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여인
『국민극 연구소』지원자의 한 사람으로 경성에 도착하여 관철동 조그마한 여관에서 묵기로 하였다.
2층 구석방을 내방으로 택했는데 이 여관의 식구는 여주인,
식모 할매, 뽀이 박군 그리고 심부름꾼 소년 현군 모두 네 사람이었다.
무대인이 되고 싶어서 일본 동경에서 조국 서울에 돌아와서
400명의 지원자 가운데서 선발된 38명중의 한 사람이 된 나는
열심히 수강하고 실습에 임하였으며 토․일요일은 물론 공휴일 없이
아침에 나가면 저녁에 숙소에 돌아오는데
극단『현대극장』에서 공연이 있을 때는 밤 11시가 넘어서야 돌아올 수가 있었다.
어느 날 9시경에 돌아와 하루의 피로로 다리를 뻗고 편히 쉬고 있는데
아래쪽 본채에서 남녀간에 싸우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박군아! 2층에 가서 아저씨 오시라 해!” 한다.
박군이 급히 내 방으로 달려와서는
“선생님 마담이 오시랍니다” 하지 않겠나,
나는 육감적으로 “위급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속담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순간 주인을 대역하는 배우가 되어 태연한 자세로 방안에 들어섰다.
당시 내 나이 25살이오 신장은 1미터 78센티에 체중 70,
술상을 사이에 두고 주인 마담과 한 남자가 대좌하여
서로 일그러진 표정에 눈에는 불을 켜고 마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마담은 나를 보자 말자 용기백배가 되어
“여보, 거기 앉아요!” 하고는
일본말로 “이 자식아, 평양 여자를 모르느냐!”하면서 소매를 걷어붙이는데
사나이는 나를 힐끈 처다 보고는 꽁무니를 쓸쓸 빼더니 슬그머니 도망치듯 나가버리는 것이다.
“박군아! 여기 새로 술 한 상 차려와.” 했지만
나는 술과 담배를 못하는 때인지라 사양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에 밥 먹으러 갔더니 마담 방에
겸상을 차려놓고 함께 먹자는 데 놀랬지만 며칠 간 계속되었다.
이러다간 큰일 나겠다고 고민하던 중에
마침 청홍(靑虹) 박종렬(朴鐘列) 화백의 소개로 다동(茶洞)으로 하숙을 옮기게 되었다.
《서울시절》
* 남남북녀
옮긴 하숙집은 다동(茶洞) 또는 다옥동(茶屋洞, 현 청계천)이라 불리는 곳에 있었는데
큰 개천가에 위치하여 네모로 지어진 전통적인 조선 한옥이었다.
주인은 동아일보사 광고부장으로 재직 중인 신(申)씨였다.
식구는 부인, 아들내외. 초등교 4학년 딸 그리고 20대 조카 처녀, 모두가 여섯 식구였다.
신 부장은 넓은 집에 말동무될 젊은 청년을 식구 삶아 방을 내주고 싶다는 말을
부하 직원에게 입버릇처럼 하면서 경상도 청년을 소원하였다는 것인데
결국 내가 영광스럽게도 선정된 것이다.
광고부장 자리는 광고주들이 광고 잘 내 달라는 뜻으로 선물을 많이 한단다,
그래서 선물이 들어 올 때는 사랑채 청마루에 상을 차려 놓고 같이 먹자는 것이다.
어느 날 굴비를 뜯고 맥주를 마셔가면서 남남북녀 설을 늘어놓는 판인데
마침 며느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을 가르키며
“저것 저년 보게, 저것이 서울 여자라네, 3년이 되었지만 아직 아이를 못나,
그게 여자여! 저년이 두 번째 며느리라네,
내가 남남북녀란 말에 따라 내 며느리감 구하려고
함경북도를 순례해서 함흥 지사장 소개로 함흥 아가씨와 결혼 시켰는데
석달도 못가서 이혼 해 버리고 제가 좋다는 대로 다시 결혼 한 며느리가
저 모양이거든,” 하는 말에는 유감스런 심정이었다.
신부장은 아는 것이 많았는데, 그가 하는 말 가운데
“서울깍쟁이는 넥타이 하지 않는 놈 없고,
대구깍쟁이는 자전거 못타는 놈 없고,
부산깍쟁이는 일본말 못하는 놈 없어,
또 있어” 하면서
살림 잘 살려면 함경도라고 할 것 같았는데
뜻밖에 경상도 처녀에게 장가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식 많이 얻으려면 황해도에, 서비스 많이 받으려면 서울 처녀라야 되,
그런데 우리 집 며느리는 서비스도 몰라” 하고는 내 손을 꼭 잡더니,
“천군! 고향은 울산이라지? 조선 팔도에 울산이 제일로 살기 좋은 고장이야,
기후 좋고, 쌀이 기름지고, 소금 나고, 금나고,
자급자족으로 살기 좋은 곳이란 말이야 하기에
울산은 금이 아니고 쇠붙이로 유명했다고 하였더니,
“천군은 몰라 금이야, 금이란 말이야!” 하면서 고집하는 것이었다.
* 떠나기 싫은 신(申)부장 댁
다동(茶洞)하면 서울의 중심지요, 기생 동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들었다.
당시 집 앞 개천에는 물이 흘렀고 조선시대에 건설 된 돌다리가 놓여져 있었는데
옛 조선시대 사람이 된 기분으로 돌다리 위를 걷기도 하였다.
저 위 건너편에 갈색의 동아일보사 건물이 보였고,
또 저편 멀리 높고 하얀 조선일보사 사옥도 보였다.
어느 날 신부장이 “천군 요즘 밤중에 무슨 소리 들리지 않느냐?”하여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더니,
요즘 조카 년이 밤중에 우물을 덮어쓴다는 것이다.
마당 한 복판에 우물이 있었는데 이 샘물이 이 집의 용수라는 것이다.
이어서 하는 말이 “전에 하지 않던 짓을 천군 때문에 하는지도 몰라,
조카 년은 춘하추동 사시용(四時用) 신발이 여러 켤레나 있으면서,
뭐 오후에 신을 사러 간다나, 천군 어때 예술가 눈으로
신발을 골라 주었으면 하는데 같이…….” 하고는
내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로부터 또 하나의 고민꺼리를 안게 된 것이다.
사실 낙원 같은 이 집을 떠나기가 싫었지만 도심에서 뚝 떨어진 동대문 밖 청량리로 옮겨간 것이다.
* 나도 천씨야
신부장 댁을 떠나기 싫은 생각도 있었지만 하는 수 없이
보따리를 싸들고 청량리 새 하숙집으로 옮겼다.
오세덕(吳世德) 작 『백경정(白鯨亭)』 공연을 무사히 치렀지만,
지친데다 청량리 하숙집이 멀어서 전차를 두 번씩이나 바꾸어 타고
국민극연구소에 출퇴근한지 일주일 쯤 됐다.
어느 날 마찬가지로 지친 몸을 이끌고
하숙집에 들어섰을 때는 밤 11시를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무대인은 고구마 껍질을 먹을 줄 알아야 된다는 교훈을 받았지만
지치고 허기진 배에 도리(道理) 무시하고 밥을 훔쳐 먹는 무대인 지망생이 되고 말았다.
특히 이 날은 오이리 부꾸루(大入袋)가 없는 날이다.
즉 연극 공연시 예상 밖에 수익금이 많을 때 수고한 단원들에게
‘大入袋(오이리 부꾸루)’라 겉면에 쓴 봉투에
약간의 용돈(식사비 정도)을 넣어 주는데 오늘은 없는 날이어서 그런지
더욱 배가 고파 견디지 못하고 부엌에 몰래 숨어 들어간 것이다.
어디선가 불빛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와서 망정이지
그래도 더듬더듬 찬장을 찾아 들킬세라 살금살금 문을 열었다.
삼베로 잘 덮어놓은 양푼에 든 밥과 무김치. 된장을 찾아 정신없이 배불리 먹고
살그머니 방에 들어와 뭣하나 부러움 없는 행복감에 젖은 상태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다음 날에도 어제와 같은 시각에 하숙집에 돌아와 방안에 들어서니
울긋불긋 예쁜 밥상 포 위 쪽지에
“학생 염려 마시고 많이 먹으세요” 라 쓴 쪽지와 함께 밥상이 잘 차려져 있었다.
고맙기도 하고 죄송한 생각을 하면서 맛있게 먹고는 마루에 내어놓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출근하려고 방문을 여는 순간
보름달덩어리처럼 생긴 안주인 얼굴이 불쑥 나타나면서
“학생! 간밤에 잘 먹고 잘 잤니!?” 하면서 빙그레 미소 지었을 때
나의 허물이 모두 폭로된 것 같은 수치심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는데
“도련님이 함부로 부엌간으로 드나들면 못써요!” 한다.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침 밥상을 방안에 들여 놓으면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나도 천씨야! 우리 일가란 말이야!”하면서 밥그릇 뚜껑을 벗겨주면서
“앞으로 체면 말고 말만하세요.” 부드럽고 정다운 그 말 한마디에
얼굴을 들고 쳐다보았을 때 자애롭고 미소 띤 그 표정이 마치 백제의 불상과 같았다.
《서울시절》
* 추탕(鰍湯)과 곰탕
1941년도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에 입성하여 국민극연구소 연구생으로 활동할 때였다.
학습과정에 「인간스케치」란 학습이 있었다.
이는 공연할 작품이 결정돠면 각자 배역도 정해지면서
맡은 역할에 도움이 될만한 성격. 행위, 어투, 표정, 의상 등
보탬이 될 만한 인물과 분위기를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관찰하고 연구하는 학습과정이다.
어느 날 인간스케치 핑계로 동대문 밖 청량리 강변에 있다는
소문난 추탕 집을 몇몇 동료와 함께 찾아갔다.
형제상회라는 상호를 가진 이 식당은 모래밭 위에 세워져 있었고
주변 일대가 모두 모래밭이었는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갈대를 엮어서 칸칸이 만든 온통 갈대 촌이었다.
우리 일행은 한 갈대 칸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여주인이 내어 온 추탕이란,
사기그릇에 담은 쌀과 보리가 반반씩 섞인 밥과,
뚝배기에 담긴 맹국물 속에 두부조각들이 들어있고
그 위에 열을 받아 변색되어 ��한 온마리 미꾸라지가
희멀끔한 눈을 뜬 채로 누워있었다.
젓가락으로 미꾸라지를 집어내고 난 뒤에 숟가락으로 국을 저으니
놀랍게도 두부 속에 감춰져 있던 미꾸라지들이 온통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처음 대하는 추탕이라 한 술도 먹지 못하고 옆 사람들만 살펴보니
모두들 미꾸라지를 통째로 맛있게 옥닥옥닥 씹어 먹고 있었다.
오는 길에 우리 고장에서 요리하여 먹는 추어탕을 설명하였더니
동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데는 오히려 내가 놀랬다.
평일에는 바쁜 나날이었고 일요일에는 공연에 참여하거나 관람, 영화감상 등으로 하루를 보냈다
토요일 공연이 없는 오후에는 여유를 가지고 소문난 먹거리를 찾기도 하였는데,
한번쯤 먹어 볼만하다는 곰탕 집을 찾아 나섰다.
다 허물어져 갈 것 같은 허름한 초가집이었다.
15평 남짓한 울퉁불퉁한 땅바닥에 폭 20센티 가량의 기다란 널빤지가
한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정도의 사이를 두고 가로로 두 줄씩
여러 칸으로 줄을 지어 나지막하게 놓여져 있었다.
자리를 정하여 앉고 보니 앞에 있는 널빤지가 자연스럽게 식탁이 되었다.
저쪽 한 구석에 김을 솔솔 뿜고있는 큼직한 가마솥,
나무로 만들어진 두꺼운 뚜껑은 반쪽만 열게되어 있었는데
그 위에는 돌덩어리 두 개가 얹혀있었다.
여러 계층의 많은 손님들, 불편한 시설 속에서 똑같은 자세와 동작으로,
맛있는 국물 한 방울이라도 흘릴세라 허리를 굽혀가면서 먹어대는 이 광경 속에
나 역시도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동물 본성의 발로 그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눅진눅진한 진국물이 내 입에서 간도 적당하고,
연하고 졸깃졸깃한 고기 살맛이 얼마나 맛좋은지 헛소문이 아니군! 할 정도로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살코기는 더 얻어먹을 수 없지만 계속 끓고있는 국물은 마음껏 떠먹을 수 있다하여
나도 국물을 떠먹기 위해 가마솥 앞에 나섰다.
뚜껑 위의 돌을 치우고 뚜껑을 들어 올리는 순간
뜨거운 김이 확! 하고 얼굴을 뒤덮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눈을 떠보니 이빨을 악물고, 눈을 부릅뜬 채,
커다란 콧구멍이 벌렁한 물체가 내 코앞에서 불쑥 솟아올라와
나도 모르게 윽!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만 것이었다.
순간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알고 보니 소머리였다.
소머리는 탕 국물을 만드느라 항상 솥 안에 들어있는 것인데
솥뚜껑에 짓눌려 있다가 뚜껑이 열리는 순간에 떠오를 수밖엔.
국물을 뜨며 솥 안을 살펴보니 반쪽 고정된 뚜껑 아래 또 다른 하나의 소머리가
지그시 눈을 감고 희생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울시절》
* 국민극연구소 강사들
류자후(柳子厚) 선생은 고고학자이시다.
선생님께서 일과를 끝마칠 무렵에 연구생 중에서 몇몇을 지적하시면서
저녁 7시까지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 나와 달라고 당부하셨는데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들은 선생님을 따라서 야시장에 들러서
어느 골동품상점 안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허리춤에 큼직한 주머니 두 개를 차고 계셨는데
그 주머니 끈을 풀고는 속에 든 엽전들을 탁자위에 와락 쏟아 부었다.
그 많은 엽전 중에서 몇 닢을 골라내시더니
이와 꼭 같은 것을 진열장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엽전들 중에서 찾아내라고 하셨다.
나는 엽전을 애써 찾으면서, 선생님께서는 엽전 수집이 취미라는 차원을 넘어서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선생님께서는 말이 없었다.
강의하실 때는 항상 물을 자주 마셔가면서 하셨는데
열띤 강의 중에는 앞자리에 앉은 연구생들 얼굴에 침인지 물인지 마구 뿌려져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아무튼 노익장 선생님이었다.
이왕가(李王家) 소장의 악기 등 음악에 관련된 물건들을 보관 관리하신다는
대구 출신의 이종태(李鍾泰) 선생의 강의 내용 중에서,
서양인들은 조선의 노래는 3음계 혹은 4음계로만 되어 있다고 단언하고 있지만
그들이 몰라서 하는 소리란다.
우리 소리는 음계가 무궁무진하다면서 자기네들은 흉내도 내지 못해, 하시면서
판소리 어느 구절을 직접 들려주시고 난 연후에
다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소리를 단계적으로 반음에서 반음으로 내려가면서 들려주시고,
소리를 단계적으로 반음에서 반음으로 오르면서,
최(最) 고성(高聲)까지 내시고 끝맺음을 하였다.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는
우리나라 고악기(古樂器)에 돌북(石鼓) 4개가 있었는데
그중 3개는 발굴되었고 나머지 1개는 아직 찾지 못하였다고 하셨다.
돌북(石鼓) 한 개 마저 발굴되었는지 궁금하다.
야담가(野談家) 이면서 소설가인 윤백남(尹白南) 선생은
주로 토요강의 시간에만 나오셨는데 숱한 야담을 들려주시는 가운데
“상금상금 쌍가락지” 노래의 유래는
“조선 중엽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경계가 되는 어느 지점에
부자(富者) ○씨와 빈자(貧者) □씨가 살고 있었는데
서로 친형제 이상으로 사이좋게 잘 지냈다.” 로부터 시작하여
․․․․․․ 중략․․․․․․
5색 호작실로 목을 매어 죽고 말았다.” 로 끝을 맺으시면서
경상도 사투리 노랫말로 노래하신 노랫말은 아래와 같다.
“상금상금 쌍가락지/호작실(오색실)로 닦아내어
/먼데보니 달을래라/자테보니 처잘래라
/그처자야 자는방에/숨소리가 들릴래라로 부르시다가
․․․․․․ 중략․․․․․․
술한동이 걸러놓고/기기동동 띄어놓고
/눈물한쌍 지어주소”로 끝을 맺었다.
“선생님 말씀 중에 이야기의 발상지가 경상남북도 경계지역이라고 하셨는데
명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하였더니
“왜? 자네 경상도냐?”
”예. 울산입니다.”
“경상북도 경주와 이웃이구나. 그렇다면 울산이라고 해도 좋고 경주라고 해도 좋겠지” 라고 하였다.
나는 하늘에 별을 하나 따낸 듯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왜냐면 소년시절 이전부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우리는 “상금상금 쌍가락지” 노래를 즐겨 불러왔지만 유래를 알 수없어 안타까웠는데
비로소 선생님으로부터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유래를 알고부터 극작도 해봤고 여러 사람들에게 들려주기도 하였다.
지금도 노랫말 하나 잊지 않고 있다.
조택원(趙澤元) 선생은 이시이 박구(石井 莫)의 제자인데
스승인 이시이 박구의 양녀인 이시이 미도리(石井 綠)와는 콤비를 이루어
‘만종(晩鐘)’, ‘로댕의 조각’이 두 작품을 발표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무용가이다.
무용론을 맡아 강의 중에 하신 말씀 가운데 최승희(崔承姬)를 가리켜서
국제창녀라면서 욕을 많이 하셨는데
그 이유는 선생께서 초지(初志)는 한국무 최고봉의 무용수가 되고자
누구보다도 열심히 연수하던 중에 최승희가 우연히 나타나
자신의 영역을 강탈하다시피 빼앗아 갔다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은 양보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양보 당했다면서
못내 심정의 억울한 앙금을 지우지 못하는 눈치였다.
성악가 임상희(任祥姬) 선생은 일본 동경 우에노(上野) 음악학교 성악과 출신으로 일본여성이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조선 유학생 임씨와 결혼하여
일본 법식에 따라 남편의 성(姓)에다 이름까지도 한국식으로 바꾼 여성이다.
성악담당이었지만 피아노를 직접 쳐가면서 혼자서 노래를 지도해 주셨다.
가장 먼저 배운 노래가 ‘니나의 죽음’ 인데 나는 지금 그 노래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무용실기 담당 선생님으로는 두 분이 계셨는데 발레를 가르쳐주셨다.
두 분 중에 한 분인 김○○ 선생님은 여성으로 부산 출신인데
소련에서 수학하셨고 서울에 연구실을 두고 계셨다.
성품이 아주 활달하고 열정적이어서 그런지 직선적 춤사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제 일인자라고 해도 과장된 평은 아닐 것이다.
경상도 사투리와 소련식 발음이 뒤섞여, 말씀하실 때 어떤 경우에는 우리연구생들은 웃기도하고 흉내를 내기도 하였다.
선생님은
“학생이 선생 흉보면 우등생 못됩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눈가에는 웃음이 가득하였다.
우리 연구생 모두가 발레신발 없이 맨발로 뛰고 끌고 하느라고
엄지발가락이 닳아 터져서 붕대로 여러 겹 감고 연습에 임했는데,
특히 몸통을 뒤로 제키고 팔과 다리를 일직선으로 쭉 펴는 동작에서 잘 되지 않아 애쓰고 있을 때
다른 한 분의 지도선생님이신 송원(宋園) 선생님께서
“나는 만 30세에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젊은 여러분들처럼은 안했어!
안 될 일이 없어요, 여러분은 하기 싫어 그런 거예요, 부탁은 잘 해봅시다. 입니다! ” 라고 하셨다.
작은 신장에 연세가 들어 보이는 최(崔)○○ 선생님은 오페라가 전공이라 하셨다.
조선에서 최초로 공연한 오페라 ‘춘향전’ 은 선생님의 작품이라고 하셨다.
그 외 선생님 중에는 유랑극단을 20년간이나 이끌고
조선팔도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다는 분도 계셨고
무대장치, 조명, 음향효과 등등 많은 분야의 전문가이신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아흔 평생을 살아오면서 지금껏 해 놓은 일이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으로 반성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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