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풍경1
동해 남부의 미항 방어진은 본래 해안에 접한 낭떠러지인데다 칡넝쿨 등 이름모를 잡목들로 우거져 사람의 발길이 쉽게 닿을 수 없었던 곳이었다. 옛날 왜구들이 침범했을 때는 이곳 낭떠러지 아래 숲속은 ‘지리’ 주민들의 유일한 피난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어린 날 항구 중앙 지점에 갔을 때 주먹만한 크기의 차돌 자갈밭이 펼쳐져 있었는데 매축한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방어진 반월형 안만 동편은 노송이 우거진 산머리로부터 ‘섬끝’이라 불리는 곳 해안선 까지 길게 뻗어 내린 잔디밭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어 평지와 다를 바 없이 완만하였고, 앞 바다에는 거문고 형상을 한 시리섬(瑟島)이 가로놓여 자연히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모꾸라(東津) 일대도 넝쿨들이 뒤엉킨 낭떠러지였고 해변의 자갈밭과 경계를 이룬 숲속에 두개의 작은 동굴이 있었는데 이 동굴에는 목장의 가축들을 노리는 범이 드나드는 곳이라 하였고, 이 동굴을 우리는 ‘굴뚝밑’이라 불렀으며 한때 거지들 삶의 보금자리이기도 하였는데 지금의 회 센타 부근이다.
방어진 항에서 해안을 따라 서편으로 가면 새하얗고 깨끗한 백사장이 펼쳐지면서 크고 작은 바위가 우뚝 우뚝 서 있는데 이 바위가 아침 햇살을 받으면 종일토록 빛이 난다 하여 사람들은 이 일대를 이름붙이기를 ‘볕바우’라 하였다. 볕바우에서 내륙으로 쳐다보이는 산이 볕바우산(白陽山) 이다. 즉 볕바우산 자락 모래사장 일대가 볕바우이다. 볕바우산은 온통 노송들로 우거져 그 고적(孤寂)함과 함께 장관을 이루었는데 봄이 와서 삼월삼짓 날에는 늘어진 가지마다 그네줄을 매달고 산유(山遊)하는 곳이었다. 볕바우에서 산을 쳐다보면 보통산처럼 우뚝 솟아 보이지만 산정에 올라서면 완만한 평지에 땅이 기름져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토착민들이 대대로 농사를 지으면서 평화스런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 이 촌락의 지명이 ‘지리’이다. 지리라는 낱말의 뜻은 이 지방 방언인데 ‘지렁이’를 뜻한다.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이곳이 본래 습지여서 지렁이가 많이 서식 한데서 유래되어 붙여진 지명이라 하였다. 내가 태어난 1915년 일제강점기 당시 지리에는 우리 토착민들과 이웃하여 일본 강산현(岡山縣)에서 도래한 히나세(日生)인들이 이미 살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서도 집단적으로 모여 중심을 형성하여 사는 지역을 ‘히나새 골목’이라 불렀다. 히나세인에 이어 후쿠오카현(福岡縣) 등지에서 어민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왔는데 이들은 히나새 골목 아래쪽 해변에서 가까운 곳에 정착하였다. 이 새로운 정착지를 일인들은 ‘하마(邊)’라 불렀는데 우리들도 ‘너 어디 가니?’물으면‘하만에 간다’하였다. 하마에 거주하는 일인들이 최초로 신사를 세웠고, 해안에 작은 석두(石頭)를 구축하여 정박 및 방파제 역할을 하도록 하였으며 공의(公醫)병원, 치과병원, 세관, 당구장, 선구점, 기름탱크 등 중요 시설이 모두 하마에 있었다.
◎ 고향 풍경2
방어진 앞 바다는 수심, 조류, 수온 등 수산물 서식에 적당한 천혜의 수역이다. 고래, 방어, 고등어 등 어류는 물론 미역, 김 같은 해초류도 풍부하여 이를 안 일인들이 그냥 보고 지나칠 리가 없다. 일인들에 의해 방어진 항이 본격적인 개발의 바람이 불면서 동편 섬끝과 자갈밭 그리고 서편 볕바우산 일대만 남겨두고 온통 주거지로 변하였다. 해안통과 산복에는 신작로가 뚫리고 은행, 우편국, 자동차부, 만물상, 요정 등 ‘청루(靑樓)골목’같은 홍등가도 생겨 낮 밤 없이 샤미센(三味線)과 북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극장가에서 펄럭이는 선전용 깃발은 우리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언덕을 뭉개어 심상소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삼밭골에 건설된 화력전기회사에서 큼직한 쇠바퀴가 밤낮 가리지 않고 쉴 사이 없이 퀑퀑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먼데까지 들려왔다. 항구에는 고등어 잡이 건착선(巾着船) 30여척과 거기에 딸린 보존선(保存船), 운반선들이 항구를 가득 메웠고 아침저녁으로 일인 어부들이 그물을 식히느라 그물을 물에 담갔다 건져 올리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부르는 ‘세노야 세노야’ 뱃노래가 울려 퍼지면서 그들은 기세를 과시하였다. 훈도시 차림의 일인 어부들이 분주히 이 배에서 다음배로 가로질러 건너다니는가 하면 그런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꼴에 우리 부녀자들을 물론 남정네들 까지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방어진에는 백 명을 수용이 가능한 대중목욕탕이 3곳이나 있었는데 목욕탕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훈도시 차림으로 운집한 군상들은 상상을 초월한 광경이어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신기하여 구경거리는 충분히 되었다. 간혹 공산체제로부터 탈출하여 유랑 생활을 하는 백색계 러시아 노인들이 입항할 때가 있었는데 감색 제복을 입은 그들은 구멍이 송송 난 뚜껑이 달린 색소폰 형태의 주먹 크기 만 한 마도로스파이프를 입에 물고 연신 연기를 뿜어대면서 거리를 기웃기웃 거리며 배회하는 광경도 이채로웠다. 일인들은 무인지경에 가까운 황지(荒地)인 방어진을 개척하여 고등어 잡이 전초기지로 만들어 육·해상을 막론하고 왜풍일색(倭風一色)으로 만들어 놓았다.
방어진에 가면 일자리가 있고 잘 살아 갈 수 있다는 소문이 널리 번져나가면서 조선 각지에서 모여든 우리 노무자들이 일부 미개발 항구 자갈밭을 매축하느라 ‘앤야라차~아’ 노동요를 불러가며 땀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현장을 우리들에게는 또 하나 구경거리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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