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회고록 들어가기

무극인 2007. 11. 17. 21:45
  

# 천재동 '아흔 고개를 넘으니…'

-92살 원로 식을 줄 모르는 예술혼


 천재동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류 보유자(인간문화재) 천재동(92) 씨가 '증곡 천재동 회고록'을 펴냈다. 회고록의 제목은 젊은 세대를 긴장시킨다. '아흔 고개를 넘으니 할 일이 더욱 많구나!'(동아정판) 그가 부산의 문화현장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그를 '어르신'으로 깍듯이 모신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회고록의 첫머리에 그는 이렇게 썼다. '예술을 생의 목표로 삼아 힘껏 노력하였어도 아직 끝이 보이지 않음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최후의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고자 할 따름이다.'


부산 문화예술계 최고 원로인 그는 1915년 울산 방어진에서 태어났다. "천호방네라는 존경의 호칭으로 불리는 자랑스러운 가문'의 둘째 손자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라났다. 그는 젊은 시절 서울과 도쿄에서 연극과 미술을 공부했고 1945년부터 부산 경남의 초·중등학교에서 연극과 미술을 열정적으로 교육한 문화교육의 선구자였다.


그의 진면목이 발휘된 부문은 우리 전통민속예술이다. 그는 회고록의 '나의 전공 다섯 분야'에서 토우, 동요민속화, 연극, 동래야류탈과 창작탈, 동래야류 등 민속놀이 분야 등 다섯 가지를 '나의 전공'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가운데 오늘의 '인간문화재 천재동' 또는 '원로 예술인 천재동'을 자리매김한 분야는 아무래도 동래야류와 이어져 있는 탈 제작과 전통민속예술 부문이다. 큰 판형에 416쪽에 달하는 회고록은 수많은 자료와 그 자신의 기록을 통해 예술인 천재동, 인간 천재동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부산 경남 지역의 문화사 자료로서도 매우 요긴한 이 회고록은 아쉽게도 가족이 그의 삶을 기념하기 위해 한정판만 만들어 시중에서 구할 수는 없다. 출판기념회는 오는 15일 오후 6시 부산 동구 크라운호텔 2층 동백홀. (051)802-1401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

입력: 2007.06.04 19:50 / 수정: 2007.06.05 오후 7: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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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곡 천재동은 2007년 6월 15일 회고록 출판 기념회를

                    성대히 가진 뒤 7월 26일 유명을 달리하셨다.

                   회고록을 남기심은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 회고록 들어가기

 내 90평생 예인의 길을 늘 바쁘게 걸어오면서도 불행보다 행복한 삶을 영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배려와 동료들 그리고 주변 모든 분들께서 직 간접의 도움과 충고, 격려를 아낌없이 주신 덕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동안의 나의 행로를 구태여 구분하여 본다면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겠는데

 제1단계(1915 ∼ 1943)】는 유복한 ‘천호방네’ 둘째 손자로 태어나 잘 먹고, 잘 입었고 주변 분들로부터 ‘호방네 손자’라면서 귀염도 받고, 대접도 받고, 집안 어른들은 명이 길라고 양모를 세 분이나 인연을 맺어 주셨고 청년으로 성장해가면서 육상, 축구, 야구 선수로서 ‘제비’로, 연극에 재능을 발휘하였다 하여 ‘天才童(천재동)’이란 별명으로 불려지기 까지 하면서 화려한 청춘 시대를 거치면서, 동경에서 서울에서 또 다시 동경에서 하고 싶은 미술과 연극 공부를 한 28년간이 나의 성장기이다.

 제2단계(1944 ∼ 1969)】는 아내 서정자와 결혼하여 장모님을 모시고 처가살이를 하면서 지긋지긋한 ‘징용’ 문제를 무사히 거쳐 읍사무소 근무 중에 조국의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고, 곧 바로 교직에 투신하여 고향 방어진 초, 중등교에서 8년, 울산 2년, 부산전포초등8년, 남천1년, 토성4년, 연지2년 통합이 25년 간 교육현장에서 연극화한 수업과 창작한 입체괘도를 이용한 공개 모범수업 등 숨 가쁘게 후학들을 가르치는 바쁜 와중에서도 「어린이 민속극단」을 창단하여 공연 활동하였고 , 성인극단, 민속탈놀이, 시민위안 잔치, 길놀이, 작품 전시회 등 수다한 예술봉사 활동들, 정말 초인적 활동을 서슴지 않고 내 혼자서 해냈다. 뿐만 아니라 초등 5교, 중등 2교, 대학 2교, 기타 교 무려 14개 교를 순례하면서 민속 및 길놀이를 지도하는 가운데 모든 대본, 기획, 무대, 의상, 소품, 연출, 감독 등등 혼자서 감당하여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25년간이 나의 활동기이다,

【제3단계(1970 ∼ )】는 교직 사회를 미련 없이 내던지고 전통 민속 예술문화 단체에 투신하여 어릴 때부터 희망했었던 그 꿈을 전통 민속 문화 발굴, 연구, 조사, 채록, 재연, 정립 하면서 연극은 물론 한국에서 최초로 『창작 탈』『민요풍속화』『토우』전시회를 개최하여 나의 예술세계를 마지막 투혼으로 승화시킨 결실기이다. 이러한 나의 행로는 일제 강점기에 내가 태어난 고향 방어진의 지리적인 특수성이 근본이 되었고, 제2 고향인 부산 동래민속예술이 나의 끼와 다행히 잘 접목되어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고 감이 단언할 수 있으며 특히 평생을 같이하면서 계속적으로 지극성심으로 헌신한 아내 서정자의 내조가 있었기에 오늘에 이르렀음도 부인할 수가 없다. 그저 회고(回顧)한다고 필을 잡고 생각나는 대로 긁적이다 보니 후학들에게 귀감이 될 만큼 내용이 거창하거나 충분하지 못한데 대하여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끝으로, 문화발전에 아낌없이 이바지하시고 후학들에 사표(師表)가 되시다 아깝게 타계하신 향토연구가 길포 박원표(朴元杓), 사업가 한원석(韓元錫) ,먼구름 한형석(韓亨錫) 형제분, 사업가 곽영욱(郭永郁), 소설가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 부산문화 복덕방 김상수(金尙洙), 사진예술가 독보(獨步) 허종배(許宗培), 명우(名優) 이해랑(李海浪), 화백(畵伯) 우신출(禹新出), 사업가 박태윤(朴泰倫), 소설가 향파(向波) 이주홍(李周洪), 민속가 신우언(辛佑彦), 화백(畵伯) 김종식(金鍾植), 교육가 장지완(張志完), 사업가 김종필(金鐘弼), 화백(畵伯) 청초(靑草) 이석우(李錫雨), 화백(畵伯) 윤제(潤齊) 이규옥(李奎玉), 교육가 이시우(李時雨), 중요무형문화재 제26호 영산줄다리기의 기,예능보유자 일봉(逸峰) 조성국(曺星國) 등 제 선, 후배님들과 벗들을 내 어찌 잊으리오. 그리고 최근에 작고하신 고(故) 한상돈(韓相敦) 송혜수(宋혜수) 화백께 이 지면을 빌어 삼가 명복을 빌어마지않습니다. 나의 예술 행로에 가까이에서 혹은 멀리서 음으로 양으로 충고와 격려로 도움을 주신 여러분들께 한 번 더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끝으로 영광스런 이 땅에 뿌리를 내려주신 영양(潁陽) 천씨(千氏) 만리(萬里) 중시조(中始祖)님의 영전에 회고집을 삼가 바칩니다.

                                                2007년 5월

          潁陽 千氏 萬里 中始祖任의 第十六代孫 曾谷 千 在 東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