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파제 공사
내가 여덟 살 되던 해인 1923년에 주민들의 휴양소이던 볕바우산(白陽山)을 뭉개어 백사장을 매축하는 동시에 백양산 꼬리에서 동편 시리섬(일인들은 나마고시마: 해삼섬)을 향하여 레일을 깔아놓고 거대한 철근콘크리트 덩어리를 심해에 굴러 넣어 조성하기시작한 공사가 무려 6년이나 걸려 1928년에 완공되었다. 당시로써는 공사 규모로 보아 국가적 차원의 대공사요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축조된 방파제를 일제(日帝)는 조선의 명물로 선전하고 기념엽서까지 발행할 정도였으니 당시 방어진의 위상이 어느 정도 인지를 알 수 있다. 완공 축하 행사도 다채로웠는데 그 중에서도 한 쪽에 대형 수족관을 만들어 놓고 상어를 풀어 넣은 뒤 수족관 상단에 깔아 놓은 널판자에 귀빈들이 걸터앉아 낚시하는 분위기가 이채로웠고, 매축지 광장에서는 또 다른 행사인 ‘모찌나게(떡 던지기)’를 하였는데 모찌나게는 크고 작은 찹쌀떡을 대중에게 던지는 것인데 특히 ‘다이마이(큰떡)’ 속에는 경품권 또는 은전(銀錢)이 들어있어서 대중들은 경쟁적으로 떡줍기를 하면서 즐거워하였다. 일인(日人)들 중에 생활에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는 집을 지으면 모찌나게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와 일인들은 모두 즐겁게 떡 줍기를 하였다.
◎ ‘앤야라차~아’ 공사
내가 10살 되던 1925년 을축(乙丑)년 왜바람이 불어 닥쳤을 때 방파제가 거센 파도에 밀려 세 토막으로 파괴되고 목선은 모조리 완파(完破), 기선은 반파 되는 것은 물론 가옥과 전봇대도 파괴되어 모든 조각들이 길을 메우는 등 경제적 피해는 물론 정신적 피해도 엄청 컸다. 이 태풍 피해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건설이 시작되었다. 먼저 해안통 매축지의 지반을 튼튼히 다지기 위하여 ‘앤야라차~아’ 공사부터 시작되었는데 전봇대 같은 말목을 운반할 때 말목 당 두 사람 또는 네 사람이 일개조로 짜여진 수 십 개조의 목도꾼들이 현장까지 ‘영차! 영차!’ 소리하며 발을 맞춰 운반하는 광경도 볼만하였지만 말목을 땅에 박기 위하여 철봉을 수직으로 지지 대에 고정시키고, 철봉 가운데 통로를 통하여 내리칠 쇠뭉치를 끌어 올리고 놓을 여러 가닥의 밧줄을 인부들이 각각잡고 우두머리가 하는 소리에 맞춰 공사가 진행되는데, 높은 대(臺)에 올라선 우두머리가 ‘저기 가는 저 처녀’ 하고 앞소리를 하면, 인부들이 ‘앤야라차~아’ 하면서 밧줄을 동시에 힘껏 당기면 쇠뭉치가 위로 올라간다, 또 우두머리가 ‘모시적삼 안섶 안에’ 하면 인부들이 ‘앤야라차~아’ 하면서 밧줄을 동시에 놓으면 쇠뭉치가 내려와 쾅~ 하고 말목을 내리치면 땅속에 말목이 박힌다. 또다시 ‘분통 같은 젖통 보소’ ‘앤야라차~아’ … ‘앤야라차~아’ … 뒷소리를 ‘앤야라차~아’ 한다 해서 사람들이 이 공사를 ‘앤야라차~아’ 공사라고 불렀다. 앞소리 말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만 때에 따라 즉흥적인 노랫말이 나오면 인부들의 흥은 고조에 달하고 구경꾼들도 더욱 재미있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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