가르쳐야 되지 않느냐?

동시에 나도 배워지고, 글을 알아야 인민 교육도, 민주 교육도 할 것 아니냐?  등등

 

대화하는 동안에 K는 손잡이가 나무로 된 권총을 서랍에서 꺼내더니

여섯 개의 총알을 책상 위에 쏟아 부어 놓고, 마른 수건으로 권총을 닦는 듯 하면서

간간이 총구를 나를 향하여 겨냥하기도 하였다.

 위기를 느끼기도 하였지만 지난 날 야밤에 삼거리 한가운데

나를 꿇어 앉혀놓고 죽창을 든 자들이 둘러서서 위협하던

그때를 생각하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윽고 그는 여섯 개의 실탄을 권총에 장착하더니

서랍에 넣고는 등 뒤에 걸려있는 소 칠판에  ‘으와 스’ 자를 써 놓고 읽어 보라고 하였다.

‘으’라고 읽었더니 다음에는 ‘스’자를 써 놓고 읽게 하였다.

 

“경상도 사람은  ‘으와 스’ 자를 ‘어 ’ ,  ‘서 ’ 로 발음하는데

 자네는 정확하게 ‘으와 스’ 로 발음하니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좋은 선생님이 되겠구나”하여 대화는 끝을 맺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알마 후 민주청년동맹(民主靑年聯盟)은 숙청되었고,

연락을 받고 학교를 접수하기 위해 가보았더니 큰 피아노 한대가

교무실 출입구 문턱에 반쯤 걸쳐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또한 해방 직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자족(自足)을 위한 몸부림이요 하나의 비극일 것이다.

 

* 돌아온 정(情)

하루는 전시장 입구 한 곳에 의자를 내 놓고 앉아 있었다.

갑자기 내 등 뒤에서 팔을 내 목에 감아 조르는 것이 아니겠나!

 나는 이제 죽었구나! 발악을 치다가 힘을 잃고 쭉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잃어가면서도 온갖 것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생기침을 심하게 하는 가운데 차차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내 어깨를 감싸고 재동아! 재동아! 내 이름을 부르며 목을 놓아 우는 사나이는

바로 내 목을 졸랐던 장본인 이육헌(李六憲) 이었다.

 

“ 왜 이런 상황에서 이런 짓(전시회)을 하느냐!

 저쪽(左翼)에서 잡아먹을 듯이 벼르고 있다.” 

 

9남매 중 여섯째아들인 그의 동생 칠현은 나보다 한 살 위인데 나와는 죽마고우였다.

육헌 형은 내가 어릴 때부터 친동생처럼 사랑해 주었는데

일찍부터 선원(船員)으로 생업에 종사하였다.

 싸움꾼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광복과 동시에

 좌경사상에 발을 붙여 우리에게는 위험인물이었다.

당해본 사람은 납득이 가겠지만 사상이란 것은 부모형제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번 세 사람 미술전이 좌경분자들에게는 큰 장애물로 규정되어

온갖 비방과 욕설로 그들은 방해하며 다가왔다.

 그런데 이튿날 뜻밖의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육헌 형은 세살자리 아들을 혹말(무동) 태우고,

 애국가를 콧노래하면서 더덩실 춤을 추기도하고,

 벙글벙글 거리며 다가와 다정하게

 

“재동아 앞으로 내가 할일은 뭐꼬?” 했을 때

나도 모르게 내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핑 돌았다.

 

* 우정(友情)이냐 우정(遇情)이냐

앞에서 이야기 한바와 같이 1944년 10월경

나 그리고 황병곤(黃秉坤), 김영식(金永植) 세 사람이

김영식 집에서 술을 마셔가면서 여러 가지를 이야기한 가운데

신문지상에 보도된 일본천황사진을 화장실에 가서 뒤를 닦았다는

사건으로 황군은 주모자로 수감되고 둘은 풀려 나왔다.

다행이도 황군은 옥살이 하느라 연령징용에 징집되지 않아 목숨을 건졌다.

김영석은 아담한 철공장을 경영하였는데 주변에서는

장래 유망한 청년으로 손꼽혔지만 광복이 되자 좌경에 물이 들어,

야밤중에 대창 속에 나를 가둬두고 발길로 차가면서 인민 교육을 시켜라,

오장육부가 썩어 빠진 놈 등으로 협박했다.

정부가 바로서자 김은 지상으로 사과성명을 내었고,

 나는 그 후 울산읍으로 전입되 살면서 가끔 방어진 집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대 이상한 일은 내가 버스로 방어진에 도착만 하면

김영식이 버스 정유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가이 맞이해 주면서 요정 하동관에 가서 대접을 하였다.

과거를 사과하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 같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어찌하여 내가 방어진에 오는 날과 시간을 꼭꼭 알고 정류장으로 나와 있는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 진정한 우정은

20대에 선구점(船具店) 사장으로 읍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정세기(鄭世基)는

나와 보통학교 7회 동창생이며 나와는 특별나게 친한 친구사이로

 세기가 결혼할 때 나는 우인대표의 한사람이요,

 내 결혼식 때는 물론 우인대표의 한사람으로 자리를 빛내 주었다.

광복이 되자 어떻게 된 영문인지 좌경으로 기울어졌다.

그래도 나는 틈만 있으면 선구점에 가서 놀기도 했다.

 하루는 음식을 차려 놓고 자기 동생 덕룡(德龍)을 불러들이더니 하는 말이

나는 이미 이렇게 된 몸이지만 너는 지금부터 염포(塩浦里, 고향)로 올라가고,

재동이는 앞으로 다시 여기를 오지 않기로 해라.

공산주의는 정말 무서운 거야 나와 자주 만나면

재동이 너도 자신이 모를 사이에 빨갱이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 우정은 여기서 끝나는 거야!” 한 것이다.

 

훗날 소식을 들으니 정세기는

 

“고향의 여러분에게 더 이상 죄를 지울 수 없어 먼 북해도로 밀항선을 타고 간다” 고 한마디 남기고 떠난 뒤 소식이 없다.

 

* 이승만(李承晩) 동상(銅像)

옛날 우리집안에서는 먼 친척들을 가까이 당겨서 정을 더욱 두텁게 하였는데,

집안이 넓었던 할머님의 친정 쪽으로 가깝게 잘 알고 지내던

어른 한분을 오촌(五寸)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분은 서울에서 살고 계셨는데 아들 이수호(李秀鎬)는 나와 육촌(六寸)이 되는 셈이다.

1954년 초가을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이수호가 내 앞에 불쑥 나타났는데 서로가 반갑기 그지없었다.

 양가의 안부를 서로 통정하면서 이야기 하는 도중에

느닷없이 서울 남산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세우고 싶다면서

형이 그 동상의 형체를 생각나는 대로 그려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갑작스런 일이라 당황하여 거절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면서 그림만 그려주면 뒷일은 모두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여러 가지로 구상한 것 중에서 왼손으로 지구를 매만지고,

높이 치켜든 오른팔에 손가락은 V자 표시를 한 한복 차림의 입상이 최종 선정되어 건네주었다

육촌은 매우 만족해하면서 의기양양 서울로 돌아간 것이다.

그 일을 까맣게 잊고 2개월이 조금 지났을 즈음에

육촌이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설계도를 소중하게 종이에 첩첩이 싸고 다시 큼직한 봉투에 넣어

경무대(景武臺)에 갔더니 수위실에서 출입을 통제 당하였다.

수차례 면담을 간절히 요구하였지만 처음같이 매번 거절당하여

최상의 수단을 도모한 결과 수위실 부근에 담요를 깔고

밤이면 그 자리에 노숙하면서 단식 투쟁에 들어간 것이다.

몇 날을 그렇게 투쟁하는 동안에 출퇴근하는 고관들의 이목(耳目)을 끌게 되었고

또한 그들의 입에서 입으로 나의 사연이 오르내리면서

자연스럽게 대통령에게 전달되어 면담이 성사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부이신 각하의 동상 건립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이 설계도는 앞으로 통일을 이룩하고 세계만국의 모범 국으로 우뚝 선

대한민국을 건설한 각하의 모습을 남산에 건립하여

국민들이 우러러 보게 함과 동시에 동상주변에 정구장,

배구장을 설치하여 국민보건 향상을 도모키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정부에서 건립하기가 어려우면 저의 사재(私財)로 건립하겠습니다.”

 

역설하고 허락해 주실 것을 간청하였더니

오늘 당장 결정 할 일이 아닐뿐더러 대통령인 내가 결정 할 일도 아닐세! 하였고

대단히 기분좋아하시면서 연락을 할 테니까 그때 다시 오라고 하였다.

 며칠 뒤 직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달려갔더니

대통령을 대신하여 어느 고관이 맞이하여 주었다.

 대통령께서 당신의 대담한 용기와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감탄하여

그 대가로 상을 내렸는데 진해(鎭海) 앞 바다에

로일 전쟁 때에 침몰한 러시아 전함이 있으니

그 전함을 인양할 권한을 허가해 줄 테니 자네가 맡아서 알아 처분하라

그리고 경남도지사, 진해시장 및 해군사령부에 공문을 보낼 터이니

앞으로 그쪽과 상의하여 일을 추진하고 끝으로 행운을 빈다고 하였다.

동상 건립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경무대를 나왔다 는 것이었다.

 육촌은 나를 맞춤양복점으로 안내하여 곤색 양복 한 벌과 바지 하나를 더 맞춰주었다.

그 후 서울에 돌아간 뒤로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었고

러시아 전함 인양 건에 대해서 나 뿐만 아니라 친인척들이 모두 궁금해 하였다.

소문에 의하면 조국광복 전(前)에 일인(日人)들이 수차에 걸쳐

 진해와 울산 앞 바다에 침몰한 러시아 함선 인양에 실패를 거듭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육촌은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여간 일개 평민이 대통령을 단독 면담하였고

본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상으로

크나큰 공사를 허가받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찮은 나의 그림을 대통령이 관심어린 눈으로 살펴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여보니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감개무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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