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33. 울산 방어진이야기(1)

무극인 2008. 8. 9. 16:33

 

1) 고래할매

문네 할매는 복지바다불 백사장 가까이 언덕 위에 흙으로 집을 지어

 그곳에서 아주 가난하게 살고 있었지만 술 빚는 솜씨는

빼어나서 먼 동네까지 소문이 나 있을 정도로 유명하였다.

오막 흙집에서 백사장을 지나 바닷물이 닿는 곳까지는 불과 20미터 거리였다.

어느 날 이른 아침 파도 없이 고요한 물가에

“ 푸우 푸우…”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뿜어 솟구치면서 물살이 일고 있는 광경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서 놀랬는데 새끼고래 한 마리가

갯바위 틈에 갇혀서 오가지 못하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문네할매는 재빨리 로프 줄로 고래 꼬리를 묶어서

바위에 동여매고는 날이 밝기를 기다린 것이다.

 고래 소문이 이웃 마을은 물론 먼 마을까지 퍼져서

구경꾼이 人山人海를 이루었는데

고래 고기도 비싼 값으로 순식간에 팔렸다.

즉석에서 문네할매가  “ 고래할매”로 바뀌어 부르게 되었고

 십 수대로 살아왔던 모래 위 오막살이 흙집에서 벗어나

 일산 해수욕장(日山 海水浴場) 들어가는 마구지게(地名)에

집 한 채와 밭 몇 마지기를 사들여 그곳으로 이사한 것이다.

얼마 후 수십 년간 소식이 없어 속 태우던 아들

황○문(黃○文)이 집에 돌아왔다는 희소식까지 있었다.

 

2) 고래네 집

내 고향 방어진(方魚津)이라 하면 자연스럽게 고래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인가 봐.

우리 가족이 상진에서 중진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우리 집 바로 뒤편에 “고래네 집 ”이라고 불리는 집이 있었다.

고래네 집이라 부르는 유래는 모르지만

대농가(大農家)로 신장(身長)이 장대같이 큰 두 형제와 함께 식구가 많았다.

우리 집 뒷마당 쪽으로 그들의 디딜방아간이 있고

 또 누룩맷돌이 있었는데

 겨울이 되면 젊은 장정(壯丁)들이 모여와

밀을 맷돌에 갈면서 부르는 유창하고 긴 곡조의 노래는

 맷돌 돌아가는 소리와 어우러져 긴긴 겨울밤이 더욱 깊어만 느껴졌다.

날이 밝아서도 계속되었는데

 누룩을 밟는 광경은 정말 볼만하였다.

넓은 마당에는 성형(成形)된 누룩이 줄을 지어 질서 있게 널려져있고,

저쪽 마구간에 소가 소죽을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 등

주변의 모든 광경이 어린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지금도 나에게 강한 인상으로 각인(刻印)되어있다.

 

3) 봉태기네

을축년(乙丑年) 왜(倭)바람이 지나가고 얼마 후에

고래 네는 어디론가 이사를 하고

 봉태기 네가 이사를 왔다.

 봉태기 네는 북진(北津)에 거주하는 호농가(豪農家)로

 바깥주인의 성은 장(張)씨인데

흰 쌍투머리에 건장(健壯)한 체격이었고,

 봉태기네라고 불려지는 아담한 할매 역시

 하얀색 머리에 언제나 벙글벙글 웃으시며 마음씨가 좋았다.

 “ 봉태기”란 짚으로 엮어 쌓아 만든 기물(器物)인데

한말(斗) 양(量)의 곡식을 담는 것으로

우리 고장에서는 그렇게 부른다.

봉태기 네는 처녀일 때 인물이 남달리 잘 생겨서

총각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총각들 중에서도 장총각(張總角)이

 장가들고 싶어서 애끊게 신부 감을 구하던 중

 친구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는데

 계획을 세우고 정해진 밤에 처녀 집 담을 넘어

깊은 잠에 처한 처녀를 이불로 꽁꽁 동여매어

미리 준비해간 봉태기에 담아

담 밖에서 대기하던 처녀 도둑(?) 장 총각이

지게에 태우고 도망하여 부부가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부터 사람들은 체면 없이 입을 모아

세월이 흘러 늙어서도 “봉태기네 ”라 부르면 서로가 통하였다.

 

4) 사은회(謝恩會) 풍경

1922년 4월에 당시 4년제인 울산군 동면

 남목보통학교(南牧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84년 전이 되고,

형님이 제 3회 졸업식을 하는 해이다.

졸업생들은 그 높은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사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나는 졸업생 중의 한사람인 형님의 손에 이끌려 모임 장소로 갔다.

낙화암(落花岩) 북측 산기슭을 따라 가면

오래된 옛날 강은 이미 물이 말라버려 모래밭이 되어있고

계속 서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주변의 산세가 수려한 경치를 배경으로 한

 넓은 백사장이 나타났는데

여기가 바로 사은회가 베풀어질 장소였다.

 두 대의 소달구지에 천막하며 솥, 그릇 류와

 막걸리를 담은 통, 생선, 고기. 땔감 장작 등

 기타 취사 용품들이 가득 실려 왔다.

졸업생들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사불란하게 짐을 푸는 즉시

 식장을 설치하는 한편

일군(一群)의 여인네들은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고기를 썰었다.

여인들은 다수가 모자(母姊)였고 그 중 4~5명은 졸업생의 부인이라고 하였다.

드디어 정자관(程子冠)을 쓴 이 참봉(參奉),

 갓을 쓴 강 참봉(參奉) 외 유지들과

가내꼬 교장(金子校長), 송종국(宋鍾國), 장두만(張斗萬), 김재근(金在根).

김유○(金裕○) 훈도(訓導)를 비롯한 여러분의 은사님들이 좌정(坐定)하였다.

식순에 따라

두루마기를 정중하게 차려입은 졸업생들이

 은사님들께 보은(報恩)의 큰 절을 올리는 순서부터

예정대로 진행되면서 즉석에 마련된 푸짐한 음식을

은사님께 올리는 등 회식(會食)은 담소(談笑)와 함께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다.

 얼마 후 고조(高調)된 분위기를 틈타

졸업생들은 은사님과 어르신들 앞에서

 진심어린 감사(感謝)의 뜻으로 풍악(風樂)과 노래

그리고 춤이 벌어졌는데 그 광경이 마치

 화창한 남국의 3월 선관선녀(仙官仙女)가 노니는 듯,

 어렸을 때 보았던 그 풍경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5) 인상(印象)깊은 스승

형님이 제 3회로 졸업하는 연도에 나는 입학하는 해였다.

 당시 남목보통학교 입학 정원이 60명이었는데

 지원자가 많아서 면접시험으로 신입생을 선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내가 면접 볼 차례가 되어서

가내꼬(金子)교장 앞에 다가서니

1학년용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 책을 펼쳐 놓고 읽어보라고 하였으나

읽을 줄 몰라서 내가 머뭇머뭇하고 있을 때

교장 옆에 와서 서 있으라고 하였다.

다음 지원자는 두루마기 차림에

학생 모자를 쓰고 들어와서는 모자를 벗고 교장께 절을 하였다.

 “ 소가 간다”, “ 말이 온다”

 펼쳐놓은 내용을 술술 읽어 내려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지원자는 강동면(江東面) 출신으로

이름은 이금복(李金福)이었는데 놀랍게도 기혼자였다.

가내꼬 교장은 보란 듯이 나를 쳐다보고는

서툰 우리말로 너도 저렇게 공부 많이 해야 한다고 하였다.

 다음 면접 선생님은 키가 아주 작은 분이었는데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바지저고리 차림인 나의 옷고름을 풀어 제치고,

가슴 깊숙이 동여 매 있는 허리띠를 풀어

배꼽까지 아래로 내려서 다시 단단하게 동여매어주셨다.

 그리고는 “ 이 가슴속에는 기계가 많이 들어있어,

기계가 잘 돌아가도록 바지 허리띠는 앞으로 조심해라”면서

 서류를 들여다보고는 이름이 뭐냐? 고 묻기에

답변하였더니 천일동(千一東) 이 누구냐? 고 물었다.

 “ 우리 생이(우리 형)”라고 대답하였는데 껄껄 웃으셨다.

 형님은 졸업반에서 부급장 직을 맡아 있었기 때문에,

너의 형을 내가 잘 알고 있다는 뜻으로 웃으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 분의 성함은 김유○(金裕○)선생님으로

남목리 교육가(南牧里 敎育家) 집안사람 중의 한분이었다.

 김 선생님께서 우리 신입생을 맡으시면서

 제일로 먼저 가르쳐 주신 것은

“ 연꽃”이라는 제목의 유희 놀이였다.

 선생님은 손풍금을 켜고 우리 아이들은 동그랗게 둘러서서

 “피었네. 피었네. 무슨 꽃이 피었나? 연꽃이 피었네······ ” 

손풍금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면서

서로 마주보며 안으로 모여 들기도 하고,

뒷걸음치며 물러나오기도 하면서 하는

노래와 유희는 정말로 즐거웠다.

이렇게 놀이하는 동안에 더 재미있었던 일은

체구가 유달리 작았던 김 선생님께서

손풍금에 가려서 앞쪽에서 보면

얼굴이 보이지 않다가 열정적으로 손풍금을 켤 때는

 얼굴이 솟아올랐는데,

그 얼굴이 보였다 안보였다 하는 광경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우리들은 마구 웃기도 하였다.

입학해서 얼마 후에 김유○ 선생님께서

 타 학교로 가시게 되어 우리 전교생들은 한길에 나가서 석별의 배웅을 하였다.

물론 부임해 오시는 선생님께도 한길까지 나가서 마중하였다.

우리 1학년 후임 담임으로 장두만(張斗萬) 선생님께서 오셨다.

동면 감포리(東面 監浦里) 출신으로

그림을 잘 그리셨고 또한 덕담(德談)도 잘 하셨다.

우리 학급에 유일하게 주전리(朱田里)에서 통학하는

 일본아이 한명이 있었는데

누더기에 가까운 일본 옷을 입고 다니면서

지각과 결석이 잦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세면도 하지 않은 상태로 등교하였다.

어느 날 세면을 하지 않은 채 지각까지 한 일본아이에게

장두만 선생님께서는 꼬챙이를 들려

화장실에 가서 인분(人糞)을 찍어오게 하여

급우들 앞에서 자신의 얼굴에 바르게 한 일이 있는데

이는 나쁜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2․3학년 두해 동안 담임하신 송종국(宋鍾國) 선생님께서는

 정통적(正統的)인 한국형 선생님이셨던 것 같다.

큰 체구(體軀)에 얼굴이 크고 홍안(紅顔)이었다.

학교 뒤뜰 실습지(實習地)가 있는 곳에 무덤이 한 쌍 있었다.

급장(級長) 김현호(金鉉昊)를 시켜서

막걸리 반 주전자를 사오게 하여

그 묘 등 뒤에서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한순간에 마신 뒤에 수업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교실 맨 앞 출입문 쪽에 급장을 앉게 하여

순시(巡視)하는 교장을 망보게 한 연후에

주전자 반 되 술을 통째로 마셨다.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허튼 행동이나

실없는 말 등으로 주정(酒酊)하는 일이 없었다.

부실한 학생을 훈계할 때는

선생님 앞에 세워 놓고 자신의 허리끈을 풀어

학생과 함께 허리를 동여맨 후

“이놈아! 내캉 니캉 저 미포(尾浦) 앞 바다에 가서 빠져 죽자 ”면서

 비참한 표정과 행동으로 교실 밖으로 나가려 하면

 학생은 “ 선생님 앞으로 잘 하겠심더, 한번만 용서해 주이소”하며

진심으로 울고불고 매달리며

밖으로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면서 용서를 빈다.

선생님께서는 매질한다거나 따로 야단치는 법 없었고,

송종국(宋鍾國) 선생님다운 최고의 벌주는 방법이었다.

 

6) 백양산(白陽山)

정남(正南)으로 향한 방어진(方魚津) 항구(港口)는

지형상(地形上) 반월형(半月形)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심을 중진(中津)이라 하고 반월 동쪽 끝을 동진(東津),

서편 끝을 서진(西津)이라 행정상 구분하였다.

 이 서진 끝에 백년 송(百年 松)들이 우거진

조그만 볕방우산(白陽山)은 그 앞머리를 바다 쪽으로 내 밀고 있다.

겨울이 가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三月삼짓날을 기점으로 하여

백양산 일대가 유원지(遊園地)로 변신하게 되는데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우리는 노송(老松)에 그네 줄을 매달고

그네를 타는 등 우리 풍물(風物)놀이로 즐기는데 비하여

 일인들은 북과 샤미센(三味線)을 연주(演奏)하며 즐겼다.

훗날 작기만 했던 백양산이 대부분 평지로 변하여

그 자리에는 조선철공소(造船鐵工所)가 들어서고

깎아낸 흙은 매축용(埋築用)으로 활용하였다.

산 끝자락에서 출발한 방파제(防波堤)는

 그 길이가 150미터나 되었고

거센 태평양의 파도를 막아 주는 데는 충분하였다.

내 나이 네 살 되던 해인 기미년(己未年),

 만세 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러 퍼질 무렵

일본 전함 무쭈호(陸奧號)가 항구 앞 바다에

그 위용(威容)을 자랑하며 정박한 일이 있었다.

한인(韓人)들을 겁주기 위한 무적함대(無敵艦隊)의

시위(示威)였다고 생각이 되는데

 한인 일인 구별 없이 온 동네 사람들이 군함 구경하려고

 백양산에 모여들었다.

잠시 후 웬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인은 한 사람도 없고 온 산이 새하얗게 물들인 것 같이 보였는데

 이는 흰옷을 입은 한인들만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 집 김 서사(書士)의 품에 안겨,

그들이 말하는 바다의 철성 전함(鐵城 戰艦) 무쭈호와

한 척의 순양함(巡洋艦) 그리고 두 척의 함정(艦艇)이 그 주위를 돌아가며

 과시(誇示)하는 장면을 어린 눈으로 똑똑히 본 기억이 난다.

 

7) 섬끝

동진구(東津區) 해안선을 따라 줄곧 가노라면

 섬끝이란 곳에 닿는다.

 이곳은 곶인데 방어진 항구 앞 바다에 하나밖에 없는

시리섬(瑟島) 끝 부분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지 지역 주민들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섬끝 ”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나무 한 그루 없이 잔디만으로 이루어진 광활한 평지인 이곳에서는

주민들의 어구(漁具)인 콜타르를 먹인 그물을 펼쳐 말리는 것을 평소에 볼 수가 있었다.

일제통치하(日帝統治下)인 1925년대에

 자전거 경주장으로 개발되어

전일본전국대회(全日本全國大會)가 이곳에서 가끔 개최되기도 하였는데

그때마다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전역에서

수많은 선수들이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선수들의 유니폼은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었지마는

 특이한 점은 주먹 크기만 한 털 방울이 달린 털모자를 쓰고

엉덩이를 치켜세우고 전속력으로 달릴 때

털 방울이 재빨리 흔들리는 시각적인 재미와

속도감이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충분하였다.

우승기는 한 종목이 끝날 때마다 수여될 만큼

그 수가 무척 많았다.

우승기는 지금처럼 가장자리에 수술이 달린 것이 아니라

 천으로 주름잡아 만든 리본을 달아 장식을 하였다.

일본에서 온 본명(本名)은 알 수 없지만

 “개오지 ”란 선수는

 다른 선수에 비하여 인기가 대단하였는데

 우승을 많이 하여 인기가 있은 것이 아니라

달리면서 입을 크게 벌리는 버릇 때문에

그때마다 몇 개 밖에 없는 위 이빨이 보이는 것과

 고개를 지나치게 흔들어 남달리 큰 털 방울을 흔들면서

엉덩이를 곤두세워 애써 페달을 밟는 모습 등이

너무 재미있고 신기하여 관중들은

다함께 “개오지! 개오지! ”소리치며 즐거워들 하였다.

자전거 경주가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인지 없어지고

관중들의 함성도 들을 수 없이 전설의 이야기로 남게 되면서

 축구장으로 전락하더니 또 얼마 후 야구가 성행하게 되어

직업팀과 고교․대학교 외 일반 애호 단체들은

경식(硬式)야구연합회를 발족시키면서

정식 야구장으로 새롭게 단장하기에 이르렀고

전국 야구대회가 이곳에서 개최되기도 하였다.

 

1943년 경 태평양전쟁이 치열할 무렵

일제(日帝)는 이곳에서 운동하는 것을 금지 시키고

방공훈련장(防空訓練場)으로 활용하면서

 강압(强壓)으로 동원된 울산 전 지역 내

 해당 부녀자들의 사열식(査閱式)도 이곳에서 거행되는 등

 섬끝은 이렇게 우리민족의 애환(哀歡)이 서린

또 하나 역사의 장(場)이 되어 내 마음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