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의 궁전 포장마차
동경(東京)내에 후까가와(深川)라는 곳은 내가 볼 때는
시다마찌(下町: 庶民마을)로 토박이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생각되었다.
일대가 모두 일본 정통 목조 2층 가옥으로 이루어진 동네였다.
이 후까가와에서 한 달가량 생활한 것이다.
내가 묵는 이 집 가업(家業)은 요즘 우리가 말하는 포장마차,
일본말로는 ‘야다이’라 하는데 가족의 생사(生死)가 걸려있는 생계(生計)의 수단이었다.
새벽 3시전에 도매시장에 나가 재료들을 구입해서 어머니,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온 식구가 음식물을 장만하여
저녁 해질 무렵 포장마차를 끌고 정해진 장소로 간다.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식구들은 언제 어떻게 잠을 자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번 포장마차로 놀러 오라는 선심(善心)어린 말에 호기심으로 가본 적이 있었다.
거리 일대가 포장마차로 장사진을 이루었는데
그야말로 번화(繁華)한 먹자 거리였다.
본 ‘야다이’에서는 다반(茶水로 지은 밥), 니기리(회덮밥), 쿠시(꼬치), 그리고 술 등이 주 음식이었다.
마차 판 둘레를 따라 도랑 같이 홈을 파서 물이 흐르도록 되어 있는데,
손님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가락을 씻도록 되어있는 것으로 경주 포석정을 연상케 했다.
* 지진의 나라
내 방은 창가에 있는 2층. 하루는 와르릉 흔들리는 충격을 받았다.
지진이다 하고 놀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식구들은 웃고 있고, 거리에는 아이들이 태연하게 놀고 있었다.
주인 어머니가 내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왔다.
“ 창문은 항상 이렇게 열어두어야 해요, 유사시는 이문에서 뛰어 내려야 하니까,
지진 심할 때 기둥이 비틀어지면 문을 열수가 없으니까요”하는 것이다.
이곳 생활에 익숙지 못한 나에게는 불안했다.
도심지 고층건물생활에는 느껴보지 못한 일을 이곳 후까가와(深川)에서 느낀 지진 이였다.
* “죠센노 오갸꾸상”
오세덕(吳世德) 작 『백경정(白鯨亭)』 공연을 끝내고
동경으로 되돌아가려는데 현대극장 측에서
전차비용밖엔 되지 않으나 월 25원 줄 테니 준 좌원 자격으로 일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학적이 동경에 있는 관계로 돌아가야만 된다고 하였더니 대단히 아쉬워하였다.
극장 측에서는 고맙게도 동경에 가더라도 연극 공부 더 하라면서
동보계(東寶系) 극장 유락좌(遊樂座) 앞으로 자상하게 소개장을 써주었다.
동경에 복귀하자 말자 가와바다화학교(川端畵學校) 특설(特設) 인체과에 복학 수속을 밟은 후
곧바로 동보계 유락좌로 찾아갔더니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대단히 반갑게 맞이하면서 ‘일동홍다(日東紅茶)’란 노천다방(露天茶房)에 안내하면서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3개월 간 공부하고 있을 동안 “죠센노 오갸꾸상(조선의 손님)” 이란 이름으로 지냈다.
* 연출가의 자세
연출술(演出術)과 연기자들의 연습 과정을 잘 보고 배우라면서
동보계(東寶系) 연출가 선생이 가장 먼저 나에게 선보인 것은,
일본 군국주의 극으로 “짓데이가이하루 사꾸라 바나까나”
즉 “져서 보람 있는 벚꽃이어다” 란 뜻인데
태평양전쟁을 발발시킨 특공대 잠수함이 하와이 진주만 공격에서
죽어간 특공대원을 찬양하는 내용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극 내용은 나의 마음에 담아야할 추호(秋毫)의 가치도 없었지만
동보계 일류 배우와 명 연출가로 구성된 연습 장면은 큰 공부가 되었다.
놀란 것은 능숙한 배우들은 미리 알아서 척척 진행해 가는 것이고
연출가는 무대 밑에서 경어를 써 가면서 연출에 임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껏 〈동래야류 〉, 〈동래학춤 〉, 〈동래지신밟기 〉 뿐만 아니라
모든 연출 시에 경어를 쓰고 무대 밑에서 연출하는 것은
그때에 보고 배웠던 것 중에 나름대로 좋다고 생각되는 점을 실천에 옮긴 한 예이다.
이 극은 극장 유락좌에서 공연을 한 뒤에 길본흥행(吉本興行) 이름으로
천초극장(淺草劇場)에서 두 번째로 공연을 하고 계속 동경 도내 동보계 극장을 차례로 순회공연 한다는 것이었다.
* 무대 장치 개발
국민극연구소를 수료하고 그 먼저 함대훈(咸大勳) 번역 『앵원(櫻園)』에 이어
오세덕작 『백경정』과 유치진작 『흑룡강』이 연달아 서대문 동양극장에서 개막되었다.
이 『흑룡강』공연에 있어서 무대 장치가(裝置家) 강성범(姜聖範)은
백지에 콩테(소묘재료의 하나)로 도면(圖面)을 그린 것을
연출가의 동의를 얻어 각목으로 틀을 짜고 광목을 치고 채색하면 그만이다.
유락좌의 경우 공연물이 정해지면 연출, 장치, 조명, 효과, 음악 등 분야 전체가 협의를 거쳐
모두가 대본을 통독한 다음에야 비로소 각자는 제작 준비에 들어간다.
장치가는 내용이 사실주의냐, 양식주의냐, 아니면 추상주의냐 등으로 완전히 파악한 다음에
설계한 것을 상부의 결재를 득 한 후에 지하실 대도구(大道具)로 넘어가면
목수일, 종이로 밑 바르는 일, 천을 발라 붙이는 일, 그리고 최종으로 채색을 하는 것이다.
각 전문 분야에서 일하는 역군들은 공(工)․미(美)학교 출신으로
동경도내 동보계열 어느 극장에 가더라도 척척 맞아 들어가도록 완벽한 장치가 제작된다.
우리나라에서『흑룡강』공연의 경우 어떻게 된 셈인지 2층을 상징하는 계단 설계가 맞지 않아
개막 시간이 벌써 지나갔는데도 망치질, 못질하느라 관람객의 빈축을 싸고
심지어 임석 경관까지 무대에 올라와 행패부리는 등 공연 진행의 늦장에
망신을 당하는 것을 볼 때 시급한 것이 무대장치의 혁신이었다.
* 마늘소동
본향구(本鄕區)에 한국 식당이 있다고 해서 가보고 싶던 차에
유학생 4~5명이 서로 어울려 식당으로 갔다.
쇠고기 국밥이라 했지만 내장 한 두 토막에 콩나물 건더기, 다진 마늘이 소복했을 뿐,
그래도 오래간만에 맛보는 우리음식이라서 그런지 맛있게 먹었다.
전차를 타고 몇 정거장을 지나고 보니 몇 안 되는 승객이
우리와는 동떨어진 저쪽 구석자리에서 찌푸린 표정으로 우리 일행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악동들은 일부러 맛 좋았다면서 얘기하며 트림을 연발하며 그들의 시선에 대응하였다.
승객은 모두 내리고 우리뿐이었는데 젊은 운전기사는 전차 종을 땡땡땡 울려대는가 하면
늙은 차장은 코를 연신 풀어가면서 전차에서 내리는 우리에게 하는 말이
“어이 학생님들 고맙네, 앞으로는 싸게 해 줄 테니 전차를 대절하게나” 하는 것이었다.
마늘 냄새를 풍기는 우리를 보고 빈정댄 것이리라.
기왕 마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붙여 본다면,
몇 년 전에 서울에서 외국 인사 200명을 초청해서 우리 음식을 대접하는 자리였는데
회식 후 좌중에서 어느 외국인이
“한국 사람은 마늘을 즐겨 먹는다는 것은 알고있는 바이지만
과일에까지 마늘로 맛을 낸다는 것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였다.
과일을 마늘 양념하여 제공한다거나 즐겨 먹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한 자루의 칼로 여러 가지 조리에 사용하였으니
과일에도 마늘 맛이 날 수 밖엔 별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 후부터 그 요리사는 여러 자루의 칼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이국(異國) 하늘 아래 군상(群像)들
동경제일생명회사 야구 고용선수로 아까시죠(明石町)로 숙소를 옮겼을 때
그곳 신작로(新作路)를 따라 양쪽에 포플러 나무로 길게 뻗은 가로수와 저쪽 바다에는
‘무고오지마(向島)’와 길쭉한 바위섬이 보여서 내 고향 방어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나는 새벽에 신작로 길을 따라 조깅을 했는데, 해가 뜰 무렵에서야 숙소로 돌아오곤 하였다.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별 생각 없이 숙소로 되돌아오는 길에
먼동이 트고 하늘이 훤하게 열려질 무렵에
길옆에 약 20대의 손수레가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눈앞에 있는 수레가 갑자기 저절로 삐거덕 움직이더니 덜커덩 소리와 함께
수레 위에 실은 상자 뚜껑이 펼쳐지면서 열리는데 나는 놀라서 우뚝 서고 말았다.
순간, 상자 뚜껑으로 산발한 머리칼에, 솜이 불쑥 불쑥 베어 나온 누더기 옷에,
종이와 지푸라기 등의 쓰레기를 가득 덮어쓴 물체, 그것은 바로 귀신이었다.
그런데다 그 몰골에 양팔을 높이 들고 “아―” 하면서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켜는 데는 너무나 끔직하고 무서워서 상상조차도 하기 싫은 광경이었다.
금방이라도 나를 해칠 것만 같아서 뒷걸음을 치는 찰라, 모든 수레가
덜커덩 덜커덩 소리와 함께 귀신들이 잠에서 깨어나 “아~ 앙”하는
소리들을 내면서 옷에 묻은 쓰레기와 먼지를 털면서 수레에서 내려선다.
잠시 후 알고 보니 그들은 모두가 동포들로서 헌 누더기를 수집하는 고물 수집상 들이었다.
참으로 비참한 광경이었다.
“왜! 남의 나라에 와서 이런 고생을 하느냐? 고향에서 이렇게 일하면 당장 부자가 되지 않느냐?”하였더니
“옳은 말씀이오, 그러나 이 꼴로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갈 수가 없고,
돈 300원 벌기 위해 이런 꼴로 살고 있소!”하였다.
“언제면 300원을 벌 것이냐”고 물으니
“오늘 날 까지 단돈 10원도 모아본 적이 없다”고 입을 모아 말하였다.
“300원을 모으면 고향에 돌아가서, 먼저 집 한 채를 장만하고 논 서마지기 그리고 소 한 마리를 마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동포들의 처참한 생활상이 이것뿐이랴!
* 또 하나의 가정 창녀가
동향(同鄕)인 김방우 친구는 한두 번 나를 찾아 온 적이 있다.
어느 날 저녁밥을 먹은 후인데 찾아와서는 〈가매이도(龜井戶)〉에 구경 가자는 것이다.
구정호(龜井戶)가 어떤 곳인지를 물으니 싸구려 창녀가(娼女家) 라 하였다.
거절하였더니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가는 곳이며 구경거리가 많다고 하기에
〈천초길원(淺草吉原)〉을 구경 갔을 때의 생각도 나고 해서 같이 가기로 하였다.
강변 높은 둑 밑에 ‘ㄹ’자(字) 식으로 꼬불꼬불 협소한 길 양쪽에
목조 2층 가옥이 줄을 지어 빽빽이 들어 서 있다.
2층은 살림집이고 아래층은 한 명의 창녀를 고용하여 두거나
아니면 세를 놓아서 장사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형식이 바로 가정창녀 마을이다.
좁은 길에는 남녀 구경꾼과 동네 아이들로 크게 붐비고 있다.
나는 길원(吉原)에 갔을 때보다 몇 배의 더한 충격으로 숙소에 돌아 와서
‘여식(女息)을 가진 부모들이여. 여기 와서 이 광경을 보아라!’란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한쪽 옆에 비밀의 문 같은 인상을 주는 문이 있고
밀봉된 앞 벽에 유리로 된 봉창문 크기의 구멍에
창부는 얼굴만 노출하여 쉴 사이 없이 구경꾼들에게 호객을 한다.
“여보 여보 젊은이!”, “ 멋쟁이 신사 양반!” 등으로 외치다가
한사람 잡으면 그 봉창 구멍은 막이 내리고 불이 꺼진다.
얼마 후에 다시 막을 거두고 불이 켜지면 다시 호객을 한다.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아무리 성 개방의 나라 일본이라지만
전시(戰時) 하에서도 공공연히 인간시장이 전개되는데는, 당시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 선보일 사진
유락자 극장 대도구(大道具)에는 늙은 할머니들이 작성된 밑그림 판면에 도배질 하는 것이다.
그중 할머니 한 분이 나더러 장가가라면서 어느 날 선보일 사진 찍으러 사진관에 가자는 것이다.
평소 나의 얼굴은 수염으로 추하였기 때문에 이런 꼴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고 하였더니
할머니는 “ 봐 이 사람아! 선보일 사진은 잘 되어서는 안 돼,
사진을 보고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했지만
뒷날 실제 얼굴을 보았을 때 호감을 배가하여 줄 수 있는 거야”하였는데,
마주칠 때마다 지금 당장 촬영하러 가자면서 졸라 대는 그 할머니의 호의가 고마웠지만 순간마다 거절하기가 너무 힘겨웠다.
* 동경 최초 내습(來襲)
1943년 4월 18일로 기억되는 그 날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도 배가 차지를 않아
다른 식당으로 옮겨 메밀우동 한 그릇을 더 먹고 식당 문을 나서는 순간
“적기다! 적기다!”하는 고함 소리에 얼굴을 들어 보니
바로 눈앞 저 쪽에 한 대의 비행기가 소리 없이 뽀얗게 엷은 연기를 뿜어 가며
아주 저공으로 서쪽을 향하여 비행하고 있었다.
조정실에서 희미하게 움직이는 물체는 분명 조종사임을 직감할 수 있도록 가까운 거리였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생각을 잊은 채 멍히 비행기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저쪽 넓은 마당에는 항상 공중에 떠있어야 할 경구기(輕球氣)를 이제야 올려 띄운다고 야단이다.
남비를 덮어쓴 방위 요원들이 허리끈을 졸라매가면서
여기저기에서 나타나 비로소 고사포를 쏘아대는데,
비행기 주변에서 터지는 뭉게연기가 퍼져 가는 모양을 보고 있으려니
처음으로 공습 사이렌이 다급히 울려 댄다.
이때는 비행기가 벌써 세이로키 병원 건물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광경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투하한 폭탄은 모두 소이탄으로 화재 황토 작전으로 실전한 것 같다.
항공모함 함재기(艦載機)가 단발기가 아니라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는
쌍발기인 것과 모함이 어느 해점(海点)에서도 레이다에 포착(捕捉)되지 않도록
저공으로 비행해 올 줄 몰랐다는 것, 일본의 원시 전쟁은 결국 미국의 과학전쟁에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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