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56. 부산이 낳은 명우(名優) 이해랑(李海浪)

무극인 2008. 11. 11. 10:51

          * 부산이 낳은 명우(名優) 이해랑(李海浪)

 부산극장에서『학 외다리 들다』를 가지고 극단 신협(新協)이 해방후 처음으로 공연을 올렸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일정(日政)때를 회고해 보면,

유랑 극단으로서는 김소랑(金小浪)의 취성좌(聚星座),

윤백남(尹白南)의 민중극장(民衆劇場),

이세기(李世基)의 예술극회(藝術劇會),

오대양(五大洋)같은 유명한 극단 외에도

약 20개 되는 극단이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했고,

고협(高協), 청춘좌(靑春座), 호화선(豪華船), 현대극장(現代劇場)등

약 10개 극단은 서울을 중심으로 주로 서대문 동양극장 등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영화사는 조선영화사(朝鮮映畵社), 고려영화사(高麗映畵社) 2개사로

조선영화사는 재산이 넉넉했고, 고려영화사는 그렇지 못하여

일본(日本) 동보영화사(東寶映畵社)의 도움을 다소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연극·영화배우들은 해방과 함께 대거 월북(越北)했지만

현대극장 소속이던 이해랑, 김동원, 서대근, 유계선, 전옥같은 명우들은

그대로 남아 한국 극예술을 사수했다.

강홍식(姜弘植)은 전옥(全玉)과 부부 사이로

조그마한 이견(異見)으로 평양(平壤)에 별거 중 해방을 맞이한 것인데

그 후 소식은 들은 바가 없다.

연극이 끝나고 분장실로 들어가는 도중 분장 그대로의 김동원을 만났지만

급한 일에 나가는 중이라면서 손만 잡아 보고,

이해랑 과의 재회는 서로 부둥켜안고 반가와 눈물을 흘리면서 추억을 더듬어 이야기하면서,

이해랑은

   “한국 전통문화 계승발전을 위해서는 극예술(劇藝術)에 국민들의 관심도가 높아야 되는데,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아동극(兒童劇)의 저변을 널려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평소에 나의 생각과 일치하여 내가 아동극에 더욱 열중하는데 큰 힘이 되기도 하였다.

아는 바와 같이 이해랑은 부산 출신이다.

내가 연구생 시절 하나밖에 없는 경상도 출신인 나와는 동향이라 해서

수강 시에는 틈만 있으면 나란히 앉아 서로 간의 객정을 달래기도 하였다.

연극계의 대스타와 일개 연구생이였던 나와의 만남은 영원히 기억하리라.

김동원은 나와 동갑이였고, 이해랑은 연배였다.