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32. 아내의 회고(回顧)

무극인 2008. 7. 28. 16:08

 

《아내 서정자의 처녀시절》

 

◎ 아내의 회고(回顧)

우리 민족의 암울했던 時代에 살다간

 아내의 부친 인간 서진문(徐鎭文)의 일면을 회고하도록 지면을 할애(割愛)함은

아내 서정자(徐湞子)가 그의 과거사를 더 잊어버리기 전에

 어려서부터 직접 겪었던 일과

장모와 장인 그리고 주변 어르신들로부터 들은 것들 중에

 기억하고 있는 것에 준거하여 기록으로 남겨

후손의 삶에 작은 지침(指針)이라도 되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서진문(徐鎭文)을 회고(回顧)하며』

아버지 徐 鎭자(字) 文자(字)께서는

 1901年 8月 28日 蔚山郡 東面 日山里 209番地에서

達城 徐氏 집안 父 徐 章자(字) 寔자(字)와

母 柳 南자(字) 蓮자(字) 사이에

五男 一女 중 長男으로 태어났으며,

當 六歲가 되었을 때 伯父 元자(字) 埈자(字),

백모(伯母) 成 甘자(字) 同자(字)댁(宅)에 養子로 入籍하였다.

아버지께서는 蔚山郡 兵營公立普通學校에 입학하였다가

 東面公立普通學校로 전입하여 졸업하신 후에

外 四寸인 成世斌이 설립한 日山私立普成學校에서 敎鞭을 잡으셨다.

1928년 11月 17日 18時 노을 녘에

 28歲의 꽃다운 나이에 조국의 光復을 염원하다

 恨많은 世上을 마감하셨다.

 

어머니 尹 相자(字) 必자(字)께서는 1901년 8月 12日

 蔚山郡 大峴面 上開里 227番地에서

坡平 尹氏 집안 父 尹 炳자(字) 轘자(字) 와 母 崔 順자(字) 伊자(字) 사이에

 二男 三女 중 長女로 태어났으며 1992年 陰曆 4月 4日 92歲로 恨많은 世上을 마감 하셨다.

부모님께서는 1920년에 兩人이 꼭 같은 19세 나이로 결혼하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언제 日本에 처음 건너가셨는지는 모른다.

 어머니께 들은 바에 의하면 1923년(大正12년) 9月 1日

 關東大地震이 일어났을 당시에

日人들은 朝鮮人들이 放火했다는 등의 거짓 소문을 流布하여

 朝鮮人들을 곡괭이․ 防火용 기구 등으로 무차별 虐殺할 때

아버지께서도 무사할 수가 없었다.

 머리 뒤쪽 목덜미 部位를 곡괭이로 심하게 찍혔지만

 死力을 다 하여 死體밑으로 숨어 들어가 깔려있으면서 정신을 잃었는

 얼마 후 정신이 돌아와서 주변을 살펴보니 어느 병원이었다고 한다.

九死一生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께서는 상처도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귀국하였는데,

 나는 그 이듬해인 1924년 음력 3月 12日 고향 日山里 206번지에서 無男獨女로 태어났다.

 

나의 이름  “ 湞子”  두 자는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最高의 선물이다.

1928년 6月 내 나이 다섯 살 때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를 만나러 일본에 건너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어머니 손에 이끌려 日本 神奈川橫濱市 혼모구로 갔다.

아버지께서는 時期的으로 잘 왔다고 하시면서

 두 母女를 매우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 조금 있다가 내 뼈를 고향에 가지고 가라.”고 하셨을 때

우리 母女는 울고 말았다.

 

아버지께서는 피신 차 귀향할 때나 도일하실 때는

밀항선을 이용하셨는데 내가 태어난 그해 잠시

고향에 定着하여 普成學校에 復職되어 근무 중에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授業 중에

日本 本土警察이 渡來하여 無斷으로 교실에 들어와서

어린 弟子들이 보는 앞에서 체포되어 간 일이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평소 일산진 우리 마을 동편

해돋이 동대산(東臺山) 등선 소나무 숲을 바라보시면서

 “ 바람이 쉬지 않고 항상 불고 있을 때까지는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줄 알고,

바람이 자면 내가 죽은 줄 아시요.” 하시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어느 해인가 무슨 일로 잠시 귀국하였다가

마지막인 여섯 번째 도일하기 직전에

뒷마당 채소밭 흙 담 밑에 핀 개나리 꽃나무를 뽑아다

 어머니께서 부엌일 하실 때 뒷문을 통하여

 쉽게 볼 수 있는 곳에다 옮겨 심으시면서

 “이 꽃이 생생하게 살아있으면 내가 살아있는 것으로 알고,

이 꽃이 시들어지면 내가 죽은 줄로 아시요. ”하셨다.

 

귀국하시면 항상 빠뜨리지 않으시고

 갑 성냥을 장롱 서랍에 가득 사 넣으신 것은

 맏며느리인 어머니께서

 아궁이에 불 지피는 고충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자

하는 것인 즉 이토록 아내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으셨다.

 

日本 우리 세 가족이 살고 있는 집 대문 앞에는

日警들이 우리 가족의 一擧手一投足을 살피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監視所를 설치해 놓고

집 안을 샅샅이 감시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때로는 “壽 本署 ”에 불려가서

 어머니도 나도 그들의 취조에 시달려야 했다.

 어떤 사람이 다녀갔는지? 취조에 협조 잘하지 않는다는 등

바른 말 하지 않는다고 어머니와 나는

 뺨을 몇 차례씩이나 얻어맞은 일 등 지금도 끔찍했던

그때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느 날 고등계형사들이 예고없이 급습하여

집 안을 구석구석 수색하던 중에

어머니 생활용품이 든 고리괘짝을 발견하고

 그 속에 든 우리나라 다듬이 방망이가

진귀하면서도 흉기로 생각하였던지

 어머니께 꼬치꼬치 캐묻는 통에 화가치민 어머니께서는

그들로부터 방망이를 빼앗아 들고는  

“그래 이놈아 이런 것이다!!”하면서

 형사의 가슴팍을 향해 휘둘렀는데

 한차례 맞은 형사는 아픈 가슴을 감싸고 저만치 도망을 치기도 하였다.

 

가끔 조선에서 혹은 일본 땅 멀리서

 아버지를 찾아오신 손님들이 계셨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아버지께서 계신 사무실로 안내해 드렸다.

다섯 살 어린 딸아이가 세 번씩이나 전차를 갈아탈 정도로

 멀기도 하고 이국땅의 도로 사정 등 모두가 낯설어

 어려울 텐데도 서슴없이 아버지께 안내해 드렸을 때

손님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고

 또한 주위 사람들 간에 큰 화제가 되었던 일은

두고두고 나는 자랑하고 싶다.

 어떤 때는 우리 집에 심부름 하는 조선 사람이 몰래 다녀가기도 하였고,

어머니께서 차려준 밥을 맛있게 얼른 먹고 가기도 하였는데

그런 사람 중에는 자기가 다녀간 것을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말라면서 신신 당부하는 이도 있었다.

 궁금하여 어느 날 한 분이 다녀가신 뒤에 어머니께 누구냐 고 여쭈었더니

아버지의 고종사촌 ○○○라고 하셨다.

 

 어느 날 우리 집에 심부름 다니는 분이

 徐위원장님 계시는 곳에 같이 가보자고 하여 우리 母女는 따라나섰다.

당도하여 보니 넓은 강당에 群衆이 가득 운집해 있었고

壇上에는 아버지께서 서 계셨다.

아버지께서 家族이 온 것을 아시고

 단상에서 좀 떨어진 곳에 좌석을 마련해 주셨다.

 잠시 후 아버지께서 演說을 하기 시작하셨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목소리는 높아지고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 치는 등

무언가를 강력하게 주장할 때마다 群衆의 환호와 박수로

장내는 용광로처럼 달아올라 그 열띤 분위기에

우리 母女는 어리둥절하였다.

 잠시 후에 警察들이 들이닥치고 集會場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群衆사이로 아버지께서 警察에 둘러싸여 어디론가 가는 것이 보였다.

심부름 아저씨의 말씀이,

 아무런 일 없을 터니까 안심하고 가자면서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밤늦게 歸家하신 아버지께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저녁밥도 드시지 않으시고 잠자리에 드셨다.

 

우리 집과 앞 집 사이에 낮은 나무 울타리가 있었는데

울타리 너머로 日人 남자가 훈도시(日本 팬티) 차림으로

생활하는 것이 자주 보여서 그 모습이 보일 때마다 민망하고 눈에 매우 거슬렸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그 남자를 불러 세워놓고 호통을 친 후에야 그런 차림이 보이지 않았다.

 

1928년 10월25日은 “日本 天皇(昭和) 御大典 ” 날이다.

日皇 이 花電車(꽃으로 치장한 전차)로 요코하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아버지께서는 권총을 품고

 日本 天皇을 암살하기 위하여 꽃전차에 뛰어 올랐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의 僞裝術에 의하여

 꽃전차가 3대나 되어 아버지께서는

 進退兩難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 실패한 아버지께서는

日警에 체포되고 말았다 고 어머니 생전에 누누이 말씀하셨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으면서 성장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를 “ 제2의 윤봉길 의사”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칭송하였다.

 

日本 報導에는 이 어마어마한 “天皇 暗殺 冀圖 사건 ”을 숨기기 위해

 『徐鎭文 豫備檢束』이라고만 報導하였다.

 수사를 맡은 警察署에서는

“背後 인물은 누구냐? ” 

 “ 單獨 犯行은 아닐 것이다.” 등등으로

殺人的 拷問 등 蠻行을 다 저질은 후

 臨終 직전인 11月 16日 대낮에 釋放되어

동지 여러분에 의하여 인력거에 실려 집으로 왔다.

醫師를 불러 보였으나 生存이 불가능하다 하여 돌려보냈다.

만행으로 일그러진 끔찍한 아버지의 모습을

 그 동지들은 우리 모녀에게 보여 줄 리가 없었다.

이튿날인 11月 17日 오후 6時 쯤 노을 녘에

비로소 우리 모녀를 찾는다는 동지들의 말씀을 듣고

안내되어 아버지 가까스로 다가갔을 때

 꺼져가는 한 가닥 가는 목소리로 “湞子야”  “湞子야 ”

내 이름을 세 번 부른 뒤

“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목소리가 들릴 듯 들릴 듯 멀어지면서

28歲의 꽃다운 나이에 조국의 光復을 念願하시며 恨많은 世上을 마감하셨다.

 

11月 21일 日本朝鮮勞動組合葬으로 盛大하게 葬禮가 치러졌는데

수백 명이 훨씬 넘는 弔問客 중에는 日人들도 많이 참가했다고

 어머니께서 수차례 말씀해 주셨다.

葬禮를 치른 며칠 후 通行禁止 시간 중인 밤 1時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누구냐고 물으니 神戶에서 온 東亞日報 記者라고 하였다.

잠시만 들어가도 되겠느냐며, 들어와서는 놀라지 말라고 하면서

아버지에 대하여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通禁 解除가 된 후에 돌아갔다.

후일에 안 사실이지만 國內 新聞에

 아버지에 대하여 記事가 報導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지만

그 내용을 본 바는 없었다.

 

우리 집 앞 감시소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여전히 철수하지 않고 日警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었는데

우리 母女는 울분을 삭이다 못하여 서둘러 歸國을 결심하고

東京에 있는 外家와 京都에 계시는 큰 삼촌과 相議한 결과

아버지 유골을 모시고 큰 삼촌과 함께 東京驛에 도착하여 보니

3대 電車에 가득 타고 傳送 나온 同胞들이 외치는 萬歲 三唱에

우리 母女는 너무나 감격하여 울었고 作別의 아쉬움에 또 울었다.

 

釜山 港에 도착하여 다시 汽船을 갈아타고

方魚津 港에 도착한 것이 새벽 3시었는데

선창가에는 男女老少 수많은 고향 친인척과 주민 여러분들이

 마중 나와서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다.

 

故鄕에서 아름다운 喪輿를 다시 만들고

全 面民葬祭로 葬禮式을 盛大히 치룰 때

 그 행렬이 10里를 더 뻗었고 유골은 月亭寺 옆

고향 마을 日山里가 내려다보이는 양지 바른 곳 당시 우리 山인 先山에 모셨다.

한 아름 크기의 日山 海石 차돌에

 “故 徐鎭文의 墓 西紀 1928년 月 日 同志 一同”이라

 成世斌 先生께서 직접 쓰신 碑石은

日山마을 바닷가에서 墓所까지 고향 분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 안으시고 운반되어온 碑石으로서 더욱 값지다.

 

1928년 11月 21일 아버지의 장례를

全日本朝鮮勞動組合葬으로 성대히 치른 후

 우리 모녀가 비통한 심정으로 있을 즈음 까지

 慶北 浦項 사람이 우리 집에 묵고 있었는데

이름은 權一成, 당시 明治大學校 學生이었고

어린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 해 주었기 때문에 인지

기억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어느 날 일경들이 우리 집에 와서

 권일성 학생을 체포해 가는 것을 본 어머니께서

나를 꼭 부둥켜안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쿵쿵 뛰고 있었다.

 

 며칠 후

 

 

아버지의 동지 한 분이 권일성이 보내왔다면서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으니

어머니께서 밥을 지어 손수 넣어달라는 부탁이었다.

어머니께서 밥 심부름하시면서

 반찬 중에 다사마 튀김이 항상 빠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다시마를 싼 종이가 동지들과 내통하는 밀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구타하는 소리와 고함소리, 신음하는 소리 등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서 참혹하게 당하는 모습이

 상상 되어서 유치장에 밥 심부름으로 드나드는 일과는

고통의 나날들 이었다고 훗날 술회하셨다.

 몇 달을 다녔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는 수 없이

밥 심부름을 그만 두고 서둘러 귀국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권일성 학생의 소식은 전혀 없다가,

 

우리 모녀가 귀국하여 아버지 장례를 고향 면민 장으로

 성대하게 끝내고 한참 후에야 그 학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인편으로 전해 듣고 우리 모녀는

권일성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버지를 생각하며

 가슴이 저미어 슬피 울고 말았다.

 

아버님 생전에 어머니께 “사람은 많이 배워야 한다. 정자 공부 많이 시켜라!” 하신 말씀이 있었기에,

내가 열 네 살 되던 1938년에 남목공립보통학교(南牧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그 해에 어머니와 함께 일본 효고껭 가와배군

 가미쭈무라 시모가하라(兵庫縣 川邊郡 神津村 下河原)에 거주하시는

큰삼촌(徐鎭華)댁에 찾아갔다.

며칠 후 졸업장을 들고 찾아간 학교는

오사카(大阪) 센진(宜眞)여자고등학교였는데

 입학시험을 치른 다음 날 삼촌댁에

자전거를 타고오신 어떤 분이 “정자야 시험 잘 쳤나?”하시며

 빙그레 웃으시던 그 분이 9년 전에 뵈었던 아버지의 동지 이성백(李成佰)아저씨였다.

80년대 재일거류민단 고국방문객을 통하여

민단 차원에서 매년 아버지 추모제를 거행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아버지께서는 일산사립보성학교 주 ․ 야학생을 가르쳤다.

 당시에는 부녀자들은 야간부에 많이 다녔는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야간부 아버지 제자는 숙모 언니,

 숙모 송기난, 월봉 끝조, 정갑길씨 부인, 박두복씨 부인,

방어진 한기선, 영달씨 곰보누님, 성세륜씨 부인,

 장두길 모친, 어머니 윤상필, 방어진 장덕순, 등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부터 어머니께서는

속병을 앓기 시작하여 약 3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모진 고생을 하시던 중 1963년 무렵

 깨끗한 옷차림에 나비넥타이, 검정색 의료가방을 드신 아버지께서

 꿈속에 나타나셔서 어머니를 모시고

소나무가 우거진 어느 산속 정자에 올라

 어머니를 눕혀놓으시고 복부에 주사를 한대 놓으시고

 아무 말 없이 사라지신 뒤로는 그 속병이

 온데간데없이 깨끗이 나으셔서 아흔두 살 까지

아픈 곳 없이 사시다가 편안히 이승을 하직하셨다.

 

1992년 친인척들의 애도 속에 어머니 장례를 치른

삼일 후인 삼우 날 밤 꿈속에 자그마한 몸매에,

 갈색양복에 검정색 넥타이를 매신 아버지께서

 홀연히 거실에 나타나셔서 “정자야! 욕봤다.” 한 말씀 하시고 사라지셨다.

외롭게 사셨던 당신의 부인을 평생 동안 모신데 대한

고마움의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머니를 당신이 계신 곳으로 잘 모시고 가셨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면서 안도의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러내렸다.

 

아버지의 유품은 月峯里 접장 장병두(張秉斗)선생에게

사사할 때 친히 쓴 漢詩 칠언절구 몇 수가 있으며,

비망록 같은 공책 한 권이 있었는데

정확하게 그 내용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략적으로

당신의 결심, 노래 가사 등이 쓰인 것으로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소중히 간직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아버지께서는 교편을 잡고계시면서

 나라를 빼앗긴데 대한 한을 당신께서

 직접 작사 작곡하였는지는 분명치 않으

나 노래로 만들어 가르쳐 주야 학생들이 애창하였다 한다.

 노래 제목은 『고향생각』,『적포가』,『집 잃은 새』,

『그리운 엄마』등인데

 그 중 아버지께서 즐겨 부르셨고 나도 알고 있는

 노래『고향생각』의 노랫말과 곡은 다음과 같다.

 

친구 다 가고

밤은 깊어 적막한데

홀로앉은 이내 몸

세상이 모두 잠이들어 고요한데

고향생각 절로나네.

 

 (주: 위의 악보는 음악가이신 부산상록수합창단 房富源단장께서

 내가 부르는 노래를 직접 들으시고 5선지에 옮겨 작성하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이 조선땅에 태어나면서부터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결사의 신념을 가지신 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딸은 1928년 10월25日에 있었던 天皇(昭和) 御大典 사건 진실이

전문 지식인들에 의하여 하루바삐 밝혀지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도 가끔 全日本朝鮮勞動組合葬 葬禮式 寫眞을 꺼내 보면서 아버지를 回想한다.

2003年 7月 20日 湞 子 씀

 

 

 

 

 

◎. 서진문(徐鎭文)과 『모』 사건

 

장인 서진문에 대한 신문보도를 요약하면

◆총독부 제4회 안부조사 도착…

본부사서 관내 현주자… , 서진문(21) 동면 일산리… (동아일보, 1923. 9. 28. 금)

 

◆본사 특파원 제6회 안부조사

… 서진문 울산 동면 … (동아일보, 1923. 10. 8. 월)

 

◆일산녀자야학

경남 울산군 동면 일산리에는 본래 여자의 교육기관이

전무하든 바 차를 유감으로 생각하야 동리 서진문씨 외

제씨는 당지 보성강습소 내에 여자야학회를 개설하고

조선어, 산술, 수공 등을 교수하는바 방금 40여 명의

강습생을 수용 중인대 여자교육계에 공헌이 다대하다하야

일반의 칭송이 적적하다더라.(울산) (동아일보, 2. 6. 수)

 

◆울산 8단체 연합간담회

… 울산 사회단체 간담회는 … 경남 울산군 방어진에서 개최하얏는데

… 재일노총 서진문 제씨의 감상담을 더욱 이채를 발하고 ….(방어진)…(중외일보, 1927. 11. 7. 월)

 

◆지난 이십칠일에

 미명에 재일본조선 로동조합을 습격하야

지도 간부를 검거하엿다함은 긔보도한바어니와

그중에 신내천 조선로동조합 서무부장 서진문 씨는

십륙일에 인력거로 석방되엿는데

 그는 신음하다가 십칠일 오후 닐곱시경에

필경 가티 검속되엿든 리성백군을 속히 구원하라

나는 아모리해도 못살겟다는 등 유언을 남기고

 고만 세상을 떠낫더라.(조선일보, 1928. 11. 27)

 

◆심장각기 중 피검, 유치장에서 필경 절명

- 울산군 출생 서진문, 석방운동도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횡빈시 수서에서 필경 절명되엇다.

지난 10월 25일 미명에 횡빈시 수서 형사 수십명이

돌연 활동을 개시하야 신내천현 조선로동조합

횡빈지부를 습격하야 서진문, 김천해, 이성백 등

 다수한 조선사람을 검속하얏섯는데 그 중 서진문군은

잡혀가기 전부터 심장각기로 맥박이 일백오에 올라

거의 죽게 되엇섯슴으로 동기들은 그의 석방운동도 하얏스나

 수서에서는 들어주지도 아니할 뿐만 아니라

경찰의를 불러 보이지도 아니하는 동안에

지난 십일월십륙일에 니르러

 마츰내 절명하고 말은 사건이 잇다는바

원인은 경찰서 류치장에서 죽엇슴으로 자세히 알 수 업스나

풍문으로 떠돌아 다니는 말을 종합하면

 가혹한 취됴와 천식과 한기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라는데

 그가 죽을 찰라에 “무산계급 ○○만세! 얼른 리군을 구원하라! 나는 벌서 살아나지 못하겟다” 

라 하며 거리검속을 당하얏든 리성백, 리승렬 두 사람의 장래를 무한 걱정하얏다는데

서진문군은 본적을 경남 울산군 동면 일산리에 두고

횡빈시 중구 본목기륜 일천사백구십구번디에서

오래전부터 로동운동을 하야왓다는바 그의 고향에는

 미망인으로 윤상필 녀사가 친덩 어머니와 어린 딸 하나를 봉손하고

 슬픔에 잠기어엿다한다(동아일보, 1928. 12. 7)

 

◆고 서진문군 유족 전송식

_ 3일 횡빈에서

귀보한 바와 가티『모』사건에 관련되야

일즉이 횡빈시 가하서에 구금되엇다가 거긔서 죽은

 고 서진문군의 유골과 부인 윤씨와 딸 정자의 전송식을

 지난 1월 3일 오후 3시에 신내천현 조선로동조합회관 안에서

 60여 명의 남녀동지가 회합하얏는데

사회자 권일선군의 개회사가 시작되매

일동은 10분간의 묵도가 잇슨 후 각처에서 온

남녀동지들의 눈물석긴 전송사로써 맛치고

덩거장으로 떠날 때 최후의 고별로 부인 윤씨는

 딸 정자를 안고 통곡하며 동지들은 유골을 둘러싸고

 군이 평소에 부르는 xx가를 고창하야 울음과 노래가온데

 회관을 떠나 동지들의 유족만세 삼창으로

 동 오후 8시 17분 급행렬차로 횡빈역을 떠나

군의 고향인 울산으로 향하얏다더라. (조선일보, 1929. 1. 12)

 

◆고 서진문군 장례식을 거행

노동운동의 선구자로

 제1선에 서서 만흔 활동을 하다가 『모』 사건에관련되어

일측 횡빈가하서에 구금되엇다가 객사한

 고 서진문의 유족 전별식을 횡빈에서 하엿다는 것은

기보된 바이니 군의 고향인 울산에서는

거 11일 오전 3시 방어진 부두에서 기다리든

5월청년동맹원의 출영으로 무사히 운구하야

 12일에 각 단체원의 연합으로 여러 동지가 서로 상여를 메고 운구하야

 비통하고 정숙한 가온데서 장식을 맛치고 묘전에 비석까지 세웠다더라. (조선일보, 1929, 1. 20)

 

◆서군 추도회에서 동포 10명 검속

- 횡빈에서 열린 추도회에서, 불온하다고 10여 명이 잡혀

횡빈에 잇는 신내천조선노동조합에서 오래 동안 분투하고 잇든

로동운동의 맹장 서진문군이 작년 11월에

『모」사건으로 횡빈경찰서에 검거되어 필경 형무소에 수감되어 잇든 중

경찰서에서 당한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병을 어더

보석출옥된지 불과 긔일에 드듸어 이 세상을 떠나버린지

 벌서 1주년이 되엇슴으로 전긔 신내천조선로동조합에서는

 지난 19일 오후 7시에 횡빈 신수관에서

동지 5백여 명이 회합하야 그의 추도회를 엄숙하게 거행하얏는데

 당일 장내 장외에는 다수 경관이 출동하야

경계가 비상하얏다 하며 추도사, 추도문은 중지 또는 압수를 당하고

 서진화 외 10여 명은 검속까지 당하얏더라. (동아일보, 1929. 11. 27. 수)

 

◆지난 십구일 오후 칠시 신내천현 조선로동조합 주최로

횡빈시내 신수관에서 고서진문군의 제일주년 추도회가 열리엇는데

장내장외에는 수백명 경관의 경계가 자못 살긔를 띠엿으며

시작되기 전에 장내 입구에는 검속자를 시러갈 감옥자동차가

두 대이나 준비되어 잇든 중 장내에 부처노흔

 표어가 불온하다하여 전부 압수를 하는 등

이와가티 험악한 분위긔 속에서 오백여 명의 대중의 집합으로 정각이 되자

정웅군이 등단하야 개회를 선언 동시에

의미심장한 개회사로 비롯하야

묵도 삼분간과 리성렬 군의 략력 보고가 잇슨 후

추도문 랑독에 들어가자 읽기도 전에 전부를 압수당하얏스며

추도사에 들어가서 고 서군의 친동생되는 서진화군을 비롯하야

대부분이 중지 검속을 당함에 여긔 분개한 대중은

노호성을 연발하야 장내의 공긔는

 미구에 수라장으로 화할 형세이엇스나

원래 경관의 엄중한 경계로 인하야 별일업시

오후 십시경에 산회하얏는데 고 서군이

로동자의 리익을 대표하야 맹렬히 싸호든 투사이엇스며

군의 죽엄이 죽엄인것만큼 특별히 당일의 주목을 끌게되엇스며

검속된 사람의 씨명은 다음과 갓다더라(조선일보, 1929. 11. 28)

 

이상은 장인 서진문이 1928년에 순직한 다음해인 1929년 까지 신문에 보도된 내용들이다.

위 1928년도 보도 내용 중

 

“… 미명에 재일본조선로동조합을 습격하여 지도 간부를 검거하엿다함은 …

(조선일보. 1928. 11. 28)

 

“ 지난 10월 25일 미명에 횡빈시 수서 형사 수십명이 돌연 활동을 개시하야

신내천현 조선로동조합 횡빈 지부를 습격하야 서진문 … 등 다수한 조선사람을

검거 검속하얏는데 … (1928. 12. 7)에서 습격하여 검거하였다. 하였고


순직한 다음해인 1929년도 보도 내용은

“ … 고 서군이 로동자의 리익을 대표하여 맹렬히 싸호든 투사이엇스며 …

(조선일보. 1929. 11. 28)… ”

 

이상의 보도 내용으로 보아 서진문이 핵심적 지도 간부였으며

 그 활동상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진문만 가혹한 고문으로 죽임에 이르게 된 데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의 여지가 있다.

 

다음 내용을 살펴보면

“ 귀보한 바와 가티 「모」사건에 관련되야 … (조선일보. 1929. 1. 12)”󰡓��

“ 노동운동의 선구자로 제1선에서서 만흔 활동을 하다가「모」사건에 관련되어

… (조선일보. 1929. 1. 20) 에서와 같이

「모」사건 이라고 하였는바 「모」사건이 어떤 사건인지가 매우 궁금하다.

급습하여 간부들이 다수 체포되었는데

 서진문이 이십 여 일간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는 동안에

 혹독한 고문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

 단순히 노동운동만이 체포 요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내가 결혼전 청년시절에 고향 바닥에 나돌았던

서진문에 대한 이야기와 결혼 후 사위가 되어

장모님으로부터 자세히 들은 바에 의하면 장인 서진문이

 “ 일본왕 히로히토 어대전 행사시에 꽃으로 장식한 전차에

직접 뛰어들어 권총으로 일왕을 살해하려다 체포되었다.”

고 들었으며 또한 서진문 생전에 함께 국내외에서 활동한 동지나

기타 지인들이 장모님 안부인사차 방문하였을 때도 같은 말씀들이었다.

당시 어대전 행사를 전후하여 일본 당국은 삼엄한 경계를 펼쳤으리라 추측할 수가 있다.

 

아내의 회고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어느 때인가

도일하기 전 날 일산진 우리 동네 동편 해돋이 동대산

 산등선 소나무 숲을 바라보시며 산머리에 바람이 불면

 내가 살아있는 줄 알고 바람이 멎으면 내가 죽은 줄로 알아라하셨고

 또 잠시 귀국하셨다가 도일하기 전날

뒷마당 채소밭 울타리에 핀 개나리 한 그루를 뽑아다

어머니께서 부엌일 하시면서 쉽게 볼 수 있는 곳에다 옮겨 심으면서

 이 꽃이 피어 있으면 내가 살아 있는 것으로 알고,

시들면 내가 죽은 줄로 알아라하셨다.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도일(渡日)하신 해인

 1928년 6월에 비로소 섯 살 때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를 만나러 일본에 건너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어머니 손에 이끌려 일본 신내천횡빈시(神奈川橫濱市) 혼모구로 갔을 때

아버지께서는 시기적으로 잘 왔다고 하시면서

 두 모녀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조금 있다가 내 뼈를 고향으로 가지고 가라.

고 하셨을 때 우리 모녀는 울고 말았다 ”고 기술하였는데

 이와 같은 정황을 보아 서진문은

 생사를 걸고 어떤 대사를 치르고자

의연한 결의가 이미 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928년 11월 21일 전일본조선로동조합장으로 성대히 장례를 치른 며칠 후

야간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린 뒤 1시경 누군가 대문을 두들겼다.

누구냐고 물으니 고베(神戶)에서 온 동아일보 기자라고 하였다.

집 앞에 설치된 경찰감시초소를 피하는 눈치였다.

잠시만 들어가도 되겠느냐며, 들어와서는 놀라지 말라고 하면서

서진문에 대하여 자세히 듣고는 통금이 해제가 된 후인 새벽에 돌아갔다. ”고

유가족인 장모님과 딸인 나의 아내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십 여일 후에 보도된 동아일보(1928. 12, 7)는

“ ... 서진문군은 잡혀가기 전부터 심장각기로 맥박이 일백오에 올라 거의 죽게 되엇섯슴으로 ... ” 였는데

평소 건강한 모습으로 고향 교단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후학을 가르쳤고 일본에서는

노동자 동료대중 앞 단상에서 주먹으로 책상바닥을 내리 쳐가면서

열변으로 토로하는 모습을 모녀가 직접 목격하였으며,

 재일본조선노동총연맹 대회에서 서진문은 의안심사위원,

예산결산심사위원, 전형위원

그리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당시 일본지역 조선인 노동자들의

 구심적 역할인 신중앙위원에 선임된 점 등등을 보아

그러한 중책과 활동을 병약한 자에게 맡길 수 있었을까?

장모님은 물론 친인척과 주변 지인들의 말씀에도

장인의 병세에 대하여는 한마디 하신 바도 들어 본 바도 없다.

 

위의 기사에 이어 동아일보는

 “ …풍문으로 떠돌아다니는 말을 종합하면 그의 고향에는

미망인으로 윤상필 녀사가 친덩 어머니와 어린 딸 하나를 봉손하고

슬픔에 잠기엿다한다.”로 기사화 한 점에서

 당시 일본 땅에 거주했던 유가족으로서는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동아일보는 다음해인 1929. 11. 27. 수요일 보도에서는

 “ … 로동운동의 맹장 서진문군이 작년 11월에 『모」사건으로

횡빈경찰서에 검거되어 필경 형무소에 수감되어 잇든 중

 경찰서에서 당한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병을 어더

 보석출옥된지 불과 긔일에 드듸어

 이 세상을 떠나버린지 벌서 1주년이 되엇슴으로 …”한 내용은

작년도 보도 내용과는 상반되게 기술한 것을 볼 때

 체포 동기와 사인(死因)을 감추기 위해 호도한 것이라고 예측이 된다.

 

2004년 울산 동구 지역사 연구소 심포지엄(2004. 11. 15, 월)에서

「울산 동구의 항일운동 재조명」이란 제하의 조사유인물에 의하면

“당시 서진문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원인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그가 일본왕의 어대전 행사 때 꽃전차를 덮쳐 권총으로

 일본왕을 살해하려다가 실패하고 체포되었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견해는 히로히토 일본왕의 어대전 행사를 앞두고

실시된 검열과정에 적발되어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가운데 서진문이 어대전 행사에 직접 뛰어들어

 권총으로 일본왕을 살해하려했다고 하는 주장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대전 행사가 11월 10일인데

서진문이 체포된 것은 10월 25일이기 때문이다.”라고 하고있다.

따라서 두 가지 체포 경위에서 후자인 10월 25일에 예비 검속되었다 하더라도

어떤 「모 사건에 관련되어」있었는지 사건의 주제를 알 수가 없다.

 이십 여 일간이나 구속되어 있으면서 죽임을 당할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면 어떤 대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과거 왜곡된 역사, 의문의 역사들이 재조명되고,

하나씩 의문이 풀리고 있는 이 시점에서 볼 때

 장인 서진문의 체포 동기가 명명백백하게 밝혀졌을 때

억울한 죽임에 대한 고 서진문의 명예가 회복되리라 생각한다.

 

「서진문 항일운동 재조명」심포지엄에서

“ 일본에서는 1928년 11월 10일 御大典 행사를 끝내고 나서

 여러 관공서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 졌는데,

경찰로는 유일하게 서진문을 체포하여 고문했던

橫濱경찰서가 수상하게 된다.

이것은 서진문의 일본왕 암살과 모종의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즉, 횡빈경찰서에서 御大典 행사를 앞둔 시점에서

서진문을 체포한 것이 일본왕 암살 계획을

 사전에 탐지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많은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일본 정부에서는

그들 왕의 암살을 사전에 차단한 횡빈경찰서에 당연히 포상했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미망인인 장모께서 생생히 기억하여 증언한 바를 보아도

10월 25일과 御大典 그리고 일본왕 암살로 연결되는

 숨겨진 모종의 대사건이 있었음이 명확하다고 본다.

 끝으로 「모 사건」의 명확한 진실을 밝히는 데는

오직 수사기록 문서만이 결정적 열쇠가 된다고 생각되는데,

경찰수사기록문서 열람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