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43. 서울 국민극연구소 강사들

무극인 2008. 10. 4. 09:24

* 국민극연구소 강사들

 

(국민극연구소 입소 당시 천재동)

 

류자후(柳子厚) 선생은 고고학자이시다.

선생님께서 일과를 끝마칠 무렵에 연구생 중에서 몇몇을 지적하시면서

저녁 7시까지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 나와 달라고 당부하셨는데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들은 선생님을 따라서 야시장에 들러서

어느 골동품상점 안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허리춤에 큼직한 주머니 두 개를 차고 계셨는데

그 주머니 끈을 풀고는 속에 든 엽전들을 탁자위에 와락 쏟아 부었다.

그 많은 엽전 중에서 몇 닢을 골라내시더니

이와 꼭 같은 것을 진열장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엽전들 중에서 찾아내라고 하셨다.

나는 엽전을 애써 찾으면서, 선생님께서는 엽전 수집이 취미라는 차원을 넘어서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선생님께서는 말이 없었다.

강의하실 때는 항상 물을 자주 마셔가면서 하셨는데

열띤 강의 중에는 앞자리에 앉은 연구생들 얼굴에 침인지 물인지 마구 뿌려져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아무튼 노익장 선생님이었다.

 

이왕가(李王家) 소장의 악기 등 음악에 관련된 물건들을 보관 관리하신다는

 대구 출신의 이종태(李鍾泰) 선생의 강의 내용 중에서,

서양인들은 조선의 노래는 3음계 혹은 4음계로만 되어 있다고 단언하고 있지만

그들이 몰라서 하는 소리란다.

 우리 소리는 음계가 무궁무진하다면서 자기네들은 흉내도 내지 못해, 하시면서

판소리 어느 구절을 직접 들려주시고 난 연후에

다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소리를 단계적으로 반음에서 반음으로 내려가면서 들려주시고,

 소리를 단계적으로 반음에서 반음으로 오르면서,

최(最) 고성(高聲)까지 내시고 끝맺음을 하였다.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는

우리나라 고악기(古樂器)에 돌북(石鼓) 4개가 있었는데

그중 3개는 발굴되었고 나머지 1개는 아직 찾지 못하였다고 하셨다.

 돌북(石鼓) 한 개 마저 발굴되었는지 궁금하다.

 

야담가(野談家) 이면서 소설가인 윤백남(尹白南) 선생은

주로 토요강의 시간에만 나오셨는데 숱한 야담을 들려주시는 가운데

 

“상금상금 쌍가락지” 노래의 유래는

“조선 중엽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경계가 되는 어느 지점에

부자(富者) ○씨와 빈자(貧者) □씨가 살고 있었는데

서로 친형제 이상으로 사이좋게 잘 지냈다.” 로부터 시작하여

․․․․․․ 중략․․․․․․

5색 호작실로 목을 매어 죽고 말았다.” 로 끝을 맺으시면서

경상도 사투리 노랫말로 노래하신 노랫말은 아래와 같다.

 

“상금상금 쌍가락지/호작실(오색실)로 닦아내어

/먼데보니 달을래라/자테보니 처잘래라

/그처자야 자는방에/숨소리가 들릴래라”로 부르시다가

․․․․․․ 중략․․․․․․

“술한동이 걸러놓고/기기동동 띄어놓고

/눈물한쌍 지어주소”로 끝을 맺었다.

 

“선생님 말씀 중에 이야기의 발상지가 경상남북도 경계지역이라고 하셨는데

 명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하였더니

“왜? 자네 경상도냐?”

 ”예. 울산입니다.”

“경상북도 경주와 이웃이구나. 그렇다면 울산이라고 해도 좋고 경주라고 해도 좋겠지” 라고 하였다.

나는 하늘에 별을 하나 따낸 듯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왜냐면 소년시절 이전부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우리는 “상금상금 쌍가락지” 노래를 즐겨 불러왔지만 유래를 알 수없어 안타까웠는데

비로소 선생님으로부터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유래를 알고부터 극작도 해봤고 여러 사람들에게 들려주기도 하였다.

지금도 노랫말 하나 잊지 않고 있다.

 

조택원(趙澤元) 선생은 이시이 박구(石井 莫)의 제자인데

스승인 이시이 박구의 양녀인 이시이 미도리(石井 綠)와는 콤비를 이루어

‘만종(晩鐘)’, ‘로댕의 조각’이 두 작품을 발표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무용가이다.

무용론을 맡아 강의 중에 하신 말씀 가운데 최승희(崔承姬)를 가리켜서

국제창녀라면서 욕을 많이 하셨는데

그 이유는 선생께서 초지(初志)는 한국무 최고봉의 무용수가 되고자

 누구보다도 열심히 연수하던 중에 최승희가 우연히 나타나

자신의 영역을 강탈하다시피 빼앗아 갔다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은 양보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양보 당했다면서

못내 심정의 억울한 앙금을 지우지 못하는 눈치였다.

 

성악가 임상희(任祥姬) 선생은 일본 동경 우에노(上野) 음악학교 성악과 출신으로 일본여성이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조선 유학생 임씨와 결혼하여

일본 법식에 따라 남편의 성(姓)에다 이름까지도 한국식으로 바꾼 여성이다.

성악담당이었지만 피아노를 직접 쳐가면서 혼자서 노래를 지도해 주셨다.

가장 먼저 배운 노래가 ‘니나의 죽음’ 인데 나는 지금 그 노래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무용실기 담당 선생님으로는 두 분이 계셨는데 발레를 가르쳐주셨다.

두 분 중에 한 분인 김○○ 선생님은 여성으로 부산 출신인데

소련에서 수학하셨고 서울에 연구실을 두고 계셨다.

성품이 아주 활달하고 열정적이어서 그런지 직선적 춤사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제 일인자라고 해도 과장된 평은 아닐 것이다.

경상도 사투리와 소련식 발음이 뒤섞여, 말씀하실 때 어떤 경우에는 우리연구생들은 웃기도하고 흉내를 내기도 하였다.

선생님은

“학생이 선생 흉보면 우등생 못됩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눈가에는 웃음이 가득하였다.

우리 연구생 모두가 발레신발 없이 맨발로 뛰고 끌고 하느라고

 엄지발가락이 닳아 터져서 붕대로 여러 겹 감고 연습에 임했는데,

특히 몸통을 뒤로 제키고 팔과 다리를 일직선으로 쭉 펴는 동작에서 잘 되지 않아 애쓰고 있을 때

 다른 한 분의 지도선생님이신 송원(宋園) 선생님께서

 

“나는 만 30세에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젊은 여러분들처럼은 안했어!

안 될 일이 없어요, 여러분은 하기 싫어 그런 거예요, 부탁은 잘 해봅시다. 입니다! ” 라고 하셨다.

 

작은 신장에 연세가 들어 보이는 최(崔)○○ 선생님은 오페라가 전공이라 하셨다.

조선에서 최초로 공연한 오페라 ‘춘향전’ 은 선생님의 작품이라고 하셨다.

 

그 외 선생님 중에는 유랑극단을 20년간이나 이끌고

조선팔도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다는 분도 계셨고

 무대장치, 조명, 음향효과 등등 많은 분야의 전문가이신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아흔 평생을 살아오면서 지금껏 해 놓은 일이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으로 반성 해 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